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시대의 선택 (46/326)

  # 46 45. 시대의 선택 ──────────────── 기원전 67년 초기의 로마는 시민들의 불만으로 폭발 직전이었다.

  밀 배급 자체는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느낌이었지만, 시민들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작 해적들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는다는 느낌을 참지 못했다.

  민회는 연일 원로원의 무능함과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루쿨루스의 탐욕을 성토했다.

  "우리는 식량 걱정 없는 삶을 살고 싶다!"

  "밀값을 원래대로 돌려놔라!"

  "해적들이 이탈리아반도까지 들어오는 게 말이 되느냐! 원로원은 대책을 마련하라!"

  이 사태가 지속되면 정말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사실 원로원이 이렇게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무능해서만은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들도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밀값이 폭등한 것은 사회의 불안 때문이었다.

  이 불안감만 낮춰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밀값은 크게 하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해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명장에게 전권을 맡기고 소탕에 들어갈 거라는 발표만 해줘도 된다.

  루쿨루스 건은 그다음 적당히 시간을 두고 처리하면 되는 문제였다.

  실제로 원로원에서도 계속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최근 무섭게 인지도를 키우고 있는 키케로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방법이 확실한 문제를 언제까지 시간을 끌어야 합니까. 아무리 더 고민해본들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해적들을 이대로 계속 놔둔다면 폭동만이 문제가 아니라 동맹국들도 로마에 등을 돌릴 겁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마땅한 방도가 없으니 다들 고민하는 것이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해결법을 굳이 고르려 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해적을 소탕할 유능한 장수를 임명하고, 동방에도 루쿨루스를 해임하고 인망 있는 장수를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키케로의 일갈에도 원로원 의원들은 여전히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루쿨루스는 원로원 강화에 앞장섰던 술라의 심복이며 집정관과 법무관을 역임한 명문가 출신이다.

  대다수의 의원들은 친원로원파에 속하는 그를 경질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루쿨루스의 동생인 테렌티우스가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굳이 루쿨루스를 해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미트리다테스가 폰투스를 수복했다고 해도, 그건 표면상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루쿨루스에게 연전연패한 그의 군사력은 대단치 않습니다. 루쿨루스가 병력을 수습하기만 하면 곧바로 다시 몰아칠 수 있을 겁니다."

  "그 병력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으니 이 꼴이 난 거 아닙니까."

  "한 번 실패를 겪었으니 그도 교훈을 얻었겠지요. 최소한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렌티우스의 말이 옳소. 루쿨루스가 마무리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간 이룬 업적이 있지 않소. 그 점은 존중해 줘야지."

  다른 귀족파 의원들도 테렌티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루쿨루스를 해임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자 키케로는 질려버린 듯 한숨을 쉬며 눈가를 주물렀다.

  "그럼 루쿨루스 건은 그렇다 치고···해적 건은 어쩌실 겁니까. 하루빨리 지휘관을 선정하고 소탕 계획을 입안해야지요."

  "지휜관을 선정하라고 해도······."

  원로원 의원들이 시선이 일제히 비어있는 좌석을 향했다.

  원래라면 폼페이우스가 있어야 할 자리다.

  그는 급한 업무가 생겼다는 이유로 회의에 불참했다.

  당연히 자신이 해적들을 퇴치하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폼페이우스의 움직임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해적 소탕을 할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니 잠자코 임페리움을 부여하라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원로원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오길 바라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는 원로원 전체가 폼페이우스에게 사정하는 듯한 구도가 되지 않습니까."

  의원들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부탁을 한다면 그건 폼페이우스가 먼저 해야지, 결코 원로원이 먼저 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도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굽히는 그림이 나온다면 원로원의 권위는 명백히 폼페이우스의 밑이라고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적들이 들끓고 있는데도 토벌군을 편성하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어처구니없게 보일 수도 있는 이유였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공화정 체제의 존속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이들은 원로원뿐이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런 이유보다는 당장의 생활이 안정되는 게 수만 배는 더 중요했다.

  폼페이우스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의 옆에는 마르쿠스까지 있었다.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일부러 침묵을 고수하라고 조언했다.

  어차피 시간은 그의 편이다.

  시민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으면 원로원은 결국 굽히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폼페이우스가 가져갈 수 있는 권리도 더욱 커진다.

  폼페이우스는 일부러 민회가 열리는 장소에도 가끔 얼굴을 내비쳤다.

  그럴 때마다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폼페이우스의 토가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폼페이우스 님! 제발 해적들을 어떻게 해주십시오. 이대로는 도무지 못 살겠습니다."

  "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분은 폼페이우스 님 밖에는 없습니다!"

  "아아, 물론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런 건 법적인 절차가 있는 법이라······."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원자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시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시기해 임페리움을 내려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민심의 흐름을 감지한 원로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낀 폼페이우스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가비니우스라는 호민관을 충실한 수족으로 삼았다.

  호민관이란 민회에서 선출되는 관직으로 평민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 번에 10명이 선출되는 호민관은 오직 평민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호민관이 된 이들은 원로원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귀족으로 신분이 승격된다.

  이들의 권리는 실로 막강했는데 그 누구도 호민관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할 수 없었다. 거기에 개개인이 모두 독립된 사법권과 입법권을 지녔다.

  원로원에서 그 어떤 법을 통과시키려 해도 호민관은 거부권을 행사해 이를 막을 수 있었다.

  주어진 권한만 보면 로마 최고의 관직이라는 집정관과 비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라는 호민관의 권리가 너무 막가하다고 판단해 특권을 전부 없애버렸지만, 폼페이우스가 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 때문에 평민들 사이에서 현재 폼페이우스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호민관 가비니우스는 민회에서 충격적인 내용의 해적소탕 작전을 제안했다.

  "시민 여러분! 우리들이 대체 언제까지 참아줘야만 하는 겁니까. 우리는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해 1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계속 기다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결책을 제시할 능력도, 생각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귀족들이야 이 사태가 몇 년 더 끌려도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겠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는 말입니다!

  "

  "옳소! 원로원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을 작정이라면 민회에서 이 문제를 처리해야만 하오!"

  "밀을 사면 남는 돈이 없단 말이오! 대체 이 미친 상황을 왜 두고만 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소!"

  가비니우스는 미리 작성해온 양피지를 쫙 펼쳐서 자신이 입안할 법안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시민들의 지엄한 뜻에 따라 나 가비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법안을 제안합니다! 20개의 정규 군단은 순수하게 이 작전에만 투입한다."

  20개 군단이라면 중무장 보병 12만, 기병 5천 이상으로 구성되는 대병력이다. 역사상 이 정도 규모의 군단이 투입된 전쟁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두 번째로 20개 군단을 운용하기 위해 군선은 최소 500척 이상을 투입한다. 셋, 총사령관은 막료를 임명할 절대적 권한을 가지며 14명의 원로원 의원 자격자가 배속된다!"

  가비니우스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롯이 이 작전에만 사용할 예산은 1억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넘어갔다.

  국가 예산의 3분의 2 이상을 투입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 작전의 총사령관은 지중해 전 영역과 해안에서 내륙까지 50마일 이상을 관할 하에 둘 수 있었다.

  임무 수행 기간 또한 파격적이었다.

  보통 1년 단위로 임페리움을 갱신하는 관례와 달리 처음부터 3년이라는 기간을 잡아둔 것이다.

  이 절대적인 권한을 지니는 총사령관으로는 당연히 폼페이우스가 지명됐다.

  로마 역사를 통틀어 봐도 이 정도의 지휘권을 한 사람에게 몰아준 사례는 없었다.

  한니발과 전쟁을 할 때의 스키피오조차 이런 권한은 받지 못했다.

  이건 사실상 로마 전체를 폼페이우스의 손에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중해 전 영역을 관리한다는 것은 곧 로마의 모든 병참선이 폼페이우스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가비니우스의 법안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이 지긋지긋한 해적을 끝장내 준다면 이것보다 더한 권한이라도 얼마든지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원로원은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옵티마테스에 속한 자들은 이런 정신 나간 법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쳤다.

  심지어 폼페이우스를 독재자의 씨앗을 품은 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반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와 가까운 사이인 키케로가 먼저 찬성표를 던졌다.

  그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공화정의 안위를 생각하는 충신이기도 했다.

  "여러분, 냉정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기에서 거부권을 행사해 저 법안을 부결시킨다면 남은 건 폭동입니다. 로마 시민들 전체를 무력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에서는 폼페이우스를 밀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의원들은 속을 부글부글 끓일 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키케로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재무관을 역임한 자격으로 원로원에 새롭게 들어온 카이사르였다.

  "만약 폼페이우스 대신 이 작전을 맡고자 하는 의원이 계신다면 얼마든지 의견을 피력하면 됩니다. 아니면 이것보다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겠지요. 그렇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이걸 단순한 발목잡기로만 볼 겁니다. 그러면 그 뒷감당은 자연히 원로원이 할 수밖에 없겠지요?"

  원로원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원로원의 영수로 여겨지는 크라수스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원로원이 불안해하는 것은 폼페이우스가 저 임무를 완수한 뒤 너무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오. 그러니 그 부분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두면 모두의 걱정도 덜어질 거라 생각하오."

  "안전장치라면?"

  "폼페이우스는 모든 임무를 완수한 뒤 반드시 군단을 해산하고 원로원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맹세를 해주시오. 최고 제사장인 메텔루스 피우스의 입회하에 신들의 이름 앞에서 서약한다면 원로원 의원들도 충분히 이해하지 않겠소?"

  폼페이우스는 흔쾌히 크라수스의 절충안을 받아들였다.

  해적 소탕 작전을 완벽히 수행하면 어차피 그는 로마의 국민적 영웅이 될 게 뻔하다.

  군대를 해산하든 뭘 하든 원로원이 자신을 견제할 수단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는 모든 의원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선언했다.

  "나 폼페이우스가 모든 임무를 완수한 뒤에도 삿된 욕망으로 공화정에 해를 가한다면, 모든 신의 분노가 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이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반대를 한다면 도량이 좁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귀족파 의원들은 무력감을 곱씹으며 마지못해 찬성표를 던졌다.

  민회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로 가결된 법안이 원로원 의원들의 동의까지 얻었다.

  표면적으로나마 로마의 전 계층이 지지한 해적 소탕 작전이 가결되자 그 즉시 밀값이 폭락했다.

  물론 마르쿠스는 이미 모든 밀을 판매하고 예상대로의 이익을 얻은 뒤였다.

  이 정도의 재산을 쌓아놨다면 어느 정도의 돈을 풀어줘야 경제가 순환되는 법이다.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를 찾아가 예전에 한 약속대로 그의 군대에 막료로 받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르쿠스를 작전 내내 자신의 옆에 두고 가르침을 내려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마르쿠스는 감사의 의미로 사비를 들여 막대한 양의 장비를 보급해 주었다.

  거기에 전리품 배분을 조건으로 걸고 폼페이우스가 원하는 만큼의 군마를 준비해 주기로 했다.

  해적 소탕에 어째서 대량의 군마가 필요한지 의문을 표할 수도 있었으나,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의 속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기원전 60년대의 로마, 아니 지중해 세계의 흐름은 분명히 폼페이우스를 향하게 된다.

  마르쿠스는 그 흐름에 거리낌 없이 몸을 맡기기로 했다.

  ※※※※

  해적 소탕 준비가 착착 진행되자 로마에는 오랜만의 활기가 돌아왔다.

  아직 실질적인 작전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로마인들은 이미 해적들이 끝장난 것처럼 행동했다.

  그 정도로 폼페이우스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그런 민중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의 시대는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흐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모두가 폼페이우스야말로 앞으로 로마를 이끌어갈 위인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흐름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결단을 내렸다면 바로 추진하는 게 그의 특징이다.

  카이사르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르쿠스와 자리를 가졌다.

  "그래, 폼페이우스의 막료로 해적 소탕에 참여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그 전에 확답을 들어두는 게 좋겠군."

  "무슨 확답을······?"

  마르쿠스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이사르는 어쩐지 마주 받기 힘든 눈빛으로 마르쿠스를 직시하며 물었다.

  "자네, 따로 정해둔 혼처는 없다고 했었지?"

  마르쿠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하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다시 반문했다.

  "혼처라고 한다면···설마?"

  "그래. 슬슬 혼인할 생각이 있냐는 물음일세."

  "저기, 그것은···먼저 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로마법상 자식들의 권리는 전적으로 가장에게 예속되어 있다.

  혼례를 하는 것도 당연히 가장의 뜻에 따라야만 했다.

  그런데도 카이사르는 크라수스가 아닌 마르쿠스를 먼저 찾아왔다.

  그 정도로 마르쿠스의 위치를 높게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네가 원하지 않는 결혼이라면 자네의 아버지도 절대로 허락을 하지 않겠지. 그러니 먼저 자네의 의사를 물어보는 게 합당하지 않겠나."

  "그것은···그렇습니다만."

  "그러니 이렇게 물어보는 거라네. 참고로 율리아도 자네라면 더 바랄 게 없는 신랑감이라고 하더군. 나는 원래 폼페이우스와 자네 둘 중 한 명을 끝까지 저울질할 셈이었네. 그런데 딸은 아무래도 자네 쪽이 더 끌리는 모양일세."

  말문이 턱 막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많았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물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율리아는 날이 갈수록 그 외모만큼이나 지혜도 깊어지고 있었다.

  그런 재녀가 폼페이우스보다 자신을 택했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율리아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자네의 비범함을 꿰뚫어 보고 있으니까 그러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비범이라고 해도 너무 추상적이라 잘 와 닿지 않는군요. 게다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갑작스럽긴 해도 자네는 곧 원정을 떠날 몸이 아닌가. 앞으로 3년 이상을 로마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하면 지금 대답을 들어놔야 하지 않겠나."

  카이사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의 혼사라네. 내가 경솔하게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은 없지 않겠는가."

  "예. 그건 그렇겠지요."

  "게다가 나 역시 최근에 마음을 굳히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네.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나?"

  마르쿠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으나 입 밖으로 그걸 내뱉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짚이는 게 전혀 없군요."

  "그런가? 사실 이쪽도 추론에 불과할 뿐 확신하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확인도 구할 겸 내 입으로 직접 말하겠네."

  잠깐 말을 멈춘 카이사르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 몇 년 사이 일어난 밀값의 폭락과 폭등에서 꽤 짭짤한 이익을 보지 않았나?"

  "호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반문하는 마르쿠스의 표정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이건 내 추론이 아니라 딸아이의 추론일세. 그 아이가 자네와 최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더군."

  "예. 하지만 그녀에게 딱히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는데요."

  "그래서 그런 추론을 한 걸세. 자네는 아직 딸아이를 완전히 믿지 못해 중요한 화제는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피했다고 하던데.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라도 총명한 그 아이라면 뭔가 단서를 파악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겠지."

  "아, 그렇군요. 그런 이유에서였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놀라울 정도의 추리력이네요."

  마르쿠스는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카이사르의 말대로 밀에 관한 화제는 일부러 율리아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 전역을 들끓게 한 식량난은 대화의 화젯거리가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율리아는 마르쿠스가 의도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데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밀값의 폭락과 폭등에 자네가 관여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은 아닐세. 하지만 그걸 사전에 예측하고 뭔가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충분히 할 수 있지. 물론 밀을 가지고 이익을 취하면 엄청난 악명을 얻을 테니 최대한 비밀리에 하고 있을 것이고."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대상이라면 이는 터무니없는 추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정말로 그렇다면 시대를 통찰하는 자네의 안목은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뜻이 되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마르쿠스가 이내 다시 눈을 뜨고 물었다.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것 자체가 그쪽의 호의를 증명해주는 거라 판단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율리아는 자네에게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다네. 당연히 자신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그럼 이제 다시 대답을 들어보지. 내 제안을 승낙할 마음이 있는가?"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답은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사실 마르쿠스는 역사대로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킬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최대한 원래 역사대로 흐르는 게 그가 상황을 통제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는데 거절할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율리아라는 여인 자체가 굉장히 탐이 났다.

  결국.

  마음을 굳힌 마르쿠스가 답했다.

  "승낙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아버지와 카이사르 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겠지요."

  카이사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마르쿠스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님께 허락을 구하겠습니다. 따님을 제게 주신다면 신부로서 평생을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의도하고 온 자리였으나, 카이사르는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아무리 냉정한 정치인이라고 해도 그 역시 결국 한 명의 아버지였다.

  카이사르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마르쿠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와는 달리 정말 순수하고 여린 아이라네. 부디 행복하게 해주게나."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르쿠스의 대답을 들은 카이사르가 시원섭섭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딸에게 미안한 점이 참으로 많았다.

  태어났을 때도 같이 있어주지 못했고, 한창 자라나는 시기에도 옆을 지켜주지 못했다.

  게다가 이래저래 딸에게 눈총을 살 만한 일도 많이 했다.

  그래도 최고의 신랑감을 얻어줬으니 그나마 최소한 아버지로서의 도리는 한 듯한 느낌이었다.

  마르쿠스도 카이사르 이상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결혼이란 현대에서 그랬지만, 고대 로마에서도 무엇보다 신성하게 여겨지는 의식이다.

  두 번째 삶을 사는 마르쿠스였으나 결혼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설렜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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