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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크릭수스 (지도 첨부) (22/326)

  # 22 21. 크릭수스 (지도 첨부)

  ──────────────── 회전에서 대패한 반란군은 크릭수스의 지휘 덕분에 간신히 삼분의 일에 가까운 인원이 살아남았다.

  말이 삼분의 일이지 전투 한 번에 사망자가 5만이 넘게 나온 것이다.

  "이 정도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크릭수스의 목소리에는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그렇게나 전투를 원하던 부하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승리를 자신하던 이들 중 태반은 지금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크릭수스는 그들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만용의 대가는 목숨으로 치렀으니 그들은 나름의 책임을 진 것이다.

  "이제 로마의 영역 내에서 그들과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

  "···죄송합니다."

  "다 저희 때문에······."

  반란군 지휘관들은 악몽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수적으로 절대적인 우위가 있었고, 군의 사기도 적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중앙이 뚫리더니 군대가 분단되고, 좌익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포위된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괴물 같은 기병들에게 유린당한 것만이 아니라 보병들의 기본적인 전투력부터 차이가 크게 났다.

  그들은 깨달았다.

  저것이 원래 로마군의 모습이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질서정연함. 그 속에 내포된 흉포한 공격성과 살의.

  잘 훈련된 군대일수록 이 상반된 두 가지 요소를 융화해 폭발력을 극대화한다.

  "로마군의 명성은 헛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처음 우리와 싸울 때는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

  "바보같이 승리에 눈이 멀어서······."

  몇몇 지휘관들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선택에 대한 회한과 죽어간 동료들을 향한 사죄의 눈물이었다.

  아직 전투원만 해도 4만에 가까운 인원이 남긴 했으나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다.

  회전의 결과가 퍼져나가자 매일 같이 이어지던 노예들의 합류가 뚝 끊겼다.

  거기에 강제로 찍어 눌러 놓았던 남부의 마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다행히 탈영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크릭수스는 이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라 판단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최후의 결전을 해보기도 전에 내부에서 자멸한다.

  "대장···어떻게 해야······."

  "계획했던 그대로. 시칠리아로 넘어가자."

  "예, 예. 알겠습니다!"

  크릭수스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대장이 아직 절망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지휘관들의 눈에 미약한 희망이 다시 피어났다.

  아슈레가 재빨리 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한 줄기 선을 그렸다.

  "이미 사전에 접선한 해적들이 배를 준비 중입니다. 최단 거리로 가면 늦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인원수가 많이 줄은 탓에 필요한 배의 숫자도 대폭 감소했다.

  전체적인 부대의 이동속도도 빨라졌으니 로마군보다 빠르게 해안가로 도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성공적으로 배만 구할 수 있다면 시칠리아에서 재기하는 것도 그저 꿈은 아니리라.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시간이다. 즉, 결정을 내렸다면 바로 움직여야 한다.

  크릭수스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섰다.

  지휘관들이 허둥지둥 무기를 챙기고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도주하기 직전 마지막에 보았던 스파르타쿠스의 존재다.

  크릭수스는 반란군의 병력배치가 적에게 읽힌 원인이 스파르타쿠스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거의 다 스파르타쿠스에게서 나온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크릭수스가 스파르타쿠스를 잘 알고 있듯, 스파르타쿠스도 크릭수스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을 터.

  그렇다면 시칠리아아로 도주하겠다는 계획마저 이미 간파당했을 가능성이 생긴다.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의심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도주계획을 아예 백지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잔존병력을 수습해 해안가로 향하는 크릭수스의 얼굴에 짙은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

  크릭수스의 우려는 정확히 맞아들었다.

  스파르타쿠스에게 크릭수스의 예상 도주 경로를 전해 들은 크라수스는 회전이 끝나자마자 지휘관을 급파했다.

  반란군이 시칠리아로 건너갈 방법은 해적의 도움을 받는 것뿐이다.

  백인대장 루키우스는 크라수스의 명령대로 해적들과 접촉했다.

  반란군과 접촉한 해적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우였다. 돈을 조금 쥐어주니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술술 열었기 때문이다.

  반란군에게 배를 대주겠다고 약속한 선장들을 불러 모은 루키우스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반란군을 지정된 장소로 호출하되 배는 빌려주지 마시오."

  "지금 우리보고 계약을 어기라는 것인가?"

  "그렇소. 반란군은 로마의 적이오. 그들을 도와준다는 것은 곧 당신들도 로마의 적이 된다는 뜻이지."

  "하! 로마가 무서운 놈이 지금까지 해적질을 어떻게 해. 그리고 여기에서 못할 것 같으면 그리스 쪽으로 튀면 그만이지. 거기도 요새 벌이가 좋다더만."

  해적들은 킬킬 웃으며 루키우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산적이라면 모를까 이 시대의 해적들은 로마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중해를 내해라고 부르는 장대함과는 달리 로마는 지중해의 해적들을 제대로 뿌리 뽑지 못했다.

  그리스로 유학 가는 귀족들조차 해적들에게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는 게 예사일 정도였다.

  물론 해적들도 로마가 작정하고 쫓으면 골치 아프니 일정 이상의 선은 절대 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안전을 아슬아슬하게 확보하는 선에서 더 큰 이득을 추구한다.

  루키우스도, 그를 보낸 크라수스도 애초에 단순한 협박만으로 그들을 따르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적들을 어르는 데는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필요한 법.

  루키우스가 미소를 지으며 간이로 만든 탁자 위에 계약서를 올려놓았다.

  "반란군이 약속했던 보수는 우리 로마가 챙겨주겠소. 그러니 우리와 거래를 합시다."

  "허, 허허."

  "돈을 주겠다고?"

  해적들의 반응이 극적으로 변했다. 선장 중 몇몇은 대놓고 혹하는 반응을 보였다.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자 수염이 덥수룩한 외눈의 해적이 탁자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지금 우리에게 먼저 맺은 협정을 파기하라 이 말인가?"

  "그렇소."

  "하! 웃기는 소리."

  외눈의 해적은 해적들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꾀가 있다고 알려진 자였다. 다른 선장들도 이런 자리에서는 보통 그의 의견을 따랐다.

  루키우스는 당황하지 않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협상할 상대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면 오히려 더 편하다.

  "어째서 웃기는 소리라는 거요?"

  "우리가 해적이라고 해도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살고 있다. 아예 규칙이 없다면 조직을 운영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우리도 돈을 받고 한 약속은 어기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지키는 최소한의 신뢰······."

  "1.5배."

  사위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섣부른 선장 중 한명이 덜컥 알겠다는 답을 하려 하자 외눈 해적이 목소리를 높였다.

  "해적이라고 다 돈으로 매수가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우리를 우롱······."

  "2배. 이걸로 안 된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으니 물러가겠소."

  원래부터 있지도 않았던 신뢰를 찾기엔 너무나 많은 돈이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은화의 영롱한 빛깔에 해적들의 눈이 뒤집혔다. 외눈 해적은 일어서려는 루키우스를 만류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흠, 뭐 원칙이 그렇다고 하는 것이외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고, 하지만 또 이런 게 소문이 나면 우리 평판에 악영향이 미칠 수도 있는 법이고."

  중언부언하던 외눈 해적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그쪽의 요구는 못 들은 거로 하겠소이다."

  그는 말과는 달리 루키우스가 꺼낸 계약서를 넙죽 받아 품속에 갈무리했다.

  루키우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할 그가 아니다.

  크라수스에게 사전에 3배까지 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2배만으로 해결을 봤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루키우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가금을 준다고 해도 먼저 맺은 계약을 지키려는 태도는 해적임에도 훌륭하군. 아쉽지만 나는 돌아가 봐야겠소."

  "흠흠, 배웅은 안 나가리다. 로마와 우리들은 만난 적도 없고, 뒷거래한 적도 없는 것이오."

  해적들도 씨익 웃으며 마주 일어났다.

  회담이 결렬된 게 아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만난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면의 계약과 함께 반란군은 마지막 탈출구마저 잃고 말았다.

  ※※※※

  크라수스는 해적들의 매수가 성공했을 때 내심 반란군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해적들은 파도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크릭수스가 지정한 해안가가 아니라 로마군이 진을 친 장소로 반란군을 유도했다.

  안 그래도 계획 노출을 우려하고 있던 크릭수스는 여기에서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5천의 선발대를 먼저 보내고 본대는 상당한 거리를 둔 채 따라갔다.

  결과적으로 이 판단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선발대는 로마군의 함정에 걸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다.

  크릭수스는 곧바로 부대의 방향을 틀어 시칠리아로 넘어갈 수 있는 레기움이 아닌 동쪽의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크라수스는 군단을 몰아 반란군의 뒤를 쫓았다.

  "이제 반란군은 독 안에 든 쥐다! 놈들에게 지금까지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자!"

  "와아아아!"

  회전의 승리로 사기가 오른 로마군은 이전의 위용을 완벽히 되찾았다.

  반란군이 유일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던 수적 우위도 이미 뒤집힌 지 오래였다.

  로마군은 현재 5만이 넘는 수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반란군의 전투 인원은 이제 3만이 채 되지 않았다.

  거듭되는 패배와 좌절에 탈영병이 속출했고, 정식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자들까지 나왔다.

  크릭수스는 이들을 모두 보내주었다.

  상식적으로 도망쳐봐야 그들이 갈 곳은 없었지만, 시시각각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싸울 의지가 사라진 이들은 모두 떠났다.

  바꿔 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항전할 이가 아직 3만이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크릭수스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맙다. 못난 대장을 믿고 여기까지 잘 따라와 주었다."

  타란토만 서쪽에 위치한 메타폰툼에서 로마군에게 따라잡혔을 때, 크릭수스는 이곳이 마지막이 되리라 직감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앞으로 닥칠 운명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여기서 계속 도망가는 건 이제 무리다. 브룬디시움까지는 탁 트인 평야 지대가 너무 많아 적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요행을 바라며 계속 동쪽으로 전진하다가 로마 기병의 말발굽에 짓밟힐 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삶을 불태울 것인가."

  "대장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목숨을 걸고 따르겠습니다."

  병사들은 누구 하나 도망가자는 의견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남은 자들 중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길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만심에 취해 평원에서 전투를 벌이자고 목소리를 높였을 때와는 다르다.

  허황된 자신감이 아닌 초연한 의지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부하들의 결의를 확인한 크릭수스는 부대를 이끌고 야트막한 구릉에 진을 쳤다.

  물론 이곳에 한 번 올라간다면 이제 두 번 다시는 내려올 수 없다.

  로마군은 그저 반란군이 더 버티지 못할 때까지 구릉 지대를 포위만 하고 있으면 된다.

  크릭수스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위로 올라갔다.

  그가 딱히 높은 장소를 좋아하는 바보라서가 아니었다.

  로마군의 괴물 같은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서는 숲이 우거진 곳에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구릉의 입구는 숲이 우거져 기병이 진입하기 쉽지 않았다.

  아무리 지더라도 최소한 싸움다운 싸움은 해보고 죽으리라.

  그것이 크릭수스가 품은 각오이자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반란군이 구릉 위로 올라간 걸 확인한 로마군은 예상대로 곧장 주변을 둘러싸고 진을 쳤다.

  공병들이 숲의 흙과 목재를 이용해 시설을 쌓아 올리더니 순식간에 그럴싸한 진지가 완성됐다.

  그들은 반란군을 얕보지 않고 철저하게 규정에 맞춰서 진지를 지었다.

  매복을 당하지 않도록 숲과는 약간 거리를 두었고, 방어시설도 제대로 갖춰놓았다.

  크릭수스는 높은 곳에서 로마의 진지를 내려다보며 솔직하게 감탄했다. 군대의 기본적인 역량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이 됐다.

  저 아래에서 웅장하게 펄럭이고 있는 로마군의 깃발을 보니, 도리어 마음 한 구석이 후련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절대로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저 강대한 자들도 천년만년 계속 군림하고 있지는 못할 터.

  저 깃발을 꺾는 자는 굳이 자신이 되지 않아도 충분하다.

  역사에 회자 될 자유를 향한 갈망.

  그런 무언가를 남기고 떠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등을 펴고 자신이 믿는 길을 걸어갈 뿐이다.

  로마를 향한 분노를 집약하는 상징에서 다시 한 명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크릭수스가 몸을 움직였다.

  단신으로 숲을 내려온 그가, 저 멀리서 보초를 서고 있는 로마군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수만의 대군이 늘어선 진지를 향하는 그의 마음에는 한 줌의 격동도 없었다.

  도리어 그를 발견한 로마 진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멈춰라!"

  "웬 놈이냐!"

  보초를 서는 군사들이 일제히 창과 활을 겨누었다.

  제 자리에 멈춰 선 크릭수스는 태연스레 입을 열었다.

  "해방군의 총지휘를 맡고 있는 크릭수스다. 전투에 앞서 로마군의 지휘관과 대면을 원한다. 나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호위는 얼마든지 데리고 나와도 좋다."

  이 황당한 보고는 곧장 크라수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냥 병사들에게 명령해 활시위를 당기기만 해도 크릭수스는 죽을 테지만, 크라수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신으로 적진까지 와서 대면을 청한 상대를 죽이는 건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다.

  그는 믿을만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직접 진지 앞으로 가기로 했다.

  "저와 스파르타쿠스도 함께 가겠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마르쿠스가 숨을 헐떡이며 부탁했다. 스파르타쿠스도 고개를 숙이며 함께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지금까지 세운 공을 인정한 크라수스는 두 사람의 동행을 허락했다.

  그는 중무장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크릭수스는 자신이 기다리겠다고 선언한 장소에서 눈을 감은 채 여전히 홀로 서 있었다.

  "네가 반란의 수괴인 크릭수스인가?"

  크라수스는 해방군이라는 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에게 있어서 그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반란을 일으킨 역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내가 크릭수스다."

  크릭수스는 로마의 총사령관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이름을 밝혔다.

  당당함으로 가득한 그 시선이 마르쿠스의 옆에 선 스파르타쿠스를 한 차례 향했다. 이내 다시 시선을 돌린 그에게 크라수스가 물었다.

  "그래, 어째서 나를 보자고 했지? 미리 말해두지만, 너희에게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다."

  "구차하게 삶을 이어나갈 생각은 없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저항하고, 또 저항할 것이다. 간단히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간단할지 어려울지는 그때가 되면 알겠지. 그런데 협상을 할 게 아니라면 어째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나를 부른 거냐."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의 목숨을 가져갈 로마의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주변을 둘러본 크릭수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너희들은 이제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당당하게 맞선 이 크릭수스라는 이름을."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도 그 입가에는 한줄기 미소마저 감돈다.

  마르쿠스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스파르타쿠스에 이어서 저 사내마저 밑으로 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어 차오르는 미련을 떨쳐냈다.

  크라수스 역시 크릭수스가 잠깐 탐이 난다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혀를 차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 사내로구나. 로마인이었다면 누구보다 훌륭한 병사가 되었을 것을."

  "나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로마인만큼은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 용맹함만을 간직한 채 죽어라. 바람대로 너의 장렬한 최후만큼은 내가 끝까지 기억해주도록 하마."

  크라수스는 이제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진지로 돌아가려는 그의 귀에 스파르타쿠스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님. 부디 제게 이자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뭐, 괜찮겠지. 네가 원한다면 마음껏 밀린 이야기를 나누어라. 곧 죽을 적장에게 이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 줘도 상관없을 테니."

  크라수스는 마르쿠스와 스파르타쿠스만을 남긴 채 부하들과 함께 진지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저 멀리서 활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은 물리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스파르타쿠스가 크릭수스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마침내 스파르타쿠스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군."

  "그럴만한 일들을 겪었으니까."

  "나를 원망하지는 않나?"

  "자네는 자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그걸 원망하거나 내 부족함을 자네의 탓으로 돌릴 마음은 없네."

  크릭수스의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옛 친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사실 여기에 온 이유도 혹시 자네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라네. 나와 친한 모습을 보이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나는 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니 그럴 일은 걱정할 필요 없네."

  "그래? 그건 잘 됐군. 그럼 이제 걸리는 건 단 한 가지밖에 없겠어."

  부드럽던 크릭수스의 어조가 돌연 급변했다.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 스파르타쿠스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물론, 뒤에 물러나 있던 마르쿠스까지 흠칫 몸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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