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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로마로의 귀환 (109/326)

  < 108. 로마로의 귀환 >

  108.

  로마로 가겠다는 클레오파트라의 폭탄선언에 실내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마르쿠스도 설마 클레오파트라가 로마까지 따라오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만약 따라오겠다고 한다면 그건 아르시노에라고 예상했다.

  마르쿠스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재차 확인했다.

  "로마로 오시겠다는 건···유학을 의미하시는 겁니까?"

  "예. 안 그래도 로마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흐음···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로마는 세계 최강의 대국이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꼭 유학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로마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어요."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준비하고 있던 답을 술술 늘어놓았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그녀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역사상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만난 뒤 처음으로 로마에 방문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는 즉각 다시 이집트로 돌아갔다.

  클레오파트라가 정말로 로마에 한 번쯤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파라오로 즉위하기 전에 한 번쯤은 방문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역사에서 안토니우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대외적으로 공표해 로마인들의 공분을 산 전적도 있었다.

  이것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정말로 로마 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면 조금 더 현명한 방법을 취했을 터.

  마르쿠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역사와는 다른 마음을 품게 된 경위가 궁금했다.

  '내 개입이 그녀의 심경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 건 확실한데···딱히 이거다 싶은 건 아직 모르겠는걸.'

  클레오파트라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면 자연스레 여러 가지 노림수를 예상해볼 수 있었다.

  로마의 유력자들과 미리 안면을 트는 건 당연할 것이고, 원로원에 자신의 후원자들을 만들어 둘 수도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재산은 상당했다.

  막대한 빚에 허덕이는 귀족들이라면 상당수를 쉽게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면 훗날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유학 오겠다는 타국의 왕녀를 마땅한 이유 없이 내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만약 로마로 온다면 어느 정도 기간을 예상하고 계십니까?"

  "적어도 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때까지는 있고 싶어요."

  "최소한 수년 이상이 걸릴 텐데 꽤 길게 보고 계시는군요."

  "예. 언어만이 아니라 로마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할 테니까요."

  이상하게도 클레오파트라는 아까부터 은근슬쩍 마르쿠스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은 어떤 목적이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설픈 티가 너무 많이 났다.

  사춘기 소녀의 감성은 마르쿠스가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복잡 미묘했다.

  "음, 그게 전부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그리 대단치 않은 이유 정도는 몇 개 더 있어요. 베레니케 언니가 혼자 로마에 가면 로마 귀족분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누군가는 제대로 된 왕족의 품격을 보여야지요."

  말이 되지 않는 듯하면서도 베레니케를 떠올리면 은근히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었다.

  로마 귀족들에게 무시 받는 굴욕을 참아 넘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베레니케 외에도 한 명쯤 제대로 된 왕족을 보내는 선택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클레오파트라가 굳이 자원할만한 이유는 되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좀 더 클레오파트라의 속내를 떠보려 했을 때다.

  충격에서 벗어난 아르시노에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언니가 로마에 왜 가?"

  "못 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니?"

  "아니···솔직히 이상하잖아. 언니가 무슨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고 그래. 기록이나 조금 뒤적이는 정도였지 직접 가보고 싶다는 소리도 한 적도 없으면서."

  "너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그럴 마음은 예전부터 있었어."

  "어쨌든 절대 안 돼!"

  아르시노에가 필요 이상으로 과민반응을 보이자 클레오파트라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반문했다.

  "거참 이상한 반응을 보이네? 너야말로 이렇게까지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왜냐하면 로마에 갈 사람은 언니가 아니라 나니까! 내가 갈 거야."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로마에 유학을 가겠다고? 관광을 잘못 말한 게 아니라?"

  "흥, 난 진지하게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아르시노에는 그 자리에서 라틴어로 '나는 로마로 가고 싶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그녀가 라틴어를 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마르쿠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틴어를 배우셨습니까?"

  "너, 언제부터······?"

  두 사람의 반응에 기세가 오른 아르시노에가 허리를 곧게 펴며 웃었다.

  "언젠가 마르쿠스님과 라틴어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몰래 배우고 있었어. 자, 이것만 봐도 내가 언니보다 더 로마로 갈 자격이 있다는 걸 인정하겠지?"

  "흥, 그래 봐야 문장 한 줄 간신히 적은 수준이잖아. 내 언어 습득력을 고려해보면 내가 몇 주만 라틴어를 배워도 네 실력은 금방 넘을 수 있어. 그러니까 효율성에 입각해서 로마에는 내가 가야 해."

  "그렇게 똑똑하면 여기서 독학을 하면 되잖아? 이 전갈아!"

  "뭐라고? 이 못생긴 두꺼비 같은 게!"

  마르쿠스는 팔짱을 낀 채 현대의 초등학생만도 못한 말싸움을 벌이는 자매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행히 몸을 써서 치고받지는 않았지만, 내버려 두면 그것도 시간 낭비 문제로 보였다.

  마르쿠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공주님들, 이게 그렇게 다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원하신다면 두 분 다 오십시오. 크라수스 가문은 기꺼이 두 분을 귀빈으로 환영하겠습니다."

  "두 명 다요?"

  "그래도 되나요?"

  "그건 저보다는 파라오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일단 두 분께서 오신다고 하면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사실 마르쿠스는 이미 두 사람을 모두 데려가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클레오파트라의 결심이 확고한 이상 그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로마에 올 거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르시노에도 함께 끌어들여서 클레오파트라의 옆에 붙여두는 게 나았다.

  아르시노에는 무조건적으로 마르쿠스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옆에 둔다면 클레오파트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도 행동에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결정권자인 아울레테스 입장에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딸 셋이 전부 로마로 간다는 게 조금 어이가 없긴 하겠지만, 이건 크라수스 가문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친분을 다질 좋은 기회였다.

  앞으로 로마에 의존하는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아울레테스에게는 마르쿠스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르시노에는 일단 중재를 받아들이긴 했어도 클레오파트라를 흘겨보며 볼을 부풀렸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아르시노에를 곱지 않은 눈초리로 쏘아봤다.

  사실 둘이 함께 로마로 가는 건 그들이 원하는 해결방안은 아니었다.

  아르시노에는 클레오파트라를 마르쿠스의 옆에서 떨어트려 놓고 싶었고, 클레오파트라 역시 절반 정도는 동생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마르쿠스가 함께 가자고 했으니 여기서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마르쿠스는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를 시킬 겸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실로 웅장하던데 저는 내부를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습니다. 저번에 왔을 때는 대충 한 번 훑기만 했거든요. 혹시 안내를 부탁할 수 있을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공주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두 분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또다시 말다툼하기 전에 마르쿠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잠시 서로를 노려본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다음날 마르쿠스는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의 안내를 받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구경했다.

  이전과는 달리 내부를 자세히 구경한 마르쿠스는 도서관의 규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시대의 알렉산드리아 박물관과 도서관은 명실공히 전 세계 학문의 요람이라 할 만했다.

  시설을 안내해주는 클레오파트라의 목소리에서도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현재 박물관에서 연구 중인 학자들만 해도 100명이 훌쩍 넘어요. 이들 대부분은 제1 도서관인 부루치움에서 주로 강의를 하고 연구 자료를 찾아요. 지금 보시는 이 제1 도서관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지식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라 할 수 있죠."

  "이름만 도서관이지 사실상 거대한 학술기관이나 마찬가지로군요."

  제1 도서관은 마르쿠스의 기억 속에 있는 현대의 대학 캠퍼스를 떠올리게 하는 구조였다.

  이집트 왕가에게 봉급을 받는 교수들이 정기적으로 강의를 열었고, 도서관 내부에는 정원과 회의실, 심지어 공용식당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도서관이 매우 익숙한 듯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흥미로운 사실들을 설명해주었다.

  "제1 도서관은 주로 귀족과 학자들이 이용하지만 제2 도서관은 일반 시민들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답니다. 서적의 개수는 제1 도서관에 밀려도 세계에서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의 규모일 거예요."

  "이렇게 많은 책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보관되어 있는 책들만을 관리하고 분류하는 사람들을 따로 두고 있어요. 그리고 정기적으로 서적을 필사해 사본을 만들어두죠. 파피루스지는 다 좋은데 내구성이 조금 약하니까요."

  "체계적이로군요.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도 거대한 도서관이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아닐 겁니다. 그러고 보니 로마에는 공공 도서관이 없네요. 이 부분은 돌아가는 대로 다른 의원들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어요."

  아마 키케로나 카토는 도서관을 짓자고 하면 쌍수를 들고 찬성할 것이다.

  책들은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에 있는 도서들을 필사해 가져오면 될 테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이와 인쇄술을 활용한다면 파피루스지를 쓰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시설을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르쿠스가 보기에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대단하긴 했어도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많았다.

  당장 위치부터가 호수와 지중해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습기가 많았다.

  일반 종이보다도 훨씬 습기에 취약한 파피루스지는 이런 환경에서 몇 년 버티지 못한다.

  그러니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필사를 해야 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해내고 있다지만 대규모의 화재나 지진이 일어난 뒤에는 이조차 쉽지 않다.

  실제로 알렉산드리아 제1 도서관은 지금으로부터 10년쯤 뒤에 거대한 화재로 소실된다.

  제2 도서관도 잇따른 화재와 파괴를 다 복구하지 못하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마르쿠스는 내심 이런 위대한 문화재도 결국 세월의 흐름 앞에 소실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특히 파로스의 등대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현대에 제대로 된 유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포로 로마눔이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유적으로나마 형태를 남긴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마르쿠스는 인류가 축적한 이 눈부신 유산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갈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었다.

  "이렇게 둘러보니 다 좋은데 시설관리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네요."

  "예? 그게 뭔가요?"

  "도서관은 태생적으로 화재에 취약합니다. 그러니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진압할 수 있는 전문 소방수들이 상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소방수들이 시설과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더군요. 지금이라도 1 도서관 근처에 소방수들을 상주시키는 걸 고려해보았으면 합니다."

  "음···일리가 있는 의견이네요. 지금까지 화재가 몇 번 나기는 했는데 그렇게 대규모로 난 적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겠죠. 로마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건의를 드려야겠네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기 있는 학자들은 이집트에서 봉급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집트 왕가에 종속되어 있는 겁니까? 만약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언제라도 이곳을 떠날 수 있나요?"

  클레오파트라는 피식 웃으며 즉각 대답을 들려주었다.

  "떠날 수는 있죠. 하지만 여기에서 한 번 연구를 시작한 학자는 어지간하면 제 발로 나가지 않는답니다. 은퇴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모를까 학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환경인 이곳을 나가고 싶을 리가 없죠."

  "그렇군요. 딱히 제약은 없다고 이해하면 되겠네요."

  마르쿠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천문학에 능통한 지식인들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이제 슬슬 기존의 로마가 사용하는 달력을 대대적으로 손보려는 참이었던 까닭이다.

  현재 로마가 사용하는 역법 체계는 정확성이 굉장히 떨어졌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냥 총체적인 난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마의 달력은 기본적으로 1년을 355일이라고 정하고 있었다.

  실제 1년보다 무려 열흘이나 부족한 것이다.

  이 오차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쓰고 있었으나 실용성이 너무나 떨어졌다.

  마르쿠스가 있는 시대에는 실제 계절과 달력상 계절의 차이가 2달이 넘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정확한 역법의 도입은 행정, 군사 농업의 모든 분야에서 혼란을 줄이고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실력 있는 천문학자들의 부재로 시도하지 못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능한 학자들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역사상 카이사르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알렉산드리아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율리우스력을 로마에 도입했다.

  이 율리우스력은 1년을 365.25일로 계산해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추가해 날짜를 맞췄다.

  기본적인 구조는 현대에서 표준 체계로 사용하는 그레고리력과 다르지 않다.

  율리우스력과의 차이는 계산의 정확도였다.

  율리우스력은 고대 천문기술의 한계로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의 주기를 약 11분 15초 더 느리게 잡았다.

  고작 11분 15초의 차이지만 이게 누적되면 128년 뒤에는 달력과 실제 날짜에 하루의 오차가 생긴다.

  마르쿠스는 이 미미한 차이를 대폭 수정한 그레고리력을 로마에 도입할 계획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들이 이론적인 뼈대를 잡으면 거기에 소소한 수정을 가하기만 하면 된다.

  '역사에는 율리우스력이나 그레고리력이 아닌 리키니우스력이라는 이름만 남겠군.'

  조금 양심이 찔리긴 했어도 어차피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현재 상황만 봐서는 카이사르가 역사처럼 이집트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니 대신 마르쿠스라도 더 정확한 역법을 로마에 도입할 의무가 있었다.

  어차피 새로운 역법을 만들 거라면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학자들을 섭외해 가도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니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마르쿠스는 아르시노에의 도움을 받아 명망 있는 천문학자들의 신상정보를 얻은 뒤, 곧바로 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

  혼란스러웠던 이집트의 정국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베레니케를 앞세워 권력을 잡았던 귀족들은 모두 참수됐다.

  이제 알렉산드리아의 지배자는 아울레테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로마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유학도 수월하게 결정되었다.

  아울레테스는 그저 묘한 눈길로 마르쿠스를 한번 쳐다본 게 다였다.

  뭔가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 같았지만 굳이 해명할 가치를 느끼진 못했다.

  마르쿠스는 아울레테스의 부탁을 받아들여 일부 병사들을 수비군으로 남겨 놓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베레니케와 클레오파트라, 아르시노에도 마르쿠스와 같은 배에 탔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동안 내내 침소에 틀어박혀 있던 베레니케는 오랜만에 다시 얼굴을 보였다.

  마르쿠스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한 번 더 주의를 주려고 다가갔다.

  "그동안 마음은 좀 다스렸나?"

  "그럭저럭."

  "당신 입장은 아르시노에나 클레오파트라와 다른 건 알고 있겠지? 저 둘은 정식으로 초대받은 귀빈이고, 당신은 볼모의 신분이야."

  "흥, 나도 이해하고 있어. 무슨 말 하려는지도 잘 알고 있다고. 나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 이거잖아?"

  말투는 거칠었으나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마르쿠스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얌전히 말을 잘 듣고 있으면 동맹국의 선대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대우는 해주겠다고 약속할게. 로마 사교계의 화려함도 알렉산드리아 못지않으니 적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알았어."

  베레니케는 의외로 기가 팍 죽은 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그녀는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파라오의 자리에서 쫓겨나 분노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집트의 관습과 달리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고, 자신이 다시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버지인 아울레테스가 마르쿠스의 앞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니 파라오에 대한 환상도 전부 깨졌다.

  허울뿐인 파라오의 자리보다는 최강대국인 로마에서 화려한 삶을 사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만약 내가 잘 처신했으면 네가 나를 파라오로 계속 밀었을 가능성도 있었을까?"

  "가능성은 있었지. 네가 현 파라오보다 더욱 많은 걸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로마에 유용한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면 네 손을 들어줬을지도 몰라."

  "그렇구나···역시."

  베레니케는 씁쓸하게 혀를 차며 배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가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베레니케 언니가 뜻밖에도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있죠?"

  "그녀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이니까요. 복잡하게 꼬아서 생각하지 않으면 의외로 현 상황에 순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전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이야 기가 죽어 있으니 좀 정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언제라도 사고를 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희 언니예요. 로마로 가면 제가 잘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다.

  항구에 접근하자 쿨렁! 하고 배가 요동쳤다.

  클레오파트라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마르쿠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르쿠스의 몸이 자신에게 닿았다는 걸 자각한 클레오파트라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며 허겁지겁 그의 팔을 떨쳐냈다.

  "꺄아악!"

  예상외로 격한 반응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마르쿠스가 미안한 눈빛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놀랐으면 저렇게까지 질색을 할까 싶었던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공주님께서 넘어지실까 걱정돼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자신이 마르쿠스의 팔을 쳐냈다는 걸 자각한 클레오파트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으아아, 아니에요. 절대 무례가 아니에요. 제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놀라서 그런 건데···그러니까······."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달아났다.

  사춘기 소녀의 심경이란 폭풍우에 휩싸인 대해의 풍랑보다도 더 이해하기가 어렵다.

  마르쿠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사이 배는 천천히 항구에 정박했다.

  육지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베레니케와 클레오파트라도 도로 갑판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오스티아 항구에는 가문의 식솔들을 거느린 율리아가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율리아!"

  마르쿠스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율리아 역시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마르쿠스의 손에 찰싹 붙어있는 아르시노에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조금 더 옆에 있는 베레니케까지 확인한 율리아의 눈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배에서 내린 마르쿠스에게 다가와 뺨과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르쿠스도 오랜만에 만나 아내를 끌어안고 연신 볼에 입을 맞추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마르쿠스의 뒤에서 아르시노에는 연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아가 항구에 나타났을 때부터 줄곧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마디로는 다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총명한 눈동자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 108. 로마로의 귀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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