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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신의 은총을 받는 자 (71/326)

  < 70. 신의 은총을 받는 자 >

  원로원의 제안서를 받은 폼페이우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서신을 찢어버렸다.

  "이 치졸한 늙은 너구리들이 감히 나 폼페이우스를 이렇게 대우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작년에 마르쿠스가 건넨 충고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군대를 해산하기 전에 최소한의 약속은 받아내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들었던가.

  그걸 한 귀로 흘린 사람은 다름 아닌 폼페이우스 자신이었다.

  이제 와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생각해보니 우스운 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군대를 해산하는 건 로마의 지휘관이 따라야 할 신성한 의무였다.

  그리고 그 의무는 지휘관에게만 부여되는 게 아니었다.

  지휘관이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자신의 무욕을 증명했다면, 원로원은 올바른 논공행상으로 지휘관의 공적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런 상호신뢰가 갖춰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법대로 군대를 해산하겠는가.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거라는 예상을 하고 군대를 해산한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막 나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군대를 해산했으니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줄 알았나 본데···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지."

  아직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는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이 열리는 건 지금으로부터 8개월 뒤의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할 위대한 장군을 8개월이나 시민과 접촉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폼페이우스에게 시민들을 상대로 연설할 기회를 주었다.

  시기는 바로 며칠 뒤, 성벽 밖에 있는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 연설장으로 낙점됐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폼페이우스는 여기에서 후안무치한 원로원을 규탄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계획이었다.

  사실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직에 출마하면 원로원을 물 먹일 수 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로마인에게 있어서 개선식이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최대의 영예였기 때문이다.

  그건 이미 개선식을 두 번이나 치른 폼페이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번 개선식은 폼페이우스의 생일에, 그것도 로마 역사상 가장 화려한 규모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역사상 그 누구도 누려본 적 없는 명예다. 도저히 포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정관은 내후년도 가능했지만, 개선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로마는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모든 문명권을 손에 넣었다.

  로마의 패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은 이제 북쪽의 야만족들과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뿐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지금 정도의 대공을 세울 시기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의 머릿속에 개선식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열심히 연설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그에게 부관 빌로푸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그누스 님, 아무래도 마르쿠스 님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마르쿠스를? 어째서?"

  "이런 정치적인 분야는 그분에게 자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천성이 군인이라 마그누스 님께 효율적인 조언을 드릴 수가 없으니까요."

  "그럴 필요 없네. 군대를 해산하지 말라는 충고를 거하게 무시한 뒤에 이제 와서 매달리는 건 내 방식이 아니야. 내가 누군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면 이런 일쯤이야 간단히 수습할 수 있네. 그런 뒤에 이후 어떻게 할지 자문할 걸세."

  빌로푸스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않았으나 폼페이우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마르쿠스가 내다본 그대로였다.

  그리고 결과 역시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폼페이우스가 이를 갈고 나온 연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실패'였다.

  원래부터 폼페이우스는 군단을 휘어잡는 재능과 달리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설엔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하고 갔는데 이게 오히려 역효과가 되어버렸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설의 핵심은 명료성이다.

  복잡한 내용의 설명은 피하고 최대한 요지만을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을 비판한답시고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시민들은 동방 속주 편성안의 세부내용이나, 토지 분배의 자세한 과정 따위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공을 세웠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게 함께 전쟁을 수행한 장교들은 몰라도 일반 시민들에게는 조금 과하게 느껴졌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연설은 뭘 말하고 싶은지도 모호한 중구난방, 자화자찬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원로원 의원들은 조소를 흘리며 돌아갔다.

  그들은 이제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속주편성안과 토지 분배는 무기한 유보 상태로 들어갔다.

  차라리 거부라도 했으면 폼페이우스가 실력행사로 나올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그걸 모를 원로원이 아니었다.

  워낙 복잡한 개혁안이 많이 밀려있어 그것부터 처리하겠다고 하는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잔뜩 화가 난 폼페이우스는 개선식이 열릴 때까지 자신의 별장에 칩거해버렸다.

  기원전 62년의 로마 정국이 '격동'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면 기원전 61년의 로마를 상징하는 단어는 '경직'이었다.

  원로원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전략으로 폼페이우스의 속을 뒤집어지게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만이 무심하게 로마를 지나쳐가는 테베레 강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

  로마가 멈춰있다고 해도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의 삶까지 멈춘 것은 아니다.

  마르쿠스는 얼핏 보면 무의미해 보이는 지금 이 시간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순한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아니다.

  앞으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내실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은 올해와 내년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 로마는 단 한 순간도 호흡을 고를 수 없는 격동의 시대로 치닫게 된다.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나가지 않으려면 단단히 대비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마르쿠스는 이제 더는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순응하며 흘러갈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자신이 먼저 주도적으로 움직일 시기가 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패를 어느 때보다도 더 냉정히 분석해야만 한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심복들을 한 명씩 소집해 그동안 내린 명령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셉티무스, 생산 시설의 이전은 예정대로 진행됐나?"

  "예. 명령하신 대로 양산체제가 확립된 군사기반 시설은 대부분 동방으로 옮겼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군수 물품의 생산도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르쿠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마르쿠스가 얻은 현대 지식의 대부분은 군사기술의 개발에 쓰였다.

  실력 있는 장인들에게 목표를 던져주고 그들이 막히면 돌파구가 될 지식을 2개월 단위로 얻어서 알려주는 식으로 효율을 극대화했다.

  물론 다른 분야의 기술 개발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10년을 투자해 간신히 중세 후기 수준의 제철 기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이용한 장비의 제작이나 기술 시험을 마음껏 시험해볼 수 없었다.

  군대에 준하는 사병을 갖추는 게 금지된 로마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반역으로 몰리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기술의 개발은 로마에서 하고 본격적인 생산 시설은 전부 동방 속주로 이전했다.

  로마에서 거의 2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소아시아라면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갑옷과 활은 특히나 보안에 신중해야 해. 뭐, 갑옷이야 유출된다고 해도 다른 나라가 양산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저희도 이제 막 양산체제를 갖춘지라 유출될 염려도 없습니다."

  "···좋아. 어쨌든 동방에는 타디우스도 있으니까 밑 준비에 부족함은 없겠지."

  아무리 고도의 정치력과 경제력이 뒷받침된다고 해도 군사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최후의 승자는 될 수 없다.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 크라수스와 동생 푸블리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사망하지 않던가.

  그런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마르쿠스는 확실한 군사적 수단을 마련해 놓는 걸 가장 우선순위로 삼았던 것이다.

  중장기병의 육성과 군대의 힘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철제 무기의 양산. 거기에 현대의 지식을 최대한 응용해 활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화약을 만들어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고민해본 결과 무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화약을 만든다고 해도 화포를 만들 정도의 화기 제작 기술을 갖추는 건 아직 무리였다.

  물론 모든 지식을 화포 하나에 집중하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약 무기를 만든다고 해도 그 이후가 더 문제였다.

  강철제 무기나 개량궁과 달리 화포는 절대로 그 존재를 숨길 수 없었다.

  게다가 마르쿠스는 아직 임페리움을 부여받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으니 죽 쒀서 개 줄 꼴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화약 무기의 나비효과가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예측되지 않는다는 점도 컸다.

  언젠가는 화약에 손을 댈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럴만한 상황이 받쳐줬을 때의 이야기다.

  '어차피 제철 기술만 확실히 챙겨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능력 이상의 과욕을 부렸다가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갖춰놓은 정도로만 해도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군사 관련 보고는 이쯤하고 농업 쪽은 어떻게 됐지? 성과는 제대로 나왔나?"

  "예. 우선 철제 농기구와 개선된 마구의 조합은 상상 이상으로 효율이 높았습니다. 기존보다 훨씬 더 빠르게, 게다가 밭을 더 깊게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농부들이 좋아하더군요."

  "4윤작법은? 그쪽이 제일 중요한데."

  마르쿠스가 군사만큼이나 많은 주의를 기울인 분야는 단연 농업이었다.

  로마가 상업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도 경제를 떠받치는 근본은 결국 농업이었던 까닭이다.

  로마의 농업은 대규모의 노예를 이용하는 라티푼디움 경영이었는데 이는 로마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원흉이기도 했다 대량의 노예를 부리는 대농장의 주인은 갈수록 부유해졌고, 경쟁에서 밀린 자영농들은 빈곤해졌다.

  이런 현상은 로마의 성장 동력을 점점 갉아먹고 있었다.

  노예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져 봐야 세수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전한 경제 체제를 위해서는 자유민의 수가 많아야 했다.

  로마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치인들은 농지법의 개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농지법의 통과는 쉽지 않을뿐더러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는 방법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영농의 수를 일정 이하로 내려가지 않게 해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자영농의 생산력을 근본적으로 올려줄 수 있는 방도가 필요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로마라는 나라는 어느 순간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라티푼디움 경영은 존재 자체가 영구 지속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노예를 끊임없이 투입하는 경영은 결국 노예의 공급이 언제까지나 이어져야 한다는 걸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 확장이 한계에 달하면 노예의 공급은 언젠가 멈추게 될 것이고, 숫자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드시 오게 된다.

  마르쿠스가 살아있을 때야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그 날은 언젠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죽은 뒤 한참 후의 미래만 걱정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농업 생산력의 향상은 자연히 인구 증가로 이어지고, 감당 가능한 인구의 증가는 곧 국력의 증가를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군사기술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는 최근 태교와 임신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농사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 주력했었다.

  처음에는 중세 수준의 농법만 적용해도 생산력을 크게 늘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로마의 농법은 의외로 수준이 높았다.

  오히려 중세 초기보다는 더 발전된 농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마르쿠스가 제안한 새로운 농법을 이해하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개념을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나 걱정했던 마르쿠스는 내심 자신의 편견을 부끄럽게 여겼다.

  어쨌거나 셉티무스는 마르쿠스가 보유한 농지에서 실험해본 결과를 경이로운 심정으로 보고했다.

  "마르쿠스 님이 제안하신 4윤작법이란 방법은 기존의 방법보다 확실히 더 효율적입니다. 일단 휴경지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농부들은 마르쿠스 님이 대지의 여신 케레스 님의 신탁을 받은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이네. 이제 4윤작법을 쓰는 지역을 점점 넓혀보자. 그리고 어디서든 비슷한 효과를 보인다면 로마 전역에 이 방법을 보급해야겠지."

  "도련님은 대체 어떻게 이런 방법을 떠올리신 겁니까?"

  "농사에는 필연적으로 휴경지가 발생하잖아. 그런데 클로버와 순무는 보리나 밀이 자란 땅에서도 경작할 수 있다는 말이 있더라고. 그래서 이것들을 번갈아 심으면 휴경을 하지 않고도 수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

  토지에 질소를 인공적으로 보급할 수 없는 고대 시대에는 휴경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작물을 재배할 때 소모되는 토지의 영양물이 자연적으로 보충되는 속도보다 더 빨랐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로 같은 작물을 쉬지 않고 경작하면 생산량이 점점 감소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자라지 않게 된다.

  이 외에도 병충해나 토양의 독성 증가 같은 문제도 있었다.

  고대인들도 당연히 이 점을 알고 여러 가지 방안을 궁리했다.

  로마인들은 비료로 인분을 뿌리거나 땅을 완전히 갈아엎는 방식, 땅을 나눠서 다른 작물을 돌려가며 경작을 하는 윤작법으로 휴경을 극복했다.

  다만 밀 농사 자체가 지력을 많이 소모하고, 로마가 위치한 지중해성 기후는 땅이 마르는 속도가 빨랐다.

  제아무리 윤작법을 한다고 해도 휴경지는 생길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땅을 3등분 하고 한쪽에는 밀, 다른 쪽은 보리, 나머지는 휴경지로 사용하는 삼포제를 사용했다.

  이건 놀랍게도 중세 초기까지 땅을 2등분 해 절반이나 휴경을 한 이포제보다 훨씬 앞선 방식이었다.

  로마가 망한 뒤 농법이 더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져 버린 탓이었다.

  마르쿠스는 여기에서 한층 더 발전된 4윤작법, 달리 노퍽 농법이라고 알려진 농법을 제시했다.

  이 농법은 4년을 주기로 보리, 클로버, 밀, 순무를 돌려가며 경작하기 때문에 휴경지를 두지 않아도 됐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저 4가지 작물이 토지에서 각기 다른 영양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6세기에 개발되어 18세기에나 널리 쓰인 4윤작법은 유럽의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인 일종의 농업혁명이었다.

  클로버와 순무는 로마에서도 구할 수 있는 작물이었기에 도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농부들이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는데 보수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건 딱히 농부들의 탓은 아니었다.

  농사라는 건 잘못된 방식을 썼다가 망하면 꼼짝없이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검증된 방식만을 쓰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일단 자신이 소유한 장원에서 시범적으로 4윤작법을 사용해보았다.

  농사가 망해도 책임을 묻지 않고, 보상도 해주겠다는 계약서를 써서 농부들을 설득했다.

  검증에 엄청난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는 어지간하면 마르쿠스의 업적에 놀라지 않는 셉티무스조차 또다시 경악할만한 성과였다.

  "도련님이 도입한 방식은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신의 은총이라고 보일 겁니다. 괜히 케레스 여신님의 이름이 거론되는 게 아니에요."

  "아직 개선이 끝난 게 아니야. 거름을 주는 방식은 아직도 문제가 많거든. 이건 제도적인 문제도 있어서 지금은 바꿀 수 없지만 이제 슬슬 준비는 하는 게 좋겠어."

  "도련님의 명령대로 조사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인분을 거름으로 주는 게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아니. 인분은 비료로 안전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장시간 보관해서 퇴비화를 했을 경우에만 그런 거야. 지금처럼 그냥 똥을 퍼다 뿌려버리면 당연히 문제가 생기지."

  "흠···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련님께서 그렇다고 하면 분명 이유가 있겠죠."

  이 시대 사람들은 아직 장내 기생충에 대한 지식이나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생선으로 만든 발효 소스를 즐겨 먹고, 도시 외곽으로 옮긴 인분을 비료로 사용했다.

  기생충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악몽의 순환 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공중목욕탕과 화장실, 퇴비 보관에 관한 시행령과 얽혀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아직 재무관에 불과한 마르쿠스가 손을 대긴 힘든 문제였다.

  그래도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안찰관이 될 수 있으니 개선사업을 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

  마르쿠스는 치적을 위해 지금까지 미뤄두고 있었던 위생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로마 공직의 임기는 고작 1년이라 취임한 뒤에 준비해서는 시간이 모자를 수박에 없다.

  지금부터 시행할 사업들을 전부 준비해 취임 후 곧바로 착수하는 게 중요했다.

  다행히도 로마는 위생을 개선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인프라는 완벽히 깔려 있었다.

  어지간한 중세 도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상하수도, 도시 각지에 널린 공중목욕탕, 이미 기초적인 비누를 사용하고 있는 사회상까지.

  다만 위생관념이 전무해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공중목욕탕은 물을 갈지 않아 더럽기 그지없었고, 초기형태의 비누는 몸보다는 옷을 세탁하는데 더 많이 쓰였다.

  마르쿠스는 이미 구축된 이 시스템을 개선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시민들을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위생개선으로 얻어지는 효과를 누구나 알기 쉽도록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이 일은 산술에 능한 다나에에게 맡기기로 했다.

  "올해부터 내년까지 수부라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해. 전수조사는 무리일 테니까 나이와 성별로 나눠서 천명쯤 인원을 뽑으면 될 거야. 이들이 2년 동안 얼마나 자주 질병에 걸리는지, 그로 인해 몇 명이나 사망하는지 대략 통계를 내봐."

  "천명이나 조사하려면 비용이 상당히 들 것 같은데요."

  "얼마가 들어도 내가 얻게 될 명성에 비하면 싸게 먹히는 거야."

  "확실히 도련님께서 위생에 신경을 쓰시면서 가문 사람들이 잔병치레하는 경우가 많이 준 것 같기는 해요. 그걸 이렇게 숫자로 작성해서 위생 사업 전후로 비교하면 비교가 확 되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수고 좀 해줘.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다나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즉시 조사원들을 고용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셉티무스도 4윤작법을 추가로 실행할 농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제 방안에 남은 사람은 서류를 작성 중인 마르쿠스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스파르타쿠스뿐이었다.

  그토록 많은 일을 지시하고도 여전히 일에 몰두중인 마르쿠스를 본 스파르타쿠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보고 있으면 가끔 정말로 신의 사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노예 중에는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하는데 저는 솔직히 그 생각이 이해가 갑니다."

  "신의 사도? 그런 이야기가 가문에서도 돌고 있다고?"

  "예. 저처럼 학식이 낮은 자가 봐도 도련님이 하시는 일이 이 나라를 뿌리부터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군사, 농업, 사회제도와 금융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서 변화를 일으키고 계시죠."

  "그러니까 정말로 신에게 계시라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거지?"

  스파르타쿠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불가능한 현상을 신의 존재와 결부시키는 건 고대, 중세인들의 자연스러운 성질이었다.

  마르쿠스가 하는 일은 이제 이해의 영역을 초월했으니 이런 시선을 받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집트나 제정 로마는 자신들의 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여겼다고 하던데.'

  노리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셉티무스와 스파르타쿠스에게 연달아 이런 말을 들으니 어떤 막연한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신을 신으로 섬기라는 말 따위는 낯간지러워서 도저히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통치의 수단으로 그런 비슷한 수단을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현재가 아닌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혹은 의외로 빠르게 실현될 수도 있는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 70. 신의 은총을 받는 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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