소설리스트

162. 아라비아를 향해 (163/326)

  < 162. 아라비아를 향해 >

  162.

  나바테아 왕국은 아라비아반도 출신의 유목민들이 수도 나바투를 중심으로 건국한 전통 있는 국가였다.

  이들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어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던 이들은 위대한 대제의 사후 급속도로 세력을 불렸다.

  나바테아 인들을 한데 통합해 통일 왕조를 완성한 하리타트 3세 무렵에는 로마와 국경을 마주하게 됐다.

  유목민족 출신답지 않게 상업에 능통했던 그들은 로마 제국에게서 거대한 돈의 냄새를 맡았다.

  나바테아인은 지중해 연안에서 홍해 북부까지 영향을 끼치는 거상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이 당시 중동에서 가장 돈이 되는 물품은 역시 향신료와 유향이었다.

  로마와 이집트는 종교의식과 향료를 만드는데 이 유향을 사용했는데 이 물품을 구하려면 나바테아를 거치는 수밖에 없었다.

  향신료야 이제 파르티아령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질 좋은 유향은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 생산되는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바테아인들은 현지에서 유향을 싼값에 조달해 같은 무게의 보석보다 더 비싸게 팔았다.

  이렇게 엄청난 부를 축적한 나바테아는 현대에 페트라로 알려진 그들의 수도에 수많은 건축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로마의 건축가들이 많은 돈을 받고 페트라로 몰려들었다.

  최신 기술이 집약된 웅장한 건축물들과 동방과 서방에서 수집한 예술품들이 도시를 가득 채웠다.

  기원전 1세기의 페트라는 분명 동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확장되는 부만큼 나바테아의 왕 말리쿠 1세의 야망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졌다.

  아라비아반도 남쪽을 주름잡고 있던 사바 왕국은 현재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다.

  지금은 새롭게 세력을 키우고 있는 힘야르 왕국, 카타반, 하드라마우트 등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었다.

  사바 왕국까지 포함해서 네 국가 전부 나바테아 왕국에 비하면 국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만약 나바테아가 저들을 복속시킬 수만 있다면 홍해의 교역로에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대한 야망은 시작도 하기 전에 암초에 걸렸다.

  로마에서 날아든 한 장의 서신 탓이었다.

  마르쿠스가 보낸 사신이 들고 간 서신에 적힌 내용은 공손했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요약하자면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기어들어 와라'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국가도 아닌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의 파급력은 굉장했다.

  서신 한 장에 나바테아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말리쿠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 연일 대책 회의를 열었다.

  안티오키아에서 활동 중인 정보원들에게도 일제히 로마군의 동향을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가 로마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분명 놈들은 군사를 이끌고 내려올 것이다. 만약 저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막아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리쿠 1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하들 사이에서 여러 말들이 솟아 나왔다.

  "로마는 강대합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막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1할이 채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 왕국의 군대는 강합니다. 거기에 필요하다면 남쪽에서 여러 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도 있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논하는 건 나라를 들어다가 그냥 바치자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어허! 현실을 직시하셔야지요. 지금까지 로마와 전쟁을 벌여서 좋은 꼴을 본 나라가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가 첫 번째 사례가 되면 될 게 아니요!"

  주전파와 화친파로 갈린 왕궁의 여론은 매일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주전파는 주로 군부에 속한 이들이었고 화친파는 국제정세에 능통한 자들이 대다수였다.

  이대로 가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말리쿠 1세는 양측의 의견을 따로따로 들어보기로 했다.

  주전파의 대표격 인물인 군부의 수장 아르라트가 결연한 어조로 국왕에게 고했다.

  "폐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쟁은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가 보낸 서신은 그저 명분을 굳히기 위한 술책일 뿐입니다."

  화친파의 인사들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고 하자 말리쿠 1세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장군의 의견을 잘 알겠네. 하지만 중요한 건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가. 만약 이길 가능성이 있다면 당연히 싸워야지. 하지만 질게 당연한 싸움을 한다면 무의미한 피만 흐르게 되는 꼴이 아니겠나."

  "로마는 분명 저희보다 강합니다. 하지만 전쟁의 목표는 로마군을 격퇴하는 것이지 저희가 로마를 정복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저희의 전 병력을 소집하고 재화를 풀어 중부와 남부의 사막 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시옵소서. 그렇게 한다면 수적으로는 이쪽이 우세를 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수성전략으로 일관한다면 로마와 더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아르라트는 그 뒤에도 여러 가지 주장을 했지만 요지는 결국 어떻게 하더라도 싸움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말리쿠 1세는 이어서 화친파의 수장인 샤킬라빌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로마와 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먼저 양군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전력 차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참으로 민망하지만 저희의 힘으로 로마군과 싸우는 건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행위와 다른 바가 없습니다.

  용병을 끌어모으면 된다는 주장이 있던데 용병은 결국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전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언제든 꽁무니를 빼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로마와 싸우는 데 앞장서라고 한다면 과연 사막 부족들이 협력을 하겠습니까.

  "

  샤킬라빌의 말에 화친파의 인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리 높여 전쟁을 주장하던 주전파 장수들을 보며 냉정하게 잘라 단언했다.

  "로마는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했던 적들과는 수준이 다릅니다. 안티오키아에 심어둔 정보원들의 보고로는 최소 8개 군단 이상이 이번 전쟁에 동원될 거라고 합니다.

  로마군 8개 군단이면 5만이 넘습니다. 로마군의 평균적인 질을 고려해 봤을 때 우리가 아무리 숫자를 맞춘다고 해봐야 정면대결로는 도무지 승산이 없습니다.

  게다가 로마군을 이끌고 내려오는 자는 그 동방의 절대자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입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익히 들어 알고 계실 거라 사료되옵니다.

  "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라···그 이름이 언제부터인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왔었지."

  말리쿠 1세의 안색이 침중함으로 물들었다.

  나바테아에 마르쿠스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으로 전해진 건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말리쿠는 새파랗게 어린 총독에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로마에서 한창 입지를 다지고 있는 성공한 정치인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그 이상은 신경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이기든 심대한 피해를 입을 테고 그러면 나바테아에게는 나쁠 게 없다는 게 신하들의 분석이었다.

  말리쿠 1세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이 기회를 살려 자신들이 확보한 교역로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전쟁은 로마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로마가 파르티아를 박살내고 메소포타미아 지대를 가져가는 데 걸린 시간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었나···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게.'

  순식간에 동방을 완전히 장악한 로마의 영향력은 이후 끝도 없이 치솟았다.

  샤킬라빌이 말리쿠 1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본국이 아무리 부유해졌다고 해도 수년 전의 파르티아에 비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 파르티아가 로마에게 단 두 번의 전쟁으로 멸망했습니다. 충격적인 건 그 두 번의 전쟁이 각각 1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까 지금 이토록 고민을 하는 게 아니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홍해 건너편에 있는 두 개의 강력한 왕조가 폼페이우스의 손에 무너진 게 바로 작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들의 국력 역시 저희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희를 위협하는 건 바로 이런 일을 태연하게 벌이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파르티아와 쿠시 왕국, 악숨 왕조의 멸망이 거론되자 대전의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샤킬라빌의 말대로 저 세 개의 왕국 중 나바테아보다 확실히 약하다고 할 수 있는 국가는 아무데도 없었다.

  특히 파르티아의 강력함은 나바테아인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로마의 손에 간단히 무너졌다는 소식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경악했던가.

  "폐하. 파르티아는 먼저 로마를 도발해 침략을 당했던 것이지만 다른 두 왕국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속국이 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전쟁을 택했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처음에 로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계속 존속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 이집트의 사례를 보십시오. 로마에게 재빨리 굽히고 들어간 그들은 로마의 동맹국이라는 지위를 보장받고 있지 않습니까.

  "

  샤킬라빌의 조리 있는 분석에 말리쿠 1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은 주전파는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맨몸으로 굶주린 사자 앞에 던져진 형국이로다. 그렇다고 변변찮은 무기 없이 사자와 적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역시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내어주고 목숨을 부지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샤킬라빌의 대답은 단호했다.

  "싸우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죽기 살기로 싸우고 기적이 따라준다면 한 번 정도는 밀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왕국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재침공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절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결국 방법은 외교로 푸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아르라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결국 항복하고 나라를 넘기자는 말과 뭐가 다르오?"

  "헛된 싸움을 벌여 재산과 병력을 전부 탕진하고 속주가 되는 것과 자존심을 숙여 나머지 모든 걸 온존하는 차이가 있지요. 폐하, 전쟁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현지 귀족들을 중용하는 게 로마의 방식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거리낌 없이 전쟁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정곡을 찔린 주전파 장수들의 몸이 움찔했다.

  샤킬라빌의 말대로 전쟁을 주장하는 장수들이 단순히 흐름을 읽지 못할 정도로 바보라서 로마와 싸우려는 게 아니었다.

  로마는 지금까지 전쟁을 하더라도 왕족들을 제외한 현지 귀족들을 숙청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전쟁을 해서 로마를 격퇴하면 그보다 좋을 게 없고, 패색이 짙다면 항복하면 자리를 보전받을 수 있다.

  대다수의 주전파는 이런 약삭빠른 계산을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

  아르라트가 침묵에 빠지자 샤킬라빌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폐하께서는 지금 저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과는 입장이 다르옵니다. 로마는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적대한 왕국의 왕족은 모두 자신들의 땅으로 압송해 가 모욕을 주었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어 왕조의 안녕을 도모하시옵소서."

  충심이 뚝뚝 묻어나오는 그의 조언에 말리쿠 1세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감았다.

  "왕국을 지키는 일이라면 다소의 수치야 감내해야겠지. 승산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으니···로마의 사신에게 말하라.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 세부사항은 직접 만나 논의하자고."

  샤킬라빌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하들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회담에 왕이 직접 나가는 건 조금 굴욕을 당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전쟁을 해서 패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자신들의 왕이 이런 치욕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인가.

  샤킬라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머리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폐하! 어찌 그런 굴욕을 겪으시려 하십니까. 차라리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니. 내가 회담을 하는 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보네. 일국의 왕이 직접 고개를 숙이는 것이니 저쪽도 최소한의 예우를 해주겠지."

  말리쿠 1세는 현명한 이였다.

  동방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로마와 맞상대하는 건 어리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릎을 굽혀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면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숙일 수 있다.

  왕이란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게 말리쿠 1세의 지론이었다.

  ※※※

  마르쿠스는 나바테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출정할 수 있도록 군단을 소집했다.

  이미 로마를 떠나기 전부터 전령을 보내 준비시켰던 만큼 편성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나바테아가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온 건 전 군단의 출전 준비가 완료된 뒤였다.

  말리쿠 1세는 심지어 로마가 원하면 자신이 직접 안티오키아까지 갈 마음이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항복하겠다는 답을 들었음에도 군단을 해산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가 노리고 있던 건 나바테아 왕국 하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바테아의 왕에게 전해라. 굳이 안티오키아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 내가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갈 테니 회담은 거기서 진행하기로 하지. 이후의 행동방침은 회담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8개 군단을 이끌고 내려가겠다는 말에 나바테아 사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왕국을 쓸어버리겠다는 협박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왕국으로 돌아간 사신은 말리쿠 1세에게 마르쿠스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말리쿠 1세는 여기에서 또 한 번의 딜레마에 빠졌다.

  상대방이 군단을 이끌고 온다면 자신 역시 최대한 많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군대만을 소집해 로마에게 복종의 의사를 밝힐 것인가.

  보통 전자의 방침을 택하는 게 당연했으나, 이건 일이 틀어지면 자신들도 한 번 붙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비칠 우려가 있었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 로마에게 반항할 의사가 없다는 걸 확실히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회담에 앞서 너무 얕잡아 보일 가능성이 존재했다.

  결국 말리쿠 1세는 최소한의 호위병과 수행원들만으로 회담에 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게 마르쿠스가 일부러 자신을 떠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어차피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기로 한 이상 조금 구차해 보이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양자 간의 국력 차이를 고려해 보면 위험분자로 찍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얕잡아 보이는 게 백배는 나았다.

  병력을 소집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니 더 꾸물거릴 이유도 없었다.

  페트라에서 출발해 북쪽의 국경선까지 도달한 말리쿠 1세의 눈앞에 로마군의 웅대한 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8개 군단이 묶는 숙영지인 만큼 그 규모가 어지간한 마을보다도 커다랗게 보였다.

  이런 기초적인 진지 구축능력에서부터 군대가 가진 기본적인 역량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법이다.

  말리쿠 1세는 마중을 나온 로마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숙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쭉 늘어선 병사들의 막사를 지나니 임시로 세워둔 병원과 대장간이 보였다.

  임시로 머무는 숙영지에 이 정도의 공을 들인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말리쿠 1세가 숙영지 중앙에 위치한 제단에 이르자 앞서 걷던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주셔야 합니다."

  말리쿠 1세는 순순히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제단으로 향하는 길에는 진홍색의 융단이 깔리고, 번뜩이는 강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말리쿠 1세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이한 형태의 갑옷이었다.

  파르티아의 중갑기병들이 강철로 된 갑옷을 입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과도 조금 달라 보였다.

  그의 등 뒤에서 호위병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말리쿠 1세는 그런 부하들을 질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원래 사람이란 미지의 대상과 마주쳤을 때 혼란과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자그마한 동요로 끝났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다스리는 데 능숙한지 나타내주는 증거라 할 수 있으리라.

  말리쿠 1세는 마음을 다잡고 융단 너머로 시선을 움직였다.

  제단의 위에는 옥좌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장엄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느낌을 풍기는 전사가 총사령관의 의자 옆에 공손히 시립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는 로마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내라고 하기엔 아직 너무 젊었다.

  갑옷을 입지 않고 토가를 걸치고 있어서 오히려 눈에 확 들어왔다.

  '저자가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

  단 1년 만에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한 괴물이라기에 어떤 자일까 궁금했었는데 확실히 한눈에 비범한 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일국의 왕을 맞이하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무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시선이 말리쿠 1세를 꿰뚫어 보는 게 느껴졌다.

  "후우."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은 협상이 될 거라는 예감은 확신이 섰다.

  사실 저런 젊은 나이에 로마의 정점에 선 이가 어수룩한 이일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바테아 왕국만큼은 존속시켜야 한다.

  각오를 다진 그가 이윽고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임페라토르시여, 나바테아 왕국의 왕 말리쿠 전하가 도착했습니다."

  계단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목소리에 마르쿠스가 입을 열었다.

  "잘 와주었습니다. 나바테아의 왕이시여. 제가 로마의 동방 속주를 총괄하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존대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옥좌에 앉아 시선을 내려다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말리쿠 1세는 그 어떤 표정도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대한 환영에 감사하오. 위대한 메소포타미쿠스의 명성은 우리 왕국에도 자자한데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니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것을 알겠소."

  "과찬이십니다. 저도 평소 전하가 지혜로운 군주라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그게 허명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먼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주신 데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마르쿠스가 아주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 나름대로 왕국을 위한 최선의 판단을 내린 것이오. 로마와 나바테아는 지금까지 적대 관계였던 적이 딱히 없지 않소? 앞으로도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건설적인 관계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오."

  "그럴 수만 있다면 저도 더 바라는 게 없을 겁니다."

  마르쿠스는 너스레를 떨 듯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먼 길을 와주신 전하를 이곳에 세워두고 계속 떠드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겠지요. 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 합니다."

  "좋소. 로마가 원하는 게 무엇이오? 우리는 무리한 게 아니라면 뭐든지 들어드릴 요량이 있소."

  "저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홍해 교역로를 완전히 확보하는 것. 그러니 나바테아 왕국이 서쪽을 비워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요구사항에 말리쿠 1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162. 아라비아를 향해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