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지중해의 수호자 >
104.
아울레테스와 마르쿠스의 회담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잔뜩 불평을 늘어놓으려 했던 아울레테스는 마르쿠스의 첫 마디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원로원은 파라오께서 알렉산드리아의 왕좌에 다시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로 내년에 군단을 편성해 파라오를 모시고 출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심신을 추스르고 계시지요."
"···바로 내년에 출병하겠다고?"
"예. 이번이 로마에서 보내실 마지막 겨울이 될 겁니다. 혹 불편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어···음, 그러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초장부터 나와 버리니 더 따질 것도, 나눌 말도 없었다.
아울레테스를 단숨에 진정시킨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집에서 푹 휴식을 취했다.
물론 휴식이라고 해도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직 밀린 업무도 조금 남았고, 무엇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자식들과 시간을 보내고 놀아줘야 했다.
한 가지 곤란한 점은 두 아이의 활동반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들인 트라야누스는 활동적이었으나 딸 소피아는 정적인 놀이를 선호했다.
덕분에 두 아이와 동시에 놀아주기보다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트라야누스는 거의 매일같이 장난감 칼을 가지고 와서 병정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처음에 어색하게 눈치를 보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나, 스파르타쿠스! 아빠는 갈리아 전사!"
혀 짧은 목소리로 단편적인 단어를 말하며 장난감 칼을 허우적대는 게 귀엽다는 말로밖에는 표현이 안 됐다.
"어이구, 우리 꼬마 검투사님.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었니?"
"다나에가 말해줬어요! 스파르타쿠스, 최고의 검투사!"
"그래? 그러면 아빠랑 같이 온 아저씨가 스파르타쿠스라는 건 알고 있어?"
"어? 그 덩치 큰 아저씨?"
트라야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기울였다.
"뭐야, 몰랐던 거야? 그 아저씨가 스파르타쿠스야."
"그럼 오늘은 그 아저씨랑 검투사 놀이할래!"
마르쿠스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트라야누스를 내보낸 마르쿠스가 셉티무스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려 할 때였다.
집무실 안쪽으로 빼꼼 얼굴을 들이민 작은 인영이 보였다.
그 깜찍한 모습에 마르쿠스의 표정은 그만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헤실헤실 풀어진 입가를 필사적으로 다시 원위치시키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된단다."
쪼르르 달려오는 속도는 아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는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소피아, 뛰지 말라고 했잖니."
아이의 뒤를 따라 들어온 율리아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피아는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다가와 마르쿠스의 다리에 넘어질 듯 몸을 날렸다.
무릎을 타고 기어오르려고 하는 그녀를 마르쿠스는 두 손으로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자리를 잡게 도와주었다.
아이가 가진 특유의 높은 체온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딸 소피아는 마르쿠스가 무슨 일을 할 때면 이렇게 무릎 위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걸 즐겼다.
가끔은 마르쿠스의 무릎을 베고 잠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니?"
"에헤헤, 저녁 먹기 전까지 아빠랑 있으려고요."
"우와, 아빠는 너무 신나는걸? 그러면 저녁 먹고 나서도 계속 함께 있을까?"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으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율리아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피아가 뾰로통한 눈초리로 마르쿠스를 올려다보았다.
"소피아랑 있으면 아빠 일 못 해요?"
"그럴 리가! 오히려 일이 훨씬 더 빠르게 끝나지, 흠흠, 당신은 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그래요."
"무조건 들어주기만 하는 건 아이의 정서발달에 도움이 안 돼요."
"무슨 소리, 애정은 최고의 교육이라고 써 있단 말이야."
"어휴, 못 말리겠네요."
율리아의 한숨을 한 귀로 흘리며 마르쿠스는 아이의 뺨에 살짝 얼굴을 비볐다.
소피아가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었다.
"내년이면 다시 이집트로 가야 하잖소. 그러니까 지금은 최대한 아이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
"구체적인 일정이 잡혔나요?"
"아니. 아직 결정된 건 내년에 출병하겠다는 것밖에 없어. 그래도 이제 슬슬 폼페이우스 님과 원로원이 일정을 조율할 거야."
마르쿠스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던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빠, 또 어디 가요?"
"어? 응···이번에는 저기 남쪽의 이집트라는 데로 가야 한단다."
"그런 건 그냥 다른 사람한테 가라고 하지······."
풀이 잔뜩 죽은 딸의 얼굴이 역설적으로 마르쿠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그는 저녁이 준비되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소피아를 꼭 끌어안은 채 뺨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다.
율리아는 온화한 눈길로 사이좋은 부녀의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 눈앞에 있어도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르쿠스는 이 아이들에게 가장 행복한 미래를 선물해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원로원은 이집트로 진군하자는 크라수스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원래부터 골치 아픈 선택권을 억지로 떠넘긴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결정에 따라주는 게 옳았다.
게다가 지금은 군대를 일으키는 부담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덜했다.
마르쿠스는 최근 개점한 알렉산드리아의 은행을 통해 정기적으로 정보를 전달받고 있었다.
이 정보는 크라수스를 통해 원로원에 그대로 전달됐다.
베레니케는 연이은 실정으로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민심을 실시간으로 갉아먹는 중이었다.
그녀는 농민들을 무시하고, 노예를 학대하고, 오롯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민생이나 국정의 운영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덕분에 2년도 안 돼서 각지에는 도적이 들끓고, 치안은 엉망이 됐다.
그래도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에서는 연일 화려한 연회가 개최됐다.
베레니케는 낭비의 극치를 보여주며 언제나 각양각색의 보석으로 몸을 감쌌다.
알렉산드리아의 주민들은 물론 기득권층마저 이런 그녀에게 질려버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력자들은 처음에는 허수아비 파라오를 세워두고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다.
그러나 베레니케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자존심도 이상하게 강해서 귀족들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부패한 귀족들마저 이대로 가면 10년 안에 이집트가 절단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결국 몇몇 온건파 귀족들은 비밀리에 로마에 서신을 보내기까지 했다.
요약하자면 베레니케는 답이 없으니 아울레테스가 돌아와 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폼페이우스는 원로원보다 한발 앞서서 행동에 나섰다.
내년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자신이 직접 군단을 지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출마에 원로원은 다급해졌다.
폼페이우스가 선거에 나온다면 선거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귀족파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크라수스에게 집정관 출마를 제의했다.
크라수스 역시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압도적인 표를 받으며 나란히 집정관에 당선됐다.
이제 문제는 두 사람의 속주 파견 임지와 이집트 파병군을 누가 지휘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명예를 원하는 폼페이우스는 자신이야말로 이 중임을 맡을 수 있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자존심이 강하오. 그들은 힘보다는 권위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소. 그러니 동방을 평정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재림이라 불리는 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군단을 이끄는 게 마땅하다고 확신하는 바이오!"
물론 키케로와 카토를 비롯한 귀족파는 폼페이우스에게 이 이상 공을 쌓게 해줄 마음이 없었다.
이집트 파병은 단순히 명예만을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울레테스를 파라오로 복권시키면 당연히 그는 로마의 명에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다.
막대한 곡창지대를 가진 이집트를 사실상의 클리엔테스로 만들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가뜩이나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순조롭게 평정하고 있는데 폼페이우스에게 이집트까지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키케로가 손을 번쩍 들고 발언을 요청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의견은 일견 타당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고려하지 않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폼페이우스가 지닌 정복자로서의 명성입니다. 동방 전역을 제패한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무력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가 군단을 이끌고 이집트로 오면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카토가 키케로의 말을 받아 소리쳤다.
"당연히 자신들을 박살 내고 속주로 삼으러 왔다고 여기겠지요."
"그렇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민들이 베레니케에게 싫증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로마의 속주가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자치를 보장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유대 왕국을 무너뜨리고, 셀레우코스 왕조를 병합했습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이집트 시민들은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키케로, 그건 너무 과한 생각이 아닌가? 그들이 위협감을 느낄 거다? 그래서 로마에게 대항할 거라고? 오히려 대항한다면 자신들도 속주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더 납작 엎드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나?"
폼페이우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이번만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마르쿠스에게도 사전에 이 점을 단단히 일러두었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갈리아에서 보인 눈부신 활약에 상당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로원의 염려와 달리 그는 이집트를 클리엔테스로 삼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원래 그런 복잡한 정치적인 노림수는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그저 최근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명성을 다시 한번 드높이고 싶었을 뿐이다.
로마 최고의 장군은 여전히 폼페이우스라는 인식을 로마 시민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특히 집정관의 차기 속주가 결정되자 이런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강력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동방 속주를 총괄하는 사령관 자리를 약속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카이사르와 대등했다.
소아시아 전체 3개 속주를 통괄하고 필요할 때는 10개 군단까지 통솔할 수 있는 절대 지휘권을 부여받는다.
임기는 이례적인 5년으로 정해졌다.
이는 폼페이우스가 호민관들을 동원해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를 기원전 50년 말까지 연장한 것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였다.
폼페이우스는 자신도 크라수스나 카이사르와 대등한 권한을 받아야 형평성에 맞는다고 주장했다.
원로원도 크라수스는 되고 폼페이우스는 안 된다고 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의 차기 임지는 히스파니아 전체 2개 속주로 정해졌다.
그러나 히스파니아는 이미 모든 정복이 끝나서 군사를 일으킬 명분이 없는 지역이었다.
서쪽으로는 끝도 없는 대서양이 펼쳐져 있고, 북쪽과 동쪽은 카이사르의 임지인 갈리아였다.
남쪽으로 가봐야 이미 로마의 영역이 된 북아프리카 속주밖에 나오지 않는다.
폼페이우스가 명성을 쌓을 수단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집트 파병은 자신이 맡아야 한다고 여기는 게 당연했다.
원로원도 이런 폼페이우스의 호소를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로마 시민들의 여론은 폼페이우스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수스도 명성 자체는 상당했으나 군대에 관해서 만큼은 폼페이우스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
차라리 마르쿠스라면 가능했겠으나, 아직 마르쿠스는 임페리움을 부여받을 자격이 없었다.
원로원은 조금 더 고민해보고 다음 회의 때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회의가 파하고 한데 모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귀족파는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마르쿠스가 폼페이우스가 원하는 건 실권이 아닌 명예라는 점을 슬쩍 알려준 덕분이었다.
며칠 뒤 열린 회의에서 가장 먼저 발언을 요청한 키케로가 자신만만하게 커다란 목소리를 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그토록 신경 쓰는 이유는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로마의 식량 생산량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일강의 축복을 받은 이집트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합니다. 이집트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로마의 식량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확실한 길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이런 중대한 임무를 인식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요?"
은근슬쩍 자신을 띄어주는 말에 폼페이우스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키케로. 나는 이미 해적들을 뿌리 뽑아 로마의 시민들이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었소. 이집트는 현재 우리 로마의 가장 중요한 식량 공급지요. 그러니 내가 이곳을 안정시키러 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보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단발적인 조치보다는 조금 더 체계적인 틀을 잡아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로마의 식량 확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법안을 이번 기회를 빌려 통과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총책임자는 위대한 폼페이우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키케로가 제안한 법안은 소아시아와 시칠리아,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밀을 안전하게 지키는 해군을 창설하자는 것이었다.
원래 로마는 해군을 상시로 운용하지 않았다.
특히 지중해의 해적들이 완전히 소탕된 뒤에는 기존에 있던 배들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지중해 전체를 다스리는 패권국이었다. 해군이 전혀 필요 없는 상황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당장 지금처럼 다른 대륙으로 군단을 파병해야 할 때만 해도 해군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주먹구구식으로 선박을 발주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는 건 효율이 너무 떨어졌다.
키케로는 이런 점을 개선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이미 과거에 해적들을 한순간에 청소하고 지중해의 안전을 확보한 실적이 있었다.
그에게 해군 총사령관 지위를 맡기는 건 지극히 당연하게 보였다.
로마에는 역사상 처음 생기는 지위다.
원로원은 이 자리를 지중해의 수호자라고 칭했다.
이 칭호가 폼페이우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거기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맡아본 적이 없는 자리를 자신이 맡는다는 데에 폼페이우스는 감동이 벅차올랐다.
그가 슬쩍 마르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획대로 이걸 맡아도 삼두의 화합에 문제가 없겠느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마르쿠스는 열렬한 박수갈채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폼페이우스는 어찌나 감격했는지 눈가에 물기가 고이기까지 했다.
그가 살짝 목이 멘 어조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지금까지 로마인 그 누구에게도 허락된 적이 없는 중책을 맡은 데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는 바요. 여러 의원분들의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 없도록 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정진하겠소."
귀족파 의원들은 속내를 감춘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환호를 보내주었다.
폼페이우스가 해군의 총사령관으로 취임하며 자연스레 이집트 파견군 사령관도 그가 맡게 됐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명목상 사령관일 뿐 실제로 군단을 이끌고 이집트로 가는 건 마르쿠스로 결정됐다.
폼페이우스는 이 결정에 아무런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역사상 최초의 해군 총지휘관이라는 지위는 그만큼 그의 명예욕을 충족시켜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명목상 파견 사령관은 폼페이우스였기에 공적의 일정 부분은 그의 몫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결과였다.
실리적인 부분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폼페이우스의 성향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물론 원로원도 생각 없이 폼페이우스에게 이런 자리를 준 건 아니었다.
그들이 노리는 건 실질적인 이득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여기서 명성을 더 얻든 말든 귀족파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해군 총사령관이라는 명목으로 부여받는 임페리움은 어차피 폼페이우스가 차기 총독으로 부임하면 받게 될 권리였다.
해군을 이끈다고 해봐야 그 목적은 식량 확보에 맞춰져 있었기에 실권을 휘두르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식량 확보에 문제가 생기면 폼페이우스의 책임으로 돌릴 핑곗거리가 하나 생긴 셈이었다.
물론 폼페이우스를 이렇게 자극함으로써 카이사르와의 분열을 꾀하는 것도 원로원의 노림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덕분에 실제적인 이득은 마르쿠스가 전부 가져갈 수 있게 됐다.
귀족파와 민중파의 합의가 이루어지자 자잘한 사항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폼페이우스의 대리인 자격으로 마르쿠스가 이끌게 될 군단은 3개로 정해졌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에 대기시켜놓은 12군단과 새롭게 편성할 2개 군단이다.
즉각 군단의 편성에 들어간 마르쿠스는 해가 바뀌자마자 아울레테스를 대동하고 이집트로 출병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이건 갈리아 전쟁에서 마르쿠스가 카이사르에게 배운 유용한 가르침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속도로 움직이면 필연적으로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된다.
이건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유용하게 적용되는 기술이었다.
로마군의 출병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리아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잔뜩 당황한 베레니케는 당장 신하들을 소집했으나 마땅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민심은 최악이었고, 로마군에 맞설 병력은 부족했고, 항복한다고 해도 아울레테스가 그녀를 용서해줄 리가 없었다.
초조해진 그녀는 급기야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까지 불러 의견을 구했다.
아르시노에는 정말로 가슴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마군은 강대하고 저희는 약하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네요. 파라오께서 지닌 드높은 덕으로 해결하시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지금 비꼬는 거니?"
"그럴 리가요. 파라오께서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비책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걸 실험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클레오파트라도 생긋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파라오께서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셨으니 분명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 그런가?"
베레니케는 살짝 자신감 없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미모와 몸매로 마르쿠스를 흐물흐물 녹여버릴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막상 3개 군단을 끌고 오는 상대를 정말로 몸으로만 함락시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왕좌를 빼앗긴 아울레테스가 얼마나 큰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을지는 총명하지 못한 그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옆에서 마르쿠스를 닦달하면 자신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본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은근슬쩍 베레니케를 부채질했다.
"저도 뒤늦게 알아봤는데요, 강대한 권력을 지닌 여성이 순종적으로 될 때 남자는 엄청난 유혹을 느낀다고 해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라고나 할까요?"
"아르시노에의 말이 옳아요. 로마 원로원의 대표라고 해도 남자는 남자죠."
"어째 예전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저희는 파라오의 말씀대로 어린아이에 불과하니까요. 그때는 남녀 간의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거죠."
생글생글 웃는 여동생의 표정을 살핀 베레니케는 찝찝한 마음을 억누르고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싸우는 것도, 항복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이상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어차피 하나뿐이었다.
"좋아. 오히려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내 권력을 확실히 굳혀야겠어. 그 마르쿠스라는 귀족을 내 남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앞으로 누구도 감히 나를 적대하지 못하겠지."
베레니케는 마케도니아의 의상이 아닌 파라오의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거기에 선정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속이 다 비칠 정도의 얇은 옷감만을 사용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혹할 수밖에 없는 요염함과 색기가 온몸에서 뚝뚝 흘러넘쳤다.
베레니케가 동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볼까?"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덕담을 건네주었다.
베레니케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 104. 지중해의 수호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