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5. 명예와 실리 ──────────────── 폼페이우스는 반사적으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혔다.
이곳에 올 때 당연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크라수스가 마구잡이로 화를 내거나, 협박조로 구슬리거나, 심지어 사정할 때조차 대응할 말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맹세코 크라수스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에게 개선을 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했다는 건가? 대체 어째서? 무슨 목적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달라. 굳이 개선식을 해야겠다면 나보다는 폼페이우스가 적합할 거다. 뭐, 이런 식의 말에 가까웠으니까."
"그거야말로 더 이해가 안 되는데···자네 성격이라면 분명히 자신도 개선식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어야지. 그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아닌가."
폼페이우스가 지금까지 봐온 크라수스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할 성격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 끝끝내 손에 넣는다.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화신.
폼페이우스가 인식하고 있는 크라수스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크라수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폼페이우스를 앞에 두고 여유롭게 잔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짜증 섞인 눈빛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쪽이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야. 하지만 나는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고찰한 뒤 결론을 내렸네. 이게 가장 이득이 될 것 같았거든."
"이득? 개선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챙길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지?"
개선식은 로마인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의미 있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들뿐이었다.
개선장군은 4마리의 말이 모는 전차를 타고 로마 시내를 행진하고, 유피테르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
이 과정에서 시민과 군사들은 로마에 위대한 승리를 안겨준 지휘관을 찬양하고 환호를 보낸다.
전쟁으로 얻은 노획물을 시민들에게 선물 공세로 뿌리는 것도 개선식의 관례 중 하나였다.
당연히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이를 반겼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시민들에게 금전적인 이득까지 안겨주는 셈이다.
이 때문에 개선식의 파급력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개선식을 치렀다면 다음 해의 집정관 자리는 그냥 맡아놓은 거라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게다가 크라수스는 아직 개선식을 치른 경험이 없었다.
25세에 개선식을 치른 폼페이우스조차 두 번째의 개선식을 치르고 싶어 몸이 안달 난 상태였다.
하물며 인생 첫 개선식을 앞둔 크라수스가 이를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폼페이우스가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뭔가 좋지 않은 수를 꾸미고 있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믿을 수가 없어."
"믿든 말든 그건 그쪽의 자유지만 이쪽도 자네와 협상할 게 있으니 일단 솔직히 말해주도록 하지. 난 원로원에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이 없네."
"이번에 자네 전공이라면 충분히 개선식을 요구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게 무리한 요청이라는 거지?"
"요구할 수야 있지. 여론을 적절히 조성한다면 원로원이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원로원을 몰아세우면 괜한 적만 만들 우려가 있지 않겠나."
납득이 갈 듯 말 듯 한 이유였다. 폼페이우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로원과 척을 지기를 두려워한다고? 그 크라수스가? 언제부터 그렇게 소극적이 된 거지?"
"물론 나 하나만 놓고 보면 원로원이 뭐라고 떠들든 무시할 수 있어. 하지만 언젠가는 내 아들도 원로원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미래를 생각한다면 원로원과 너무 대립각을 세우면 안 될 것 같더군."
"아들?"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화제가 튀어나왔다.
5년 전 폼페이우스가 로마를 떠났을 때 크라수스의 아들들은 너무 어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크라수스가 자식 사랑이 엄청나게 극진한 부모는 아니라는 인상만큼은 확실히 있었다.
자연스레 폼페이우스의 입에서 반론이 튀어나왔다.
"자네가 그렇게 부성이 지극한 아버지는 아니었을 텐데?"
"아니었다가 정확한 표현이겠지. 그런데 자신보다 뛰어난 자식이 성장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전력을 다해 밀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뭔가. 자네도 나중에 자식이 성장하면 자연히 알게 될 걸?"
"자식이라······."
폼페이우스에게 부성이란 아직 미지의 감정이었다. 그래서 크라수스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히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협상안이라는 걸 들어봐야겠어. 그래야 자네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이 될 것 같군."
"얼마든지. 참고로 나는 개선식만 포기할 뿐이지 다른 것들을 양보할 마음은 없네. 약식 개선식(ovation) 정도는 해야 나도 체면이 살 테니까. 그리고 이 다음해 집정관 자리도 가져올 생각이고."
"그 정도야 뭐···어차피 집정관은 두 자리니 자네와 내가 선출되겠지. 이미 기정사실 아닌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이미 각각 수만에 달하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의 거의 대다수는 다음 선거에서 표를 던질 유권자이기도 했다.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들은 보통 부하들에게 이득이 될 법의 통과를 약속하고 몰표를 받았다.
크라수스는 술라가 정한 엄격한 규정을 모두 만족하니 집정관 후보에 올라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수석 법무관을 지냈기 때문에 집정관직에 출마하는 건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문제는 폼페이우스였다.
그는 집정관이 되기 위한 경력 따위는 하나도 거치지 않았다. 심지어 엄격하게 따지면 집정관은커녕 원로원 의원의 자격조차 없었다.
다만 현 로마에서 그에게 버금가는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원로원은 머리를 쥐어짜내 폼페이우스에게 전직 집정관이라는 자격을 부여해 임페리움을 주었다.
당연히 이 모든 과정은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폼페이우스는 다음 선거에서 자신이 집정관이 되는 걸 기정사실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크라수스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속이 뒤틀렸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일단 자네가 군단으로 무력시위를 한다면 원로원은 자네의 후보등록을 반대할 수 없겠지. 하지만 국정 운영은 어쩔 텐가? 원로원은 자네에게 그리 감정이 좋지 않을 텐데?"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즉, 자네가 안정적으로 집정관직을 수행하려면 내 조력이 필수라는 거지."
"그러면 더 이해가 안 가는데? 아쉬운 건 내 쪽인데 왜 자네가 양보하려는 거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게다가 조력이 필요한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일 거고."
폼페이우스도 크라수스와 타협을 할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부하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켜 주려면 집정관 두 명의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정관이 법안을 발의해도 다른 집정관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법안은 부결된다.
크라수스로서도 원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싶을 테니 두 사람의 전략적 제휴는 필수였다.
크라수스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 일단 서로 방해하지 말자는 공감대는 형성된 거라 봐도 되겠군. 내가 원하는 건 원로원의 신경을 거슬릴 일은 그쪽에서 맡아달라는 거라네. 자네는 원로원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아도 될 정도의 배짱과 실적이 있지 않나."
"아···이제 알겠어. 그러니까 실권은 잡고 싶은데 원로원에 밉보이긴 싫으시다? 그래서 개선식 같은 것도 다 양보할 테니 내가 미움받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거로군."
폼페이우스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러니저러니 구실을 가져다 붙여도 결국 원로원이 무섭다는 뜻이다.
그는 내심 크라수스의 유약함을 비웃었다.
아직 젊은 데다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은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두렵지 않았다.
원로원의 늙은 너구리들이 아무리 짖어봐야 실력으로 눌러버리면 그뿐이 아닌가.
'자식을 키우면서 아버지가 되더니 예전의 독기가 죽어버린 건가. 조금 실망인데.'
타협을 하거나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상대라면 되도록 자극하지 않는 게 좋다.
폼페이우스 역시 애송이 시절에는 술라의 밑에서 힘을 키웠으니까.
하지만 타협을 할 상대방을 고르는 데에서도 그릇의 크기가 드러나는 법이다.
폼페이우스는 술라 사후 로마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 따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는 자만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가 없었다면 레피두스의 난도, 세르토리우스의 반란도 이렇게 수월하게 제압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 로마는 폼페이우스를 필요로 한다. 이건 절대불변의 사실이었다.
고작 원로원과 척을 지기 싫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자는 경쟁상대로 여겨지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의 그릇은 결국 여기까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지. 대신 개선식과 내가 집정관 후보로 출마하는 건 확실히 밀어줘야 하네."
"걱정 말게. 난 로마의 그 누구보다도 계약을 확실하게 지키는 사람이니."
"그래. 그럼 자네의 용건은 다 끝난 것 같으니 내가 궁금했던 점을 한 가지 물어보겠네."
"······?"
예상외의 상황으로 조금 놀랐지만, 이제 대충 다 정리됐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꺼내놓았다.
"군의 기병 육성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물건을 자네가 만들었다고 하던데······."
"등자 말인가?"
"그걸 등자라고 하나? 대체 어떤 물건인가 싶어서 이쪽으로 오면서 기병들을 둘러봤네. 자네···그 물건의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만든 것인가?"
미심쩍어하는 폼페이우스의 시선에 크라수스가 코웃음을 쳤다.
폼페이우스는 아직 중무장 기병까지는 보지 못했다.
마르쿠스가 폼페이우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전부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중무장 기병은 크라수스 가문의 사비로 육성한 병종에 가깝다. 아직 로마군의 정식 편제에 끼워 넣을 마음은 없었다.
저번 회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어차피 소문만으로는 정확한 실체를 알기 어렵다.
기병에게 짓밟힌 상대방도 무장이 빈약한 반란군이니 그렇게까지 고평가를 할 사람은 아직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군사적으로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등자를 장착한 일반 기병들만을 보고도 그 가치를 바로 꿰뚫어보았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일까 싶어서 직접 봤더니 상상 이상의 물건이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크라수스가 저런 물건을 만들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크라수스는 그런 폼페이우스의 마음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얕보는 저 눈빛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나? 기존의 기병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 기마술을 익힐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이 물건을 쓴다면 그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지. 기병 전력이 극대화된다면 당연히 취할 수 있는 전술의 폭도 비교가 안 되게 넓어질 테고."
"역시 그 정도인가······."
교과서에 가까운 대답을 줄줄 늘어놓았지만, 폼페이우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의도하고 만든 게 아니었나.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었나 보군. 역시 내가 너무 과대평가했어. 그럴 리가 없지."
크라수스에 대한 평가는 수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앞으로의 정국, 등자를 활용한 기병 전력의 보강 구상.
신경 써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는 대충 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진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알지 못했다.
원래 거짓이란 일말의 진실을 섞어줘야 설득력을 가지는 법이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의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믿어버린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했다면 폼페이우스도 분명 의심을 했을 것이다.
마르쿠스가 말해준 그대로다.
돌아가는 폼페이우스를 바라보는 크라수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승리의 미소였다.
※※※※
폼페이우스의 서신을 받은 원로원은 발칵 뒤집혔다.
폼페이우스가 요구한 사안을 검토하기 위해 곧장 원로원이 소집됐다.
당연히 대다수 의원들은 맹렬한 기세로 폼페이우스를 성토했다.
"개선식을 열어달라는 것까지는 괜찮소. 그런데 집정관 후보로 등록하는 걸 허락해달라니? 폼페이우스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집정관 후보가 된다는 말이오. 그는 법무관은커녕 안찰관이나 재무관조차 역임한 적이 없지 않소!"
"절대 안 될 말입니다! 술라께서 원로원의 자격을 한층 더 엄격하게 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흔들리던 연공서열을 재정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특례를 허용한다면 소수 지도 체제는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옳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은 고사하고 법무관이 될 나이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현 로마법에서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우선 재무관이 되어야 한다. 자격 연령은 30세 이상. 그보다 어리다면 입후보조차 할 수 없다. 그 뒤에 39살이 되면 법무관 후보로 등록할 자격을 얻고, 여기에서 법무관으로 선출된 자만이 집정관 후보가 될 자격을 갖게 된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의원들의 지적대로 재무관조차 역임한 적이 없었다.
이미 20대에 임페리움을 부여받고 군단을 지휘했으니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이미 이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 특례였다.
"한니발을 무찌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조차 이런 말도 안 되는 특혜를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폼페이우스가 공을 세운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아프리카누스만큼의 공을 세웠습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법무관 후보로 등록하는 선에서 타협을 봐야 합니다. 단 한 번도 관직에 오른 적이 없는 자가 곧바로 집정관을 역임한다니요. 이런 선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의원들은 이 공화정 체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키케로는 조금 달랐다.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신중을 기하자는 의견을 냈다.
"폼페이우스의 요구가 과한 건 맞습니다다. 하지만 이쪽에서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원로원은 그를 전직 집정관이라는 자격으로 히스파니아 속주에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법률상 전직 집정관은 당연히 집정관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재선되려면 10년의 기간이 필요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실질적으로 집정관을 지낸 적은 없습니다. 즉, 재선 규정으로도 그의 출마를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가 전직 집정관인 자신을 어째서 후보로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따지고 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그 나이가 안 되는 사람에게 전직 집정관이라는 명함과 임페리움을 수여한 건 원로원입니다. 이제 와서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해버리면 원로원의 위신에 손상이 갑니다."
"허어······."
누구도 키케로의 말에 마땅한 반론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모두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폼페이우스가 이끌고 있는 군단 역시 어마어마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로마의 장군이라면 임무가 끝나자마자 마땅히 군대를 해산하고 일개 시민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원로원이 자신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진을 치고 대기했다.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신경을 거스른다면 그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미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전례가 있기 때문에 결코 과한 걱정이 아니었다.
게다가 군대를 이끌고 있는 건 폼페이우스만이 아니다.
크라수스 역시 거의 손실이 없는 8개 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원로원은 크라수스 역시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무력시위를 하며 개선식과 집정관 출마를 요구할 거라고 확신했다.
크라수스의 경우 집정관 자격은 있으니 후보 등록은 기꺼이 해줄 수 있었다. 다만 이쪽은 개선식이 문제였다.
개선식은 위대한 승리를 거둔 장군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다.
크라수스에게 개선식을 허락한다는 것은 노예들 따위를 로마의 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로마의 자존심과 원로원의 체면을 고려하면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됐다.
폼페이우스가 반란군의 잔당을 마무리하기도 했으니, 그냥 폼페이우스에게 군공을 몰아서 개선식을 한번만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크릭수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
단순히 노예들의 반항이라고 둘러대기엔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남부의 동맹시 중에는 크라수스를 영웅이라 칭송하는 곳마저 나올 정도였다.
여론을 등에 업고 크라수스가 개선식을 요구한다면 원로원은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런 원로원의 고민은 크라수스의 서신이 도착하자마자 깔끔하게 해결됐다.
집정관 루키우스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크라수스가 보낸 보고서를 낭독했다.
"···해서, 크라수스는 원로원의 위엄을 실추시키고 싶지 않으니 개선식을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그냥 집정관 후보로 등록만 해준다면 만족하겠다고 하는군요.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이 되어서 폭주하지 않도록 자신이 견제하겠으니 믿어달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거기에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진격한다면 자신이 막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전은 일어나서는 안 되니 폼페이우스의 의견을 들어주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긴 합니다. 어차피 폼페이우스가 과한 행동을 하면 자신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확실히 약속하고 있고요. 군대는 폼페이우스가 해산하는 즉시 자신도 해산하겠다는 걸 유피테르 신의 이름에 맹세했습니다.
"
"크라수스가 이토록 원로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한 노의원이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라수스는 술라께서 제정한 명예로운 경력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따르며 올라온 의원입니다. 특혜만 찾는 폼페이우스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공화정의 아들이에요."
"크라수스가 실질적으로 바라는 건 집정관 후보 등록 하나입니까?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의문이 들 정도군요."
"허허, 오히려 이런 자세야말로 본래 원로원 의원이 지녀야 할 미덕이 아니었습니까. 지금까지가 미쳐 돌아갔던 것이지 크라수스가 지극히 정상인 겁니다."
푸블리니콜라의 지적에 모든 의원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로운 로마 시민이라면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게 당연하다. 자연히 그들의 머릿속에는 폼페이우스가 이상한 자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개선식을 세우기에 충분한 공을 세웠음에도 크라수스는 로마의 위신을 생각해 개선식을 포기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어떤가.
자신의 명성과 공을 위해 다른 이의 전쟁에 끼어드는 속 좁은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거기에 무력으로 원로원을 압박하며 있어서는 안 되는 특혜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폼페이우스의 오만방자한 모습과 대비돼 크라수스의 겸손한 태도가 한층 더 두드러졌다.
상황은 마르쿠스가 말한 그대로 착착 흘러갔다.
크라수스가 원로원과 척을 지기 싫다고 한 것은 분명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노림수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크라수스야말로 공화정의 수호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진정한 노림수였다.
그것을 위해 마르쿠스와 크라수스는 원로원이 걱정하는 문제를 사전에 전부 해결해주었다.
크라수스가 집정관을 마치고 부임할 속주도 전부 원로원이 정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천명했다.
거기에 이번 전쟁의 공로도 임페리움을 부여해준 원로원의 덕이 크다는 걸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렇게나 원로원의 체면을 세워주니 의원들이 흡족하지 않을 수가 없다.
"폼페이우스 같은 애송이가 날뛴다고 너무 걱정할 것 없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크라수스 같은 충실한 동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힘을 실어줘도 능히 폼페이우스를 견제할 수 있을 겁니다."
"암요. 하하하, 최근 걱정으로 잠을 설쳤는데 이제야 푹 잘 수 있겠어요."
원로원은 독재자의 싹이 보이는 인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철저하게 견제한다.
영웅 스키피오조차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두려워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탄핵당한 바 있다.
카이사르 역시 암살당한다.
성공적으로 원로원을 무력화시킨 사람은 미래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외에는 없었다.
마르쿠스는 이 옥타비아누스의 방식을 참고해 계획을 짰다.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냥감을 살피기만 하는 산중의 늑대 무리는 하늘을 둘러싼 구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들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 어떤 수도 쓸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마르쿠스의 그림자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원로원 한구석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