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새로운 질서 >
120.
"나보고 로마인이 되라고?"
수레나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총기 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커다란 흔들림을 보였다.
"그래. 이대로 죽어서 사라지기엔 아까운 능력이다."
"···나를 언제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거다."
마르쿠스의 담담한 대답에 수레나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과분한 칭찬이로군. 그래 봐야 당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패장에 지나지 않는데."
"그건 서로가 서 있는 위치가 달랐기 때문이지. 네가 섬기는 왕이 너의 가치를 똑바로 봤다면 아마 훨씬 더 고전했을 거다."
"고전이라···결국 이기긴 했을 거라는 말이로군."
수레나스가 살짝 눈가를 찡그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직 호승심이 남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서였다.
만약 수레나스가 무타레스와 카렌 대신 지휘를 맡았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그랬을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파르티아인이다. 아르사케스 왕조를 떠받치는 귀족으로 태어났고 그렇게 살기로 맹세했다. 이제 와서 삶의 자세를 바꾸고 싶지 않다."
"그 말은 거절하겠다는 말인가···이해가 가지 않는군. 네가 충성을 바쳤던 샤한샤는 널 배신하지 않았나? 저자의 꼴을 봐라. 너 정도의 인재가 어째서 저런 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거냐."
통역관의 말을 들은 오로데스가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수레나스가 어리석은 군주라고 힐난했다면 이 정도로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레나스는 자신이 충성을 바친 왕의 꼴사나운 모습을 결코 비웃지 않았다.
그가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습고도 우스운 말이다. 오로데스를 샤한샤로 인정하고 충성을 바치기로 한 건 내가 한 선택이다. 수레나스 가문의 수장으로서 스스로 정한 신념을 관철했을 뿐,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네가 섬기던 샤한샤는 이제 더 이상 왕이 아니다. 그렇다면 섬기는 주인을 바꿀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수레나스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황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기다리던 마르쿠스가 답답하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에 있으면 넌 오로데스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다. 잘못하면 네 가문마저도 풍비박산 날 수 있어.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다고 해도 최후까지 함께 어울려줄 의리는 없지 않나."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마르쿠스는 눈앞의 이 남자가 탐이 났다.
동시에 이런 인재를 중용하지 못한 오로데스의 한심한 그릇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시 눈을 뜬 수레나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오로데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파르티아를 호령하던 샤한샤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이었다.
수레나스가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살짝 떨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한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
"그래? 가능한 거라면 뭐든지 들어줄 테니 한번 말해보도록."
"로마는 제아무리 적군의 패장이라고 할지라도 목숨까지는 빼앗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관습에 따라 오로데스의 목숨을 살려다오. 그렇다면 나도 당신의 밑에 들어가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그건 또 무슨······."
예상외의 조건에 마르쿠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완전히 체념하고 있던 오로데스는 혹시라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간절한 눈빛이 마르쿠스의 서늘한 눈빛과 부딪쳤다.
오로데스의 비굴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사나트루케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몇 번이고 마르쿠스에게 오로데스의 목을 베겠다고 말했었다.
물론 마르쿠스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굳이 오로데스 따위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마르쿠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다시 수레나스에게 향했다.
그가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어조로 물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 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탐이 난다고 하지 않았나. 나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허락할 것이고, 아니라면 거절하겠지."
수레나스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심 마르쿠스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오로데스를 살려준다면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면 모를까, 고려해보겠다는 정도로는 균형이 맞을 리가 없다.
즉, 처음부터 거절하기 위한 구실을 내건 것이다.
"···대충 속내가 보이긴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까."
"충성을 바친 왕을 지키지도 못한 사람이 그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를 섬길 수 있을까.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그런 자라면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
수레나스는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이걸로 오로데스를 향한 최후의 의리는 다했다.
다가올 죽음도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그가 몸을 돌려 사나트루케스를 바라보았다.
"샤한샤이시여, 아무래도 오로데스는 당분간 로마에서 구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저놈의 목을 치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로마로 데려가겠다니요!"
예상대로 잔뜩 분개한 사나트루케스가 분노에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로마에서는 전쟁에 승리한 장수를 위해 개선식이라는 행사를 엽니다. 이는 로마인으로 태어난 자에게는 생에 다시없을 크나큰 영광의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개선식에는 적군의 수장을 세우는 게 로마의 전통입니다. 로마의 위광을 드높이고 개선장군의 명예를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니 일단 오로데스는 개선식이 열릴 때까지는 반드시 숨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
"하,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울레테스가 베레니케를 처형하려 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다.
그때도 마르쿠스는 아울레테스를 만류했다.
베레니케를 이용해 달성하려는 목적이 있어서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사나트루케스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권력의 정점에 서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던 이가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겁니다. 광대만도 못한 신세가 되어 조롱받고 멸시당하는 굴욕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십시오. 당장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벌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확실히···그건 그렇겠군요. 그러면 개선식이 끝난 뒤에는 이쪽으로 포로를 송환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게 되도록 원로원에 요청을 넣어보겠습니다."
사나트루케스는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그는 여기서 반대해봐야 오로데스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괜히 마르쿠스와 대립각을 세워봐야 자신의 권위만 깎아 먹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 모든 과정을 확인한 오로데스의 얼굴에는 환희가, 수레나스의 눈에는 경악의 감정이 서렸다.
"제정신인가? 이 조건을 진짜로 받아들이겠다고?"
마르쿠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네 입으로 직접 네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면 받아들일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내가 고려만 해본다고 하고 거절할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건가? 내가 어떤 핑계를 대며 거절하더라도 조건을 어기는 게 아닐 텐데?"
"네가 그런 치졸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뒤에 내 그릇이 네가 따를만한 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면 그때는 거절해도 돼."
"대단한 자신감이군. 당신의 그릇이 나를 품기에 충분하다는 확신이 있는 것인가."
"적어도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이제부터 내 옆에서 마르쿠스 크라수스라는 인물이 어떤 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해."
자신감과 확신으로 충만한 얼굴이다.
수레나스의 눈에 일말의 당혹감이 어렸다.
오로데스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니, 지금까지 파르티아에서 본 그 어떤 자와도 달랐다.
수레나스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눈앞의 로마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완패가 무엇인지 뼛속까지 실감케 해준 남자.
마르쿠스의 존재가 수레나스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
오로데스의 최측근들에 대한 처우는 전부 결정됐다.
수레나스는 가문의 수장 자리를 박탈당하고 마르쿠스의 포로로서 끌려가게 됐다.
무타레스는 오로데스와 같이 로마로 압송되는 처지가 됐다.
"저는 이번 전쟁의 공신이 아닙니까! 그런데 포로라니요?"
"그래 큰 공을 세웠지.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무조건 처형당할 걸 포로로서 정중히 대우해주기로 했다. 감사하도록."
"억울합니다! 저는 로마의 영광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을 바쳤는데···시민권이라도 약속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억울한 건 네 지휘를 받아 사막에 뼈를 묻은 기병들이겠지. 이미 네가 저지른 만행이 알려진 이상 여기에 남으면 넌 절대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다. 포로로서 끌려가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헛소리를 늘어놓던 무타레스는 마르쿠스의 서릿발 같은 일침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입을 놀렸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까닭이다.
마르쿠스는 포로 문제를 일단락지은 다음, 가장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실로 향했다.
"오오, 왔느냐?"
한발 먼저 도착해 있던 크라수스가 반갑게 마르쿠스를 맞이했다.
아직 약속 시각이 되지 않았기에 사나트루케스와 그의 시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테시폰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시죠?"
"아주 훌륭한 도시야. 파르티아가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는 게 그저 허황된 소리만은 아니었다는 게 실감 나더구나."
크테시폰은 훗날 쇠락하여 바그다드에 역할을 넘겨주게 되지만, 그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지금 시대에서는 아직 발전 도중이라 전성기만큼의 규모를 자랑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도시가 얼마나 커 나갈지 그 잠재력만큼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크라수스는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왕궁의 전경을 뿌듯한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전쟁에서 적을 격파하고 수도까지 점령해 승리자로서 군림한다.
꿈에서나 그리던 광경이 현실이 됐다.
인생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었던 마지막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크라수스는 이번 전쟁에서 모든 걸 마르쿠스에게 맡겼다.
거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그걸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군재가 부족함을 알고 권한을 휘두르지 않는 인내력을 칭찬받았다.
오로데스라는 최악의 사례와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로 돌아가면 곧바로 개선식을 거행해야겠다. 파르티아를 무릎 꿇렸으니 당연히 자격은 충분하겠지?"
"예. 누구도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겁니다. 원로원은 우리 가문을 띄워 주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찬성하겠죠. 하지만 단순히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만으로는 카이사르 님이나 폼페이우스 님에 비견되는 업적을 남길 수는 없을 겁니다. 그에 상응하는 전리품을 가져와야지요."
"하긴···시민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업적에 더 열광할 테니까. 그래서 이 지도를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이냐?"
크라수스가 손에 든 두루마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마르쿠스가 여유롭게 탁자 위에 놓인 과일을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예, 아버지의 말씀대로입니다. 지금부터 받아낼 겁니다. 로마 역사에 길이 남게 될 어마어마한 전리품을요."
크라수스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시종을 대동하고 회의실로 들어온 사나트루케스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먼저 와계셨군요. 사실 훨씬 더 호화로운 장소를 준비해야 했는데 제 대접이 소홀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샤한샤께서도 할 일이 많으실 테니 바로 문서에 서명하고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감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식량 제공에 대한 조약도 맺을 수 있을까요? 메소포타미아를 넘기면 이쪽은 자연히 로마에 식량 공급을 의존해야 하니까요."
사나트루케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자약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르쿠스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역시 이놈, 처음부터 다 계산된 거였군.'
메소포타미아를 로마가 가져가 봐야 그 넓은 평야 지대를 지키기에는 상주병력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파르티아처럼 농경민들을 방치하면 모를까 로마는 사회 구조적으로 그런 전략을 취할 수 없었다.
사나트루케스의 의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언젠가는 되찾을 땅으로 잔뜩 생색을 부리며 왕권을 되찾고, 부족한 식량은 로마에 헐값으로 지원받으려는 계획이다.
상대방이 어수룩한 인물이었다면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좋지 않았다.
'타인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언제든 역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했어야지.'
마르쿠스는 사나트루케스가 가져온 지도에 손가락으로 쭉 선을 그었다.
"식량이야 당연히 지원해 드려야지요. 이만큼의 영토를 상실하면 당연히 식량부족 사태가 생길 테니까요."
"아니, 잠깐. 이게 무슨······."
사나트루케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마르쿠스가 손으로 그은 로마와 파르티아의 경계가 사나트루케스가 생각하던 영역을 아득하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사나트루케스는 당연히 티그리스강을 로마와 파르티아의 임시 국경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처음부터 그럴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티그리스강을 훌쩍 넘어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구분하는 자그로스산맥에 경계를 그어버렸다.
자그로스산맥은 현대 지형으로 보면 터키 동남부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쭉 뻗은 험준한 산맥이다.
총 길이만 1500km에 달하는 이 산맥을 자연경계로 삼는다면 동쪽을 방어하는 게 얼마나 쉬워질지는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다.
물론 사나트루케스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전에 맺은 약속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예? 사전에 맺은 약속과 다르다니요. 분명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넘겨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면 당연히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사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까."
"뭐···그렇게 한정 짓는 사람도 있지만 로마에서는 메소포타미아라면 그 인근의 유역을 전부 포함해서 생각합니다."
마르쿠스가 눈짓을 보내자 크라수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져온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쭉 펼쳤다.
마르쿠스가 사전에 준비한 지도였다. 썩 정확도가 높은 지도는 아니었으나, 거기에는 분명 자그로스산맥으로 추정되는 선의 앞 지역까지 메소포타미아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로마인이라면 당연히 이 일대의 지역을 전부 메소포타미아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보통의 인식이 그렇다는 겁니다."
크라수스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트루케스는 답답해 미칠 것 같았으나 거짓말이라는 확증이 없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그가 로마로 달려가서 확인해 볼 수도 없는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래도 양국 간 인식의 차이가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 같군요."
사나트루케스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려를 해보십시오. 마르쿠스 님이 그은 영역대로라면 티그리스강 동쪽의 크테시폰마저 로마의 세력권에 들어갑니다.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파르티아는 유목 민족이라 로마만큼 수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고려를 해보자는 말을 하셨는데 그건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레타스강 사이라면 분명 비옥한 진형이기는 하죠. 하지만 그 정도 땅을 얻자고 소중한 로마 시민의 피를 이렇게나 많이 흐르게 하면서까지 대국 파르티아와 전쟁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마르쿠스는 교묘하게 지키기 어려운 땅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나트루케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중한 로마 시민의 피? 이번에 죽은 자가 백 단위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무슨······'
사나트루케스는 감정을 추스르며 맹렬히 두뇌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자그로스산맥까지 준다면 메소포타미아 땅을 되찾을 수 있는 확률은 극단적으로 떨어진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르쿠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아, 물론 파르티아에서 이토록 커다란 출혈을 감수하는 만큼 저희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식량 제공은 물론이고 메소포타미아를 대신할 땅을 차지하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를 대신할 땅이라면?"
"당연히 이곳 외엔 없지 않겠습니까."
마르쿠스가 손가락을 들어 지도 위의 한 지역을 내리찍었다.
그의 손가락 아래로 인더스라는 글자가 살짝 뭉개진 채 보였다.
"그, 그 지역은······."
"인더스강이라고 하던가요? 이쪽 역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운 지방이라고 하더군요.
여기를 손에 넣는다면 파르티아도 메소포타미아 유역을 잃은 손해를 단번에 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인더스 근방에는 여러 나라와 부족들이 난립해 있다고 하던데 걱정 마십시오. 파르티아와 로마가 동맹을 맺었는데 감히 누가 대항을 할 수 있겠습니까.
"
"하지만 인더스 유역은······."
분명히 인더스 유역은 과거에는 상당히 비옥한 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기후가 건조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생산력을 자랑했다.
인더스강 일대를 차지한다면 농업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나트루케스가 망설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파르티아와 인더스 사이에는 거대한 산악 지형이 가로막고 있다.
즉, 점령한다고 쳐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빼앗기고 국력이 약화될 파르티아로서는 유지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땅이었다.
사나트루케스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키지도 못할 쓸모없는 땅을 어디에 쓰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사나트루케스는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로마에게 메소포타미아 유역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반박한다면 결국 자승자박이 될 뿐이다.
자신이 판 계획에 자신이 잡아먹힌 꼴이었다.
군사력이 부족한 부분도 로마가 채워주겠다고 했으니 점령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마르쿠스는 여기에 한 가지 노림수가 더 있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이 끝난다면 10개 이상의 군단을 계속해서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다.
하지만 파르티아를 지원해 동쪽을 점령해야 한다는 핑계가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마르쿠스는 이 이유를 들어 임페리움을 5년쯤 더 연장할 계획이었다.
외통수에 몰린 사나트루케스가 슬쩍 고개를 들자 마르쿠스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눈빛을 본 순간 차오르는 분노를 덮어버릴 만큼의 소름이 끼쳤다.
'이자는 설마···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 계획하고 있었던 건가? 내 제안을 역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사나트루케스는 처음 만났을 때의 마르쿠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말을 다 믿어주던 모습은 지금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자신이 터무니없는 사람을 이용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여기서 협상을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마르쿠스가 그럴 때를 대비한 계획을 세워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잘못되면 파르티아가 정말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르쿠스 님께서는···이 협상이 가결되면 한동안은 크테시폰에 머무실 생각입니까?"
"점령지를 편성해야 하니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군데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감히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있어서요.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요."
"서, 설마 아르메니아를······."
"예. 로마의 보호국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자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사나트루케스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었다.
로마가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북쪽의 국경을 카프카스 산맥까지 확장하면 메소포타미아의 방어선은 사각지대가 없어진다.
사나트루케스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질끈 눈을 감았다.
'늑대를 몰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였구나. 그것도 인근의 모든 걸 먹어 치워버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흉포한 호랑이를.'
사나트루케스는 떨리는 손으로 마르쿠스의 제안에 동의하겠다는 서명을 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자리를 떠나는 마르쿠스의 뒷모습을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로마, 아니, 마르쿠스의 힘이 어느 정도로 강해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총명한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동방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음을.
< 120. 새로운 질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