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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파라오 (133/326)

  < 132. 파라오 >

  132.

  "그럼 아버지는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는 게 확실한 거지?"

  "예, 공주님. 파라오께서는 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시긴 해도 아직 일상적인 생활은 가능하십니다. 다만 요새 쉽게 몸이 피로하시어 자주 눈을 붙이고 계십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의 소견에 아르시노에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도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졌다.

  아르시노에가 보기에도 아울레테스의 건강이 매우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짙은 피로감이 만면에 가득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울레테스는 몇 년 만에 재회한 딸들과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체력이 떨어진 듯 침소로 돌아갔다.

  지금 당장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르시노에는 아버지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클레오파트라와 침실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로 말없이 정원까지 걸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아르시노에는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진한 한숨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을 날려 버렸다.

  "아버지가 편찮으신 걸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런 것 치고는 먼저 쪼르르 달려가서 아버지와 독대를 했다는 말이 들리던데."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아르시노에도 더 추궁하진 않았다.

  "로마에서 혼자 지내는 건 어때? 외롭지는 않아?"

  "그럭저럭 지낼 만해. 배울 것도 많고 대화가 통하는 상대도 있고. 마음 같아서는 몇 년 정도는 로마에 머물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을 정도야."

  "그래? 똑똑한 사람은 좋겠네. 자기감정을 완벽히 제어하는 게 가능하니까. 난 평생 노력해도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할 텐데 말이야."

  클레오파트라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르시노에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네가 부러운데."

  "부럽다니 뭐가?"

  "시간이 되면 나중에 카드나 하자.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봐줄게."

  어리둥절한 아르시노에를 놔두고 클레오파트라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멀어져 가는 클레오파트라의 뒷모습은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던 아르시노에는 정원에서 그리 반갑지 않은 얼굴과 마주쳤다.

  "아르시노에 공주님, 이거 굉장한 우연이로군요."

  속삭이는 것처럼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만들어낸 그림자 안에 그나이우스가 서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아르시노에에게 다가왔다.

  젊었을 적의 폼페이우스를 빼닮은 수려한 외모는 확실히 눈길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만약 아르시노에의 취향이 좀 더 선이 굵은 남자가 아니었다면 살짝 마음이 동했을지도 몰랐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님이셨죠. 여기엔 어쩐 일로 발걸음을 하셨나요?"

  "정원이 아름다워서 저도 몰래 넋을 잃고 구경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공주님이 거하시는 곳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아르시노에라고 해도 그런 말에 속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건 우연을 가장한 접근이었다.

  그나이우스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아르시노에는 반사적으로 앞을 가로막으려는 호위병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제게 공주님과 잠시 시간을 보낼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요. 기왕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여기서 거절을 해봐야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 다시 찾아올 게 뻔했다.

  상대방은 마르쿠스와 대등한 권력을 지닌 폼페이우스 가문의 장남이었다.

  좋은 인상을 주지 않더라도 굳이 대립하는 인상을 심어줄 생각은 없었다.

  '마르쿠스 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으니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봐도 나쁠 건 없겠지?'

  아르시노에는 시종에게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내오라고 이른 뒤, 직접 그나이우스를 안내했다.

  그녀의 발길이 향한 곳은 과거 마르쿠스와 처음 만났던 장소였다, 바다 저편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햇빛 아래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나이우스는 이집트 왕족의 앞에서도 전혀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철저하게 예의를 차리고 있었으나 내심 자신의 위치가 더 높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공주님에 대한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되는 군요. 공주님의 아름다움을 절반도 채 묘사하지 못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도 폼페이우스 가문에 대한 소문은 어렸을 때부터 쭉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클레오파트라 공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공주님에 대한 화제가 몇 번인가 언급이 됐었거든요.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제 호기심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나이우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앞에 놓인 과일을 까먹기 시작했다.

  아르시노에는 기묘한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셨다고요?"

  "예. 로마에서도 몇 번 만났고, 알렉산드리아로 오는 동안에도 다양한 화제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이래저래 저희들의 이해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더군요."

  "그건 조금 흥미롭네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가 폼페이우스와 연줄을 만들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야망이 크고 미래를 생각해 다양한 구상을 그리고 있다는 건 아르시노에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나이우스와 손을 잡고 뭔가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그나이우스는 왜 그런 사실을 자신의 앞에서 자랑스레 떠들고 있을까.

  상식적으로 아르시노에가 마르쿠스의 편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아르시노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포도주로 입술을 축였다.

  "언니와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누시나요?"

  "말씀드렸다시피 화제가 꽤 다양합니다. 로마나 이집트의 차이점과 공통점, 그리고 정치와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죠. 아,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님은 이집트의 미래에 굉장히 걱정이 많으시더군요."

  아르시노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집트의 미래라니요?"

  그나이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일부러 대화를 유도한 듯 자연스레 준비된 답을 들려주었다.

  "로마가 악숨을 정벌하면 북아프리카의 지배권은 명실공히 저희 가문이 쥐게 됩니다.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이 폼페이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가 되는 셈이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래도 이집트는 동쪽을 통해 로마의 동방 속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동방 속주의 중심이 시리아에서 점점 메소포타미아로 옮겨갈 거라는 겁니다. 로마는 여기서 동쪽과 북쪽으로 경계를 더 확장해 나갈 테니까요."

  "···그런데 언니가 왜 그런 걸 걱정하는 거죠? 로마와는 지금처럼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동맹국으로 남으면 될 텐데요."

  아르시노에가 딱, 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나이우스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집트로서는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님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당장 로마는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손에 넣었고, 추가로 북쪽의 비옥한 갈리아마저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이집트의 곡물은 물론 중요하지만 이전처럼 로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뜻이죠."

  "그건···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게다가 홍해의 지배권을 로마가 가져가는 이상 나일강에서 홍해로 통하는 뱃길을 저희가 애용하게 될 겁니다. 수많은 로마의 상선과 군함들이 이집트의 강을 가로지르겠지요.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일 겁니다. 클레오파트라 님은 이번 회담에서 이 일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보더군요."

  그나이우스는 빙빙 말을 돌려서 표현했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다.

  앞으로 이집트는 마르쿠스보다는 폼페이우스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다.

  "제가 이 대화를 마르쿠스 님에게 그대로 말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나요? 그분이라면 당연히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으시리라 보는데요."

  "그래 주면 감사하죠. 저는 그분과 딱히 경쟁하거나 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기는 건 원로원의 몇몇 나이든 귀족들뿐이겠죠. 저는 그저 아프리카 지역에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혼란이 우려되는 것뿐입니다. 제가 마르쿠스 님을 경쟁상대로 여겨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마르쿠스의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그나이우스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러나 아르시노에는 그가 필요 이상으로 마르쿠스와의 경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마르쿠스에게 사전에 이야기를 들어두었던 덕분에 눈치채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나이우스가 과거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모습과 약간 겹쳐 보이는 느낌도 들었다.

  아르시노에는 자연스레 그나이우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척하면서 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그렇긴 하죠. 아무래도 지금 로마에 마르쿠스 님과 경쟁할 수 있는 젊은 정치가는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경쟁심이 들지조차 않을 정도로 차이가 너무 나니 다수의 젊은 귀족들은 그냥 마르쿠스 님의 파벌에 서길 원하고 있다는 말도 들리고요. 그나이우스 님조차 마르쿠스 님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는다면 저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저는 필요 이상으로 대립할 마음이 없을 뿐 숙이고 들어가려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장차 로마를 이끌어나갈 두 가문의 수장이 사이가 좋지 않으면 국내외로 혼란이 일어날 뿐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였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지레짐작했네요."

  아르시노에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나이우스는 마르쿠스를 강하게 의식하고 그와 충분히 해볼 만 하다고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그나이우스의 판단에 엄청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이야 양측의 입지가 비교되지 않지만, 그나이우스는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한 젊은이였다.

  이번 악숨원정에서 공을 세우고 성공적으로 폼페이우스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면 그의 세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마르쿠스가 동방 속주 전역을 자신의 아래에 두고 있다고 해도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결코 그 밑이 아니었다.

  북아프리카 속주와 히스파니아 지역, 그리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 이번에 정벌할 악숨까지 전부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리여도 10년, 20년을 내다보면 또 모른다.

  여기에 20대 특유의 젊은 혈기까지 더해졌으니 그나이우스가 내심 마르쿠스를 라이벌로 여기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양자의 능력 차이를 알고 있는 폼페이우스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는 아들의 심리를 다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나이우스가 자신의 속내를 잘 숨긴 덕분이기도 했으나,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생 열등감을 품어본 적이 없는 폼페이우스는 아들의 본심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했던 까닭이다.

  그나이우스는 치밀어 오르려는 분노를 꾹 참아 넘기며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감정을 완벽히 다스리기엔 너무 젊었던 그는 끝내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지고야 말았다.

  "공주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화제일 겁니다. 만약 클레오파트라 공주님이 차기 파라오로 낙점되신다면 이집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르시노에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며 그나이우스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후로는 특별한 화제는 오고 가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주변이 어둑해질 시기가 되자 그나이우스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돌아갔다.

  그리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게 그나이우스의 첫인상에 대한 아르시노에의 평가였다.

  ※※※※

  아르시노에는 그나이우스와 있었던 대화를 마르쿠스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마르쿠스로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솔직히 아르시노에가 이 정도로 해줄 줄은 몰랐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마지막 말은 분명 그나이우스의 실수입니다. 원래는 공주님을 떠보려고만 했을 텐데 아무래도 머리에 열이 좀 올라왔었나 보군요."

  "제가 그게 어떤 상태인지 알거든요. 뭐랄까···나는 절대 그 사람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걸 티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고나 할까요? 그나이우스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마르쿠스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그나이우스와 좋은 관계로 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단순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경우라면 오히려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겉에서는 화기애애한 척하며 뒤통수를 칠 기회만 노리고 있는 자와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아르시노에 님, 일단 그나이우스가 추가로 떠보는 말을 한다거나 이간질을 하려고 하면 적당히 넘어가 주는 척 연기를 해주십시오. 너무 티 나게 반응을 보이면 그쪽도 의심을 할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반신반의하는 모습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네. 그런데 언니가 그나이우스의 편에 섰을 가능성도 높아 보이는데···그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괜찮습니다. 단순히 그나이우스의 허풍일 가능성도 있고 무엇보다 클레오파트라 님은 총명하시니까요. 설령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이후의 상황을 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실 겁니다."

  "그럼 그나이우스가 계속 물밑에서 마음껏 헤엄치게 놔두라는 말씀이신 거죠?"

  아르시노에가 확인하듯 물었다.

  마르쿠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확실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폼페이우스 님의 얼굴을 봐서 적당히 봐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는 도련님에게는 어느 정도 쓴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겠죠. 정계에 첫발을 내딛은 걸 환영해주는 차원에서 실패라는 소중한 경험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드릴 겁니다. 부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군요."

  "···치를 떨지 않을까요?"

  마르쿠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사실상 그나이우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마르쿠스도 폼페이우스의 아들을 대놓고 짓밟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능력 차이를 실감하고 어림도 없는 야망을 버려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나 만약 끝까지 자신을 적대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마르쿠스는 아르시노에를 떠나보낸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미리 약속해둔 장소로 향했다.

  파라오의 개인 정원으로 들어서자 마르쿠스의 얼굴을 확인한 호위병들이 길을 터주었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포도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아울레테스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로군, 여기 와서 앉게."

  "상하 이집트의 주인인 위대한 아문-라의 화신을 뵙습니다. 건강이 상하셨다는 말이 들려 걱정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네. 아무래도 나이가 드니 이래저래 잔병치레가 많아진 듯한 느낌이야."

  아울레테스가 눈짓을 보내자 시종이 마르쿠스의 잔에 향기로운 포도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는 조금 거리를 두고 호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했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너희들은 물러가 보아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문-라의 화신이시여."

  호위와 시종들이 절도 있는 모습으로 거리를 멀찍이 벌려 정원 입구까지 물러났다.

  드넓은 정원에는 이제 두 사람만 남았다.

  아울레테스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내용물을 털어놓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라면 어째서 내가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이유를 짐작하고 있겠지?"

  "솔직히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만."

  "나도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릴 마음은 없네. 그래도 막상 일이 닥쳤을 때 준비하려고 하면 늦는 법일세. 지금부터 미리 생각을 해둬야 혼란을 최소로 할 수 있지 않겠나."

  "예,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아울레테스가 빈 술잔을 스스로 채우려고 하자 마르쿠스가 얼른 병을 들어 술을 따라주었다.

  "너무 많이 드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이 잔을 마지막으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켜도 끄떡없었는데 나이라는 게 참으로 사람을 서럽게 만드는군."

  아울레테스는 서글픈 눈빛으로 반쯤 채워진 술잔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었으나, 아무래도 화제가 화제인지라 쉽사리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아울레테스는 애꿎은 포도주잔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기를 어언 삼십 분.

  마르쿠스는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잠잠히 아울레테스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마르쿠스와 눈을 마주친 파라오의 입이 무거운 한 마디를 발했다.

  "···내가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는 누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 132. 파라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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