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20. 회전 ──────────────── 반란군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놀란 건 오히려 로마군 쪽이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기습에 대비해 온갖 주의를 기울이며 나아가고 있는데, 저들이 먼저 평야로 나와 버린 것이다.
크라수스는 처음에는 적에게 모종의 계략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의외로 스파르타쿠스가 그렇지 않을 거라는 의견을 냈다.
"크릭수스는 신중한 자입니다. 아마 철저하게 전투를 피하면서 우리가 초조해졌을 때를 노리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평원에 나와 일전을 벌이려 하는 걸 봐서는 부하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그럴 수도 있겠군. 저들은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고, 통일된 집단도 아니니까."
원래 부대라는 건 규모가 커지면 통솔하기 힘들다.
하물며 대부분이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하층민과 노예 출신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크릭수스를 잘 알고 있는 스파르타쿠스는 반란군의 움직임만으로도 수많은 사실을 읽어냈다.
"언뜻 보면 일대 결전을 벌이려 하는 듯하지만, 저들이 진을 친 평야는 패색이 짙으면 도주하기 용이한 곳입니다. 만약 저들이 숲으로 도망가 버린다면 저희도 추적이 쉽지는 않겠지요. 이게 크릭수스가 그은 최대한의 절충선일 겁니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추론이군."
크라수스는 내심 스파르타쿠스를 데려온 마르쿠스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병력의 질도 이쪽이 압도적인데 적장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필승이다.
그는 정교하게 그려진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만약 저들이 패배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지?"
"패배한다면 적어도 반도 내에서는 이전만큼의 세력을 규합하기 힘들 테니···제가 크릭수스의 상황이라면 시칠리아로 도망갈 것 같습니다. 재기를 꾀한다면 그곳이 가장 적합할 테니까요."
"그렇군. 시칠리아의 대농장에는 노예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곳이라면 세력을 재건하기에 딱 좋을지도 모르겠어."
적의 다음 수를 미리 짐작할 수 있다면 이쪽의 행동도 훨씬 편해진다.
크라수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부하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사실 마음이 급한 쪽은 반란군이 아니라 크라수스였다.
처음에는 급할 게 없다고 판단해 천천히 행군했지만, 히스파니아에서 들려온 소식이 모든 상황을 뒤집었다.
끈질기게 버티던 세르토리우스가 부하에게 암살당해 반란이 한순간에 평정되어 버린 것이다.
히스파니아에 파견된 폼페이우스는 곧바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목적은 안 봐도 뻔하다.
크릭수스의 반란을 자신이 진압하고 군공을 독식하려는 속셈이다.
폼페이우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크라수스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로마 역사상 한 손에 꼽힐지도 모른다.
킴브리 전쟁, 동맹시 전쟁,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평정한 술라마저 그를 군사의 천재라 극찬했다.
그런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귀환한다면 반란군은 끝장이다.
크라수스가 뭘 해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군이 제 발로 평원으로 걸어 나와 준 것은 크라수스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진을 친 저 너머에 보이는 반란군의 깃발이 이토록 반갑게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르쿠스도 크라수스의 곁에서 그 엄청난 광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엄청나게 많네요."
"그래. 우리 군의 두 배 가까이 되어 보이는구나."
"오히려 다행이네요. 이로써 저들이 뭔가 꾸미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게 확실시 되었으니까요. 정말로 거의 모든 전력을 여기에 투입했다고 봐야겠어요."
멀리서 언뜻 봐도 적들의 무장이나 복장은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다.
깃발도 로마군에게서 빼앗은 걸 적당히 고쳐서 쓰고 있는지 조잡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든 로마의 지휘관들이 적들을 얕잡아 보다가 패배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는 군대의 사소한 배치까지도 일일이 신경을 썼다.
이것도 스파르타쿠스의 의견이 큰 도움이 됐다.
"로마군은 전통적으로 중무장 보병을 전면에 배치하고 기병으로 측면을 강타하는 전술을 즐겨 씁니다. 만약 제가 크릭수스의 입장이라면 기병에게 공격당할 게 확실한 측면에 장창병을 집중적으로 배치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수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도록 넓게 산개해서 적을 포위하겠습니다."
반란군은 얻을 수 있는 무기가 한정되어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그리 넓지 않다.
초기 배치가 틀어진다면 이를 수습하기가 굉장히 곤란하다는 뜻이다.
크라수스는 넓게 펼쳐진 반란군의 진형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흥분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전에 예상했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는 스파르타쿠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솔직하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이번에 대승을 거둔다면 네 덕이다. 공은 잊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침내 양군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하며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크라수스의 검 끝이 다가오는 반란군을 겨누었다.
"로마의 장병들이여, 적들을 유린하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마의 8개 군단이 앞으로 돌진했다.
"와아아아아!"
"반란의 무리를 모조리 쓸어버리자!"
두 배에 달하는 병력 차에도 로마군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질주하는 말발굽에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가 격전의 서막을 알렸다.
반란군도 피하지 않았다. 잇따른 승리에 자신감이 충만한 그들도 정면으로 맞부딪쳐왔다. 그동안 로마에 억눌린 모든 울분이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로마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자!"
"싸우자, 여기에서 이긴다면 로마는 우리의 것이다!"
"우와아아아!"
양측의 병사들이 일제히 횡렬로 넓게 퍼져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중앙은 처음에 외치던 함성이 무색하게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대기했다.
반대로 로마의 기병들은 일부러 적의 예측대로 측면에서 일제히 말을 내달렸다.
"기병들이 온다! 장창을 앞에 세우고 적의 돌진을 막아라!"
측면의 지휘를 맡은 지휘관이 기세 좋게 목청을 높였다. 적이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그는 승리를 자신했다.
반란군은 그들 나름의 전략을 세워둔 상태였다.
넓게 퍼져 있다가 한꺼번에 적을 포위해 섬멸한다는 이상적이면서도 강력한 계획이었다.
적이 가만히 당해줄 리는 없겠지만, 이쪽은 적보다 수가 두 배나 더 많다.
측면에서 기병의 접근을 견제하고 중앙에서 수의 우위로 찍어 누르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적 기병의 대다수는 측면을 파고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예상이 적중했던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기병들은 반란군의 측면에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그들은 돌격 대신 활을 꺼내 중장거리에서 견제사격을 날렸다.
피잉! 퍼버버벅!
"커헉!"
"이, 이놈들 활을 쏜다! 크악!"
이전의 로마군과 달리 지금의 로마군은 전원 등자를 장착한 기병을 운용했다.
덕분에 로마의 경기병들은 기동성이 느린 반란군의 측면을 우롱하듯 철저히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활 세례를 쏟아 부었다.
기병 전력이 거의 없는 반란군으로서는 눈 뜨고 맞아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대응이 없었다.
"방패, 방패병을 앞으로 내보내! 저 기병들은 활을 쏜다!"
측면의 장창병들이 속절없이 쓰러지는 가운데 뒤늦게 도착한 방패병들이 커다란 방패로 정면과 상단을 가렸다. 이걸로 화살 세례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지만, 측면의 이동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며 대열에 균열이 생겼다.
정면도 상황이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돌격하는 척 했던 로마군은 미리 설치해둔 스콜피오를 집중적으로 발사해 반란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스콜피오란 공성 병기인 발리스타를 야전용으로 개량한 것으로 로마군을 대표하는 무기 중 하나다.
이 대인용의 거대한 석궁은 사거리가 400m에 달했으며 분당 3발에서 4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한 군단에 대략 60기가 배치되어 있으니 지금 평원에는 도합 480기의 스콜피오가 있는 셈이다.
반란군의 조악한 장비로는 이 스콜피오의 화살을 절대로 막을 수 없었다.
끼리리릭! 퍼억!
"으아악!"
스콜피오의 꼬인 밧줄 뭉치가 풀려나갈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반란군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란군의 방패로 막을 수 있는 화력을 아득히 넘어섰다.
용감하게 돌진하던 반란군 수십 명이 커다란 화살에 꼬챙이가 되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앞으로 돌진해! 더욱 빨리 접근하면 저 무기는 더 쏘지 못한다!"
지휘관 중 누군가가 외친 소리에 반응한 중앙의 반란군이 달리는 발걸음에 한층 힘을 더했다.
측면은 궁기병의 화살 세례를 막느라 멈춰 섰고, 중앙은 스콜피오의 발사를 저지하기 위해 대열이 흐트러졌다.
크라수스는 바로 이때를 노렸다.
"중무장 기병을 내보내라!"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를 참고한 로마의 중무장 기병 200기가 중앙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의 목적은 처음부터 측면 돌파가 아니었다.
측면 돌파를 할 것처럼 위장해 장창병들을 좌우에 몰아넣고, 단숨에 중앙을 돌파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기수들은 물론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중무장 기병의 위용에 반란군들은 경악했다.
자신들이 이전에 로마와 싸웠을 때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자들이었던 까닭이다.
"뭐, 뭐야! 저런 놈들은 없었잖아!"
"로마의 기병은 측면으로 올 거라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하지 마라! 로마 놈들의 쇠뇌는 멈췄다! 모두 뭉쳐서 단단히 밀집 대형을 취하면 저런 소수의 기병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두 사전에 훈련받은 대로 해라!"
반란군의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일순간 혼란에 빠진 중앙군을 수습했다.
아직 절대적인 수적 우위에 있다는 걸 잊지 않은 반란군은 빠르게 혼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중앙의 반란군들이 대열을 형성했을 때는 이미 로마의 중무장 기병들이 그들의 코앞까지 도달한 뒤였다.
저 멀리에서 전속력으로 뛰어온 말들은 이미 극한까지 가속도가 붙은 상태였다.
거기에 카우치드 랜스와 등자를 사용해 말과 기수의 운동 에너지를 그대로 적병에게 투사하는 게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파괴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반란군들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방패를 든 채 적의 기병들이 비껴가기를 기다리는 그들의 위에 재앙과도 같은 일격이 퍼부어졌다.
콰아아앙! 콰자자자작!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반란군 보병들의 몸이 짓이겨졌다.
기병들을 따라 달려오던 로마군 보병들조차 경악할만한 파괴력이었다.
"으, 으아아악!"
"살려줘!"
공포에 찬 절규는 창에 찔린 병사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중무장 기병들의 돌격에 휘말린 반란군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반란군 보병들은 로마군에 대한 증오심마저 잊은 채 공포에 떨었다.
"마, 막아!"
지휘관 가운데 누군가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게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됐다.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오는 창에 지휘관을 포함한 보병 네 명이 한꺼번에 꼬챙이처럼 꿰뚫렸다.
일당백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정도로 용맹함을 이르는 말이다.
숫자로는 고작 200기에 불과했지만, 중무장 기병의 파괴력은 능히 일당백이라 칭할만했다.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의 사기다.
사기가 한 번 꺾인 군대는 어지간해서는 다시 전의를 다지지 못한다.
그리고 싸울 마음을 잃어버린 자들은 전장에서 순식간에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된다.
"으아아악! 도망가!"
"저런 괴물들이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송곳처럼 뭉쳐서 내달리는 기병들이 지나갈 때마다 반란군들의 비명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정통으로 충돌한 이들은 오히려 운이 좋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으니 그나마 행복한 결말이다.
어정쩡하게 돌격에 휩쓸린 자들은 뼈가 부러지고, 말발굽에 밟혀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이 시대의 보병전력으로는 애초에 막는 게 불가능한 돌격이다.
설령 로마라고 해도 이는 별다르지 않다.
아예 접근하지도 못하도록 사전에 봉쇄한다면 모를까, 일단 거리를 허용한다면 그 누구라도 이런 꼴을 면치 못하리라.
하물며 상대적으로 무장이 빈약한 반란군들은 그저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전무했다.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마르쿠스도 혀를 내둘렀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위력적인데?'
원래 작전은 중장기병으로 적을 휘젓고 이후 보병들과 유기적으로 연계해 적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장기병이 적을 휘젓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분쇄해버렸다.
어디까지나 견제용으로 날린 잽에 승부가 끝나버린 것이다.
이후로도 중장기병 부대는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적들을 유린했다.
반란군은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기병들을 피해 도망 다녔다.
이미 대열 따위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사기가 바닥을 친 반란군의 위를 로마군이 파도처럼 덮쳤다.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은 전의를 잃어버린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베었다.
"으아악!"
"도망가! 모두 도망가!"
반란군들의 처절한 통곡과 함께 중앙군이 완전히 와해됐다.
로마군은 그대로 앞으로 밀고 들어가 반란군의 진영을 완전히 둘로 쪼개버렸다.
이렇게 되자 두 진영으로 나뉜 반란군은 역으로 로마군에게 포위당하는 양상이 됐다.
특히 끝까지 중앙에 남아있던 일부 지휘관들은 로마군에 둘러싸여 완전히 갇혀버렸다.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적들밖에 보이지 않는 공포는 언어로는 형용이 불가능하다.
"으으···아, 안 돼······."
"어디로든 도망가 봐 좀!"
아무리 뒷걸음질을 쳐봐도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는 보이는 이들은 오직 살기를 번뜩이는 로마병사들 뿐이다.
대해에 던져진 나무쪼가리마냥 인파에 휩쓸려가던 그들의 몸에 성난 로마군의 창칼이 비처럼 쏟아졌다.
중앙이 뻥 뚫린 시점에서 이미 싸움의 승패는 정해졌다.
적절하게 상황을 판단한 대대장들은 이 순간 승리를 확신하고 섬멸전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적들은 이미 무너졌다! 모조리 죽여라!"
"후퇴하게 놔두지 마라! 철저히 몰아넣어서 한 번에 소탕하는 거다!"
왼쪽 측면에 자리하고 있던 반란군들은 예상치도 못한 사태에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중앙은 완전히 궤멸했고 이쪽은 경기병들이 끊임없이 화살을 날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회의에서 자신감 있게 결전을 주장하던 양치기 노예 출신 지휘관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가 이끄는 반란군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저 발악하듯 무기를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다, 당황하지 마라! 대열을 가다듬어서 후퇴하자!"
어느새 전투의 목표는 승리가 아닌 생존이 되었다. 하지만 빠져나가려고 해도 삼 면으로 포위된 상태라 뒤쪽밖에는 출구가 없었다.
문제는 중앙을 꿰뚫고 지나간 중무장 기병들이 후방에서 다시 들이치며 무차별 살육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크악!"
"사, 살려줘! 제발 살려줘!"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직 아군의 비명과 그들의 몸이 지면과 부딪치는 충돌음뿐이다.
로마군에게는 자비란 게 없었다. 지금까지 패배로 쌓인 울분을 모두 풀어내듯 잔혹할 정도로 반란군을 찍어 눌렀다.
중앙에 이어 왼쪽의 날개마저 전멸 직전까지 몰렸다.
그래도 다행히 오른쪽 날개는 가까스로 뒤로 후퇴해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중앙이 뚫리는 걸 본 크릭수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를 명령한 덕분이었다.
"모두 숲을 빠져나가 사전에 이야기했던 곳에 집결하라! 맞서 싸우려 하지 마! 그냥 무조건 후퇴해!"
크릭수스는 차마 최후의 항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건 그냥 단순한 살육이다.
이런 곳에서 목숨을 버려봐야 그저 개죽음이 될 뿐, 무엇도 이루지 못한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반란군의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사망했다.
그에 비하면 로마군의 피해는 너무나도 경미해 보였다.
최대로 잡아도 1000명조차 될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게 저 괴물 같은 기병 탓이다.
저들이 처음에 중앙을 완전히 헤집어 버린 탓에 진형이 붕괴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패였다.
이 한 번의 격돌로 반란군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삼분의 일에 가까운 인원만 살릴 수 있다면 충분히 다른 곳으로 도망가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까닭이다.
다행히 빠른 상황 판단 덕분에 우측 날개에 있던 병사들은 안전하게 숲으로 도망갔다.
로마의 괴물 같은 기병들도 우거진 숲까지는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크릭수스는 도망치는데 방해가 되는 투구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전력으로 말을 몰았다.
도주하는 그의 시선 끝에 포위당해 학살당하는 좌측 날개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하늘에 닿을 정도였지만, 저기에 뛰어들어봐야 시체만 몇 구 더 늘어날 뿐이다.
"로마 놈들···지금까지 저런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말이냐. 지금까지 얼마나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었으면!"
뭔가 사실과 다른 오해를 하는 크릭수스였지만,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자신들의 노림수를 완벽히 꿰뚫어 보고 이를 역이용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는 숲으로 뛰어들기 전 마지막으로 시선을 돌려 로마군의 중심을 샅샅이 관찰했다.
이 정도로 자신들을 완벽히 박살 낸 적장의 모습을 똑똑히 눈에 새겨두기 위해서였다.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크릭수스는 적의 외모를 정확히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주홍색 망토를 입은 적의 사령관, 크라수스의 엄격한 인상이 칼날처럼 그의 눈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도망을 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곳에서 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상대방 역시 저 먼 거리에서 크릭수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크릭수스는 자신의 생각이 어째서 이렇게나 완벽히 읽혔는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분노, 격정, 원망, 그리고 일말의 반가움까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가 그의 입을 뚫고 나왔다.
"너였느냐···스파르타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