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승리의 일등공신 >
119.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가 카렌의 중장기병들을 성공적으로 몰아붙인 것처럼, 로마군의 본대 역시 수월하게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사실 안토니우스가 성공적으로 중장기병을 유인해 사라졌을 때 마르쿠스는 약간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원래부터 유인책을 쓰려고는 했지만, 한 번에 완벽히 성공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이중삼중의 계책을 마련해 놓았는데 일 단계만으로 끝나버리니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지금 상황만 놓고 봐도 그렇다.
무타레스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궁기병들을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며 파상공세를 계속했다.
당연히 파르티아 궁기병의 피해만 일방적으로 누적되고 있었다.
옆에 있던 군단장이 다가와 말했다.
"이번에도 대성공입니다! 이 전장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임페라토르께서 지배하고 계시는군요."
"···하하, 그래, 뭐. 예상했던 바일세."
마르쿠스는 얼떨떨한 웃음을 흘리며 내심 혀를 찼다.
저 강력한 파르티아의 기마병들이 지휘관 한 명 바뀌었다고 이렇게까지 손쉬운 먹이가 될 줄이야.
그토록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왔는데 제대로 된 계책을 풀어놓기도 전에 이미 전장의 추가 기울어버렸다.
원 역사에서 자신의 아버지 크라수스를 처참히 대패시켰던 수레나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어 왠지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궁기병의 지휘를 맡은 인간의 낯짝은 꼭 한번 보고 싶군.'
무능한 지휘관의 말도 안 되는 지휘로 무너져가는 파르티아의 기병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동정심이 일었다.
그렇다고 봐줄 마음은 없었지만 항복을 하는 자들만큼은 포로로 받아주기로 했다.
한편, 마르쿠스가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상대로 지목한 무타레스는 속으로 무능한 병사들을 욕하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이쪽만 죽어 나가고 있다는 말인가.
적의 좌측을 타격해 보기도 하고, 우측에 화살을 쏘아보기도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대신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애꿎은 파르티아 기병들만 죽어 나갈 뿐이었다.
이미 초반에 화살 세례에 1천의 기병들을 잃은 그는 이번에도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
1만 3천의 궁기병 중 2천이 그냥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린 셈이다.
'파르티아의 기병 전력이 최강이라고? 저깟 보병들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 무슨.'
무타레스는 끝까지 자신의 지휘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애꿎은 병사들만을 탓한 그는 카렌의 중장기병이 도착하면 함께 적을 몰아치기로 방법을 선회했다.
우선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자신이 이끄는 부대는 카렌이 돌아올 것으로 예상되는 우측에 배치했다.
좌측의 궁기병들은 반대 방향에서 로마군의 주의를 끌며 교란책을 펼칠 예정이었다.
"젠장, 카렌 장군은 뭘하고 있는데 이렇게 늦는 거야. 고작 로마 놈들의 궁기병을 처리하러 갔으면서······."
이리저리 불평을 늘어놓던 그의 눈에 마침내 사막 저편에서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기병대들이 보였다.
"오오, 드디어 도착했군. 좋아, 그러면 이제 카렌 장군과 합류해 로마군을 협공하면 되겠어."
회심의 미소를 지은 무타레스가 막 명령을 내리려고 했을 때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병대의 모습을 관찰하던 그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카렌이 이끄는 중장기병이라고 보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서, 설마 로마군···그러면 카렌 장군이 당했다는 말인가?"
먼지구름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아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무타레스가 허둥지둥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고, 로마군의 본대도 슬금슬금 앞으로 나오는 형국이었다.
좌측의 궁기병들이야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측의 기병들은 몸을 빼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전공을 세울 마음에 섣불리 우측으로 온 게 통한의 실수였다.
무타레스는 어느새 전쟁에서 이길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무사히 살아나갈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이건 절대로 내 탓이 아니다!'
무능한 카렌의 중장기병이 먼저 패배했기 때문에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무타레스의 입에서는 퇴각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여기서 물러나 봐야 모두 죽는다! 용감한 파르티아의 기병들이여, 명예롭게 항전하라. 아직 전투는 끝난 게 아니다! 내가 좌익의 병사들을 우회시켜 적 기병의 뒤를 치겠다. 그러면 충분히 적의 기병을 무력화시키고 퇴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무타레스는 그럴듯한 핑계를 둘러댄 뒤 소수의 호위병만을 대동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우측에 남은 궁기병들은 무타레스의 말을 최후의 동아줄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화살을 쏘며 응전했다.
그러나 그들이 속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좌측의 궁기병들과 합류한 무타레스가 유유히 전장을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휘관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미끼로 이용된 것이다.
임시 지휘를 맡은 귀족이 멀어지는 무타레스의 등 뒤를 향해 고래고래 악을 썼다.
"무타레스, 이 개애새끼야아아아!"
전장에 있는 파르티아군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는 한 마디였다.
마르쿠스는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움직임을 보이며 도주하는 파르티아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본래 기병은 보병과 다르게 전황이 불리하면 재빠르게 퇴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마르쿠스도 최대한 적의 기병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다양한 함정을 준비해 두었다.
적 기병의 4분의 1에서 3분의 1까지는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무타레스는 자신이 살기 위해 무려 절반의 아군을 미끼로 던지고 도주해 버린 것이다.
마르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파르티아어를 아는 병사들을 동원해 큰 소리로 항복을 권고했다.
"너희들의 지휘관은 모두 달아났다! 항복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 모두 항복하고 무기를 버려라!"
파르티아 병사들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무타레스에게 힘껏 욕을 했던 귀족이 가장 먼저 무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항복, 항복한다! 나는 오로데스가 아닌 사나트루케스 님을 지지할 테니 기존의 지위와 영지를 보장해다오!"
적에게 항복하는 게 아니라 다른 왕족의 밑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니 심리적인 저항선도 많이 낮아졌다.
다른 파르티아의 기병들도 더는 눈치 보지 않고 항복의 의사를 표명했다.
마르쿠스는 투항한 자들을 모두 받아주고 승리를 거둔 병사들을 치하했다.
"잘해주었다. 자랑스러운 로마의 군단이여. 동방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파르티아마저 나와 그대들의 적수는 아니었다. 이제 진격해 적들의 수도를 점령하자! 승리는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다."
"우오오오!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만세!"
"위대한 마르쿠스의 현신! 동방의 지배자!"
병사들이 무기를 번쩍 치켜들며 발을 쿵쿵 굴렀다.
1만 7천의 기병 중 단 5천만 무사히 돌아간 파르티아와 달리 로마군의 피해는 아예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 이 정도까지 압도적인 전과는 예상을 못 했으나 적의 무능함이 이런 대승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르쿠스는 얼마 되지 않는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병들이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어차피 이제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더 이상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여유롭게 진격을 재개한 로마군은 크테시폰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귀족들의 영지를 하나하나 복속시켰다.
이미 상당수의 귀족이 사나트루케스에게 붙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방의 영주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않고 항복했다.
오로데스의 군대가 회전에서 대패했다는 소문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는 로마에 항복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나트루케스 님을 정당한 샤한샤로 인정했을 뿐이다."
오로데스의 지지도는 이미 처참한 상태였기에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로마군은 갈수록 세를 불려가며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여유로운 마르쿠스와 달리 오로데스는 숨이 턱턱 막혔다.
무타레스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자신의 패배 원인을 전부 카렌의 탓으로 돌렸다.
그의 중장기병이 얼마나 허무하게 유인책에 걸렸는지, 얼마나 어처구니없게 전멸을 당했는지 온갖 과장을 섞어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오로데스는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제 와서 패배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로마군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었다.
"일단 수도를 비우셔야 합니다. 지방의 거점으로 후퇴해 재기를 도모하시죠."
무타레스의 권유에 오로데스는 그 수밖에 없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파르티아는 농경민족이 아니다.
수도를 내준다고 완전히 끝장나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저항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좋아. 네 말이 옳다. 우선 수레나스의 영지가 있는 사카스탄으로 가자. 수레나스가 없으니 영지를 손에 넣는 것도 쉬울 거다. 그곳을 거점으로 저항군을 편성하고 지방의 귀족들이 일제히 봉기를 하면 로마놈들도 어쩌진 못할 거야."
"영명하신 판단이옵니다. 저는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지혜로운 샤한샤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무타레스가 넙죽 고개를 숙이며 충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미흐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로데스와 무타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력을 유지 중인 얼마 되지 않은 대귀족 중의 한 명인 그는 냉정하게 현 상황을 분석했다.
수도를 비우고 항전을 계속한다?
그가 볼 때는 전혀 가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사건은 그다음 날 곧바로 터졌다.
※※※※
"무슨 일이냐?"
한창 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오로데스는 별안간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짜증스레 외쳤다.
그의 호위병 중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샤한샤이시여, 속히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반란입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뭐라? 반란?"
경악한 오로데스가 벌떡 일어나 무릎 꿇은 호위의 어깨를 양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반란군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말이냐? 미흐란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반란을 일으킨 수괴가 미흐란이옵니다. 그자에게 동조한 귀족들이 모두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귀족들이 미흐란에게 가담했다고?"
오로데스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도주할 기력마저 상실한 그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흘렸다.
"무타레스는 어디 있느냐?"
"반란이 일어난 걸 알자마자 도망치려다가 붙들렸다고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샤한샤꼐서도 빨리 피신을······."
호위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중무장한 병사들을 거느린 미흐란이 도착했다.
피에 젖은 그들의 무기를 바라보는 오로데스의 두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미흐란, 이 개자식. 네놈을 그토록 믿었거늘 이제 와서 배반을 한다는 말이냐. 로마놈들이 침입한 이때에 왕좌를 가져본들 어떤 의미가 있다고!"
"뭔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미흐란이 고개를 저으며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 샤한샤의 자리에는 먼지 한 톨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이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군사를 일으킨 것뿐입니다."
"반란을 일으키는 게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반란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지닌 이에게 자리를 양도하는 거라 받아들여 주시길. 샤한샤께서 수도를 비우시고 도주하면 이 전쟁은 의미 없이 길어지기만 할뿐, 어떤 유의미한 결과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네놈은 사나트루케스에게 붙을 작정이란 말이렷다?"
미흐란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게 외적들과 싸우는 거라면 지방 거점으로 옮겨 다니며 저항하는 게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사나트루케스가 수도를 차지하고 샤한사임을 천명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수많은 지방 귀족들이 그의 편에 붙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발버둥 쳐봐야 의미는 없습니다.
의미 없이 국력만 소진하고 피만 더 흐를 뿐입니다. 샤한샤답게 명예로이 패배를 받아들이십시오.
"
"미트리다테스를 처형한 건 네놈이 아니더냐. 사나트루케스가 널 용서해줄 거라고 보느냐?"
"저는 집행인을 명받았을 뿐, 실제로 메디아의 왕을 참한 건 샤한샤와 수레나스이지요.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로데스는 꽉 쥐고 있던 호신용 무기를 놓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허, 허허허···이렇게 끝난다고? 나 오로데스가? 이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허망하게······."
"받아들이십시오. 파르티아에는 새로운 샤한샤가 필요합니다."
미흐란은 거의 이성을 상실한 오로데스를 매정하게 일별했다.
오로데스는 부하들에게 끌려나가 황궁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얄궂게도 그가 수감된 방은 수레나스가 갇혀있는 곳의 바로 옆방이었다.
수레나스는 오로데스의 처지를 비웃지도, 자신을 믿지 않은 것에 분노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고는 안타까운 한숨을 짤막하게 흘렸을 뿐이다.
오로데스를 끝까지 따르는 이들을 모두 사로잡은 미흐란은 마르쿠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성문을 열고 사나트루케스를 샤한샤로 인정할 테니 자신들의 자리를 인정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마르쿠스는 흔쾌히 이에 동의했다.
형식적으로나마 사나트루케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나트루케스는 오로데스만 처형할 수 있다면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협약이 체결되자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로마군단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크테시폰에 입성했다.
마르쿠스와 크라수스는 동방 최고의 대도시 중 하나인 크테시폰의 거리를 당당하게 가로질렀다.
이미 사나트루케스를 인정하기로 한 귀족들은 공손하게 로마군단을 맞이했다.
귀족들의 대표로 나온 미흐란이 직접 황궁의 성문 앞까지 나와 인사를 올렸다.
"진정한 샤한샤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파르티아의 모든 귀족들은 사나트루케스 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바입니다."
마르쿠스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사나트루케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의 충성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이전에 내 가문과 대립한 많은 귀족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내가 책임을 물을 사람은 오직 오로데스와 그의 군대를 이끌었던 수레나스 단 두 사람뿐일세. 다른 귀족들에게는 절대로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모두 안심하라고 전해주게."
미트리다테스의 처형 건으로 일말의 불안감을 품고 있던 미흐란의 입가가 진한 호선을 그렸다.
사나트루케스의 선언은 사실상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었다.
간신히 한숨 돌린 미흐란은 마르쿠스와 사나트루케스를 황궁 내부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파르티아 수복의 대미를 장식할 세 명의 포로가 끌려나와 있었다.
오로데스와 수레나스, 그리고 무타레스가 강제로 무릎을 꿇은 채 처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르쿠스의 뒤를 따라 들어온 귀족 중 한 명이 무타레스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전에 벌어진 회전에서 가장 먼저 항복을 했던 그 귀족이었다.
"오로데스나 수레나스는 그렇다 치고 저 빌어먹을 개자식은 왜 저런 곳에 있는 겁니까? 혹시 공치사라도 받으려고 나와 있는 겁니까?"
통렬한 비아냥에 파르티아어를 아는 소수의 로마 장교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주변에 늘어서 있던 파르티아 귀족들의 얼굴은 살얼음처럼 굳어졌다.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던 무타레스가 돌연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위대한 샤한샤, 사나트루케스 님 만세!"
워낙 뜬금없이 일어난 일이라 병사들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오로데스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그가 갑자기 사나트루케스를 찬양하고 나서자 모두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특히 오로데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무타레스는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감동이 벅차오른다는 듯 격정적인 어조로 말을 쏟아냈다.
"사나트루케스 님!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사나트루케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무타레스는 땅바닥에 이마를 찍을 기세로 머리를 조아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드디어! 파르티아의 왕권이 정당한 후계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물밑에서 사나트루케스 님의 복권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힘써왔습니다."
통역관에게 말을 전달받은 마르쿠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황궁의 바닥을 가로질렀다.
무타레스가 고개를 들었다.
마르쿠스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회전에서 궁기병을 지휘한 장수가 맞느냐?"
무타레스는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물론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없었다면 로마군이 어찌 그런 대승을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저야말로 이번 전쟁 최고의 공신입니다! 위대한 로마의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만세! 로마 인빅타!"
마르쿠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이가 없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마르쿠스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떡 벌렸다.
오로데스는 눈이 뒤집혀 무타레스에게 달려들려다가 병사들에게 제지당했다.
사나트루케스와 크라수스는 그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무타레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누구도 무타레스의 말에 반박은 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서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마르쿠스는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몸을 돌려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수레나스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뭔가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내 부족함으로 섬기는 주군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고 전쟁에서도 패했다. 어떤 할 말이 있겠는가."
수레나스는 당당했다.
무타레스처럼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원래 그를 죽이려고 했었다.
회전을 벌이도록 유도했던 미끼를 물지 않고 냉정하게 장기전을 벌여 협상을 하려고 했던 판단.
한정된 정보만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전략을 수립했던 사령관이다.
살려두기에는 너무 능력이 뛰어났고, 이용하기에도 좋은 인물은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직접 얼굴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멍청하게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군주를 탓하지도 않았으며, 진심으로 패전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지휘능력도 탁월하고 충성심도 강한 인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홍수처럼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탐이 난다.
이 탁월한 전략가를 손에 넣어 자신의 휘하에서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고 싶었다.
마르쿠스가 살짝 몸을 낮추고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수레나스, 로마로 귀화해라. 그리고 내 아래로 들어와라."
< 119. 승리의 일등공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