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노예반란 (18/326)

  # 18 17. 노예반란 ──────────────── 현직 법무관인 글라베르의 충격적인 패배소식은 곧바로 로마에 전해졌다.

  즉각 원로원이 소집됐다.

  의원들은 한목소리로 글라베르가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규탄했다.

  "아무리 훈련이 덜 된 신병을 이끌고 갔다고 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적은 고작해야 검투사들과 노예로 굴러먹던 자들이 아닙니까. 장비도, 숫자도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법무관의 안일한 지휘로 일천 이상의 로마시민이 노예들 따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법무관! 할 말이 있으면 좀 해보세요!"

  글라베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그가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던 이유는 유일하게 등자가 착용된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혼비백산한 상태로 도망치면서도 아주 안정적인 자세로 말을 몰 수 있었다.

  등자의 효용성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입증된 것이다.

  크라수스로서는 절로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의원들이 앞다투어 글라베르를 성토하는 가운데, 또 다른 법무관인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발언을 요구하고 나섰다.

  "로마의 법무관이 이끄는 군대가 노예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있어서는 안 되는 수치입니다. 해서 의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저에게 땅에 떨어진 로마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동료 법무관이 저지른 실책은 같은 법무관인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바리니우스에게 반대하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글라베르가 패하긴 했어도 원로원은 아직 이를 심각한 사안이라 여기지 않고 있었다.

  글라베르가 패배한 것은 그의 자질이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이지 노예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심지어 토벌군을 맡겨 달라 자청한 바리니우스마저 그렇게 생각했다.

  크라수스는 이런 분위기는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마르쿠스에게 들은 바가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리니우스가 토벌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니···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하는 말에 아무런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

  사실 바리니우스가 다음 토벌군을 이끌게 될 거라는 사실을 정확히 예측한 것부터가 놀라웠다.

  상식적으로 노예들 따위를 토벌하는데 집정관이 나설 리는 없다. 그러면 자연히 다른 법무관이 나설 거라 예상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법무관의 정원은 여덟 명이다.

  패배한 글라베르나 수석 법무관 크라수스를 제외하더라도 여섯 명이 남는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아이야. 어떻게 일 년 남짓한 사이에 이렇게나 달려졌는지.'

  원로원 회의는 마르쿠스가 예측한 거의 그대로 흘러갔다.

  크라수스는 예지에 가까운 아들의 예측에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의구심보다는 자랑스럽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나날이 부각되는 아들의 천재성에 찝찝함을 느낄 아버지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크라수스는 어쩌면 마르쿠스가 정계에서도 훨씬 더 빠르게 두각을 드러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는 가문에서 차기 집정관이 나온다면 푸블리우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저 루쿨루스 가문처럼 형제 두 명이 전부 집정관을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온다면 크라수스 가문이 옵티마테스 파벌의 정점에 군림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크라수스는 개인으로서의 비교는 몰라도, 자식농사에서만큼은 폼페이우스에게 이겼다는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

  기분 좋은 우월감을 느끼는 그의 귓가에 노예군을 빠르게 토벌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리니우스의 연설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

  원로원 회의를 마친 크라수스는 마르쿠스에게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했다.

  거의 보고에 가까운 이 과정은 이제 일과나 마찬가지였다.

  "네 말대로 바리니우스에게 아무런 주의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것이냐."

  "흘러내릴 피가 안타깝기는 해도 희생을 피할 수 없다면 최상의 결과를 내는 쪽으로 움직여야 하니까요. 노예들의 반란을 제압하는 건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설마 바리니우스도 노예들에게 패배할 거라는 말이냐? 아무리 그래도 설마······."

  "예.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질 겁니다. 만약 바리니우스가 동방의 왕조나 북방의 게르만과 싸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지휘한다면 이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다른 원로원 의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들은 크릭수스의 반란군을 그냥 밟으면 밟히는 벌레로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크라수스는 딱히 반론하지 못했다. 실제로 원로원 회의장의 분위기는 딱 그러했기 때문이다.

  모든 의원은 반란군에게 진 글라베르를 성토할 뿐, 정작 그 반란군에 대한 주의는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크라수스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놈들 중 실제로 검을 잡고 싸워본 놈들은 검투사 출신 몇몇과 산적 출신 부랑자들밖에 없을 텐데. 게다가 전쟁이란 개개인의 전투력만이 아닌 지휘관의 지휘력도 중요한 법이다. 거기에 있는 누가 군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있겠느냐. 전략이나 전술의 기본도 모르는 초짜들에게 정규군이 질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게 더 힘들지."

  고대 사회에서 군사학은 귀족들이나 배울 수 있는 고급 학문이었다.

  특히 로마의 귀족들은 당시 가장 발달된 군사 기술을 향유하는 자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부심도 굉장히 강했다.

  마르쿠스는 그런 인식의 안일함을 정확히 꼬집었다.

  "거기서부터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노예 반란군을 이끌고 있는 크릭수스는 기초적인 전략과 전술을 알고 있습니다. 글라베르의 허를 찌른 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뜻이죠."

  "뭐라고? 어떻게 검투사 노예가 그런 지식을 알고 있다는 말이냐."

  "스파르타쿠스가 카푸아에 있던 시절에 알려줬다는군요. 그는 노예가 되기 전에 부족을 이끄는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병사들을 이끌어본 경험이 있었겠죠."

  "그런 이야기를 어째서 지금···아니, 잠깐. 너는 이 반란군의 규모가 대체 어느 정도까지 커질 거라고 예측하는 것이냐."

  마르쿠스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바리니우스까지 격파하면 노예군의 규모는 가뿐하게 만 단위 이상으로 불어날 겁니다. 그때쯤이면 로마도 심각함을 인지하겠지만, 토벌이 쉽지 않을 겁니다. 로마 전역의 노예들이 저쪽으로 몰려가 세력이 더 커져 있을 테니까요."

  "으음···설마 그렇게까지."

  역사대로라면 집정관의 군대까지 추가로 패배하게 되지만, 마르쿠스도 여기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크릭수스의 기량이 정확히 어느 정도나 될지 아직 확실한 견적이 나오지 않은 까닭이다.

  크라수스가 이 반란을 진압하게 하려면 타이밍을 굉장히 잘 맞출 필요가 있었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좀 더 볼 필요가 있었다.

  바리니우스가 패배하는 과정을 본다면 더욱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해를 넘길 때까지 이 반란이 계속되리란 건 확실합니다. 그러니 이 틈을 이용해 새로운 기병들을 대량 육성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기병이라니? 얼마나?"

  "파르티아의 중무장 기병인 카타프락토이를 참고한 로마식 중무장 기병입니다. 수는 그렇게 많이 필요 없습니다. 일단 반란군 토벌전에서 이들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게 급선무입니다."

  마르쿠스는 파르티아의 기병처럼 창을 양손으로 잡는 게 아니라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는 카우치드 랜스 파지법을 도입했다.

  이 방식이면 겨드랑이를 활용해 한 손만으로도 창을 쥘 수 있어 다른 손으로 방패를 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니면 방패를 들지 않고 고삐를 쥐어 자세에 안정성을 더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좋은 점은 창을 양손으로 잡는 방식과 달리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덕분에 좌우 간격을 더 좁혀서 한층 더 밀집된 대형으로 돌격이 가능하다.

  마르쿠스는 이렇게 창을 쥐는 방식은 스파르타쿠스의 아이디어라고 대충 둘러댔다.

  크라수스도 스파르타쿠스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난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노예반란이 정말로 내년까지 넘어간다면 이 신종기병을 투입하는 것도 시간상 불가능하지 않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 확실히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될 것 같구나."

  "네. 여기에 조금 더 두터운 장비를 갖추는 것도 구상 중입니다. 그것까지 포함해서 최대한 시간을 단축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들불처럼 번진 반란을 진압한 영웅이 되실 겁니다. 거기에 로마의 기병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 혁신가라는 평가도 받게 되겠지요."

  "하하하,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너의 공이지 않느냐. 아비가 돼서 자식의 공을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차피 제가 했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식에게 명성을 주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요. 아버지께서 먼저 집정관이 되어 확실히 자리를 잡으시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저만이 아니라 푸블리우스도 더 안심하고 올라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르쿠스는 절대로 과하게 눈에 띌 생각이 없었다.

  뛰어난 인재라는 평가를 받는 건 괜찮아도, 그 이상의 평가는 현 로마의 체제에서는 짐이 될 뿐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조금이라도 독재의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에게는 거의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실제로 독재 권력을 휘두른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들은 혼자서 치고 나가는 독보적인 인재를 결코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어떤 핑계거리를 만들어서라도 간섭하고, 길들이려 할 것이다.

  심지어 원로원의 편이라 여겨지는 폼페이우스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큰 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더라도 원로원의 옵티마테스 파벌은 이 견제를 멈추지 않는다.

  해서 마르쿠스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타인의 그늘에 숨기로 했다.

  그 대상이 아버지인 크라수스든, 훗날 만나게 될 폼페이우스든, 카이사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원로원 의원들의 견제를 흡수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르쿠스가 원하는 건 명성 따위가 아닌 실리였다.

  명예와 인정 같은 것은 취할 수 있는 건 전부 취한 뒤에 마지막으로 얻으면 그만이다.

  그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크라수스는 그저 아들의 세심한 배려가 고맙고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

  크라수스의 허가를 받은 마르쿠스는 곧바로 새로운 중무장 기병의 육성에 착수했다.

  원로원의 동의를 받은 사항이 아니니 재정은 사비로 충당해야 한다. 당연히 대규모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현재 크라수스 가문의 재력이라면 이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특히 엄청난 물량으로 주문이 들어온 등자와 편자 덕분에 지출에 대한 압박은 전혀 없었다.

  정말로 반란이 대규모로 커질까 반신반의하던 크라수스도 바리니우스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아들의 말을 믿기로 마음을 정했다.

  바리니우스의 패배 원인은 마르쿠스의 예상대로였다.

  노예 반란군을 얕본 그는 4천의 군대를 둘로 쪼개어 부관에게 지휘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때를 놓치지 않은 크릭수스가 부관인 코시니우스의 병력을 기습해 각개격파했다.

  코시니우스는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크릭수스에게 목이 베였다. 뒤늦게 크릭수스를 추격하던 바리니우스는 도주하는 척하다가 역으로 기습을 한 반란군의 작전에 휘말려 처참하게 패배했다.

  특히 군기와 함께 로마 고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파스케스마저 빼앗겼다는 사실이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파스케스는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묶어서 만든 도끼인데, 크릭수스는 이 전리품을 보란 듯이 부하에게 지고 다니게 했다.

  이 승리로 기세가 오른 크릭수스의 세력은 로마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규모가 커졌다.

  보고를 위해 로마로 향하는 말발굽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남부의 양치기 노예들이 대규모로 탈출해 반란군에 합류했습니다."

  "네아폴리스의 노예들이 집단으로 탈주했습니다."

  "반란군의 규모는 이미 4만을 넘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메타폰툼에서 노예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이 호응하기 위해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예 반란군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보고가 연일 원로원과 민회에 도착했다.

  이제 그들의 규모는 6만에서 7만 가까이 될 것 같다는 첩보도 있었다.

  이제는 노예라고 무시할 수 있는 규모를 아득히 넘어섰다.

  여기에서 마르쿠스가 알던 원래의 역사와는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마에서 도망치기 위해 북상하던 역사상의 노예군과 달리 지금의 노예군은 로마 전역을 돌아다니며 철저한 파괴를 자행했다.

  방어가 견고한 대도시는 공격하지 못했지만, 성벽이 취약한 중간 규모의 도시는 노예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도시를 약탈하며 남성 로마 시민은 죽이고, 여성은 범했다.

  스파르타쿠스처럼 노예들을 제어할 자가 없으니 그 공격성이 거의 극에 달한 것이다.

  크릭수스는 이들을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직 이후에 쳐들어올 로마군과 싸울 대비에만 몰두했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원로원은 결국 해가 넘어가기도 전에 억지로 군대를 소집했다.

  이것조차 실제 역사와는 달랐다.

  다음 해에 임기가 시작될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니콜라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지휘를 맡았다.

  이번에는 체면을 차리기 위해 보낸 신병이 아닌 진정한 로마의 정규군단이 투입됐다.

  집정관은 각각 2개 군단, 도합 2만 5천이 넘는 군단을 이끌고 출병했다.

  "도합 4개 군단을 적국이 아닌 고작 일개 폭도들에게 투입하는 건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이긴다고 해도 체면이 깎이는 걸 감수해야 할 겁니다."

  아직도 현 상황을 무르게만 보는 의원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의원들은 정규군단 투입에 찬성했다.

  물론 이 상황을 심각하게 보는 의원들도 군단을 무려 4개나 투입했으니 이걸로 상황이 끝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지중해 기후가 온난하다고 해도 겨울은 전쟁하기 좋은 계절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연말은 한 해에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었다. 으슬으슬한 추위에 진창이 된 벌판 위로 행군하는 군의 사기가 높을 수가 없다.

  두 집정관은 심지어 자신이 이 전쟁을 마무리했다는 공적을 챙기고 싶어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무리하게 결판을 서두른 겔리우스가 크릭수스의 매복에 걸려 패주했다.

  뒤따라온 집정관 렌툴루스의 군대마저 거짓말처럼 격파당했다.

  물론 노예군도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크릭수스는 실제 역사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싸웠음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가 스파르타쿠스만큼의 군략은 가지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처럼 지도자가 양분되지 않았다는 이점이 결국 승리를 가져왔다.

  집정관이 이끄는 군대의 패배라는 청천벽력과 함께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렌툴루스의 군단에서 포로로 잡힌 로마군 중 풀려난 한 명이 민회가 열리는 코미티움의 연단 위에 섰다.

  병사는 피눈물을 흘리며 크릭수스의 군대가 로마군에 저지른 만행을 규탄했다.

  "저들은 포로로 잡힌 우리 로마시민들에게 검을 주고 서로 싸우게 했습니다. 싸우지 않을 거라고 버틴 사람들은 잔인한 고문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싸워서 살아남은 자만을 풀어주겠다며 저희가 싸우는 걸 보고 웃으며 조롱했습니다! 저는 같은 동료를 죽이면서까지 치욕적으로 살아남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어째서? 저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리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저 쓰레기들이 감히!"

  "쳐죽일 놈들 같으니!"

  분노에 가득 찬 시민들의 함성이 포로 로마노를 가득 메웠다.

  병사가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때리며 목 놓아 절규했다.

  "그들의 수괴가 저를 풀어주며 자신의 말을 로마에 똑똑히 전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로마를 향한 분노를 담은 그릇이며, 이 분노가 머지않아 로마를 더욱더 거세게 휩쓸 거라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저들의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아야 합니까!"

  "원로원은 뭘 하고 있는 거냐!"

  "집정관이란 작자들이 자신들만 공을 세울 궁리나 하고 있으니 이런 꼴이 나는 거지! 로마의 수치다!"

  당연히 원로원도 성난 민중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도 평민들 이상으로 분노에 찬 상태였다.

  검투사 시합을 주최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로마인들에게만 있다.

  크릭수스는 일부러 로마의 기득권층을 비웃기 위해 보란 듯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화가 난다고 섣불리 군사를 일으키면 이전 패배의 재판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집정관의 군대마저 패배한 상황에서 섣불리 자신이 나서겠다고 지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적은 수만이 넘는 대군이다. 거기에 잇따른 승리로 사기마저 충천한 상태였다.

  절대로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 최근에 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어가고 있는 신참자 키케로가 조심스레 발언을 요청했다.

  "어차피 겨울에 군대를 억지로 일으켜봐야 또다시 패배할 뿐입니다. 다행히도 지금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내년에는 폼페이우스가 귀환할 테니 그에게 지휘권을 맡기면 어떨까요?"

  "아무리 그래도 아직 히스파니아가 진압된 것도 아닌데 폼페이우스를 마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우리 로마에 폼페이우스 외에는 인재가 없다는 거요?"

  원로원 의원들은 이 이상 폼페이우스가 군공을 쌓을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 무조건 반대를 던졌다.

  그러면서도 막상 자신이 나서서 지휘를 맡겠다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마르쿠스의 조언대로 지금이 나서야 할 적기라고 확신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저에게 임페리움(최고위 명령권)을 주십시오. 제가 군을 지휘해 반란군을 토벌하고 로마의 명예를 되찾아 오겠습니다."

  수석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군단을 이끌 자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술라의 휘하에서 잠깐 활약을 한 것 이상의 군공은 없었다.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감이 부족했다.

  최근에 안찰관을 역임한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손을 들고 조심스레 물었다.

  "수석 법무관께서는 어떻게 적과 맞설 생각이십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패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지휘관들이 적을 얕보아 방심했고, 승리를 이미 확신하고 군공을 탐해 지닌 힘을 다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의원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임페리움을 받는 건 오직 저 한 명, 그리고 패배한 집정관의 군대를 포함해 8개 군단을 편성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떠한 방심도, 자만도 하지 않고 철저하게 적을 말살하겠습니다."

  단호하면서도 확실한 선언에 원로원이 일제히 술렁였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들어주기엔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패장인 렌툴루스가 조심스레 반론을 펼쳤다.

  "8개 군단이라니 그건 너무 많소. 내가 이런 말을 할 염치가 있는 건 아니지만 8개 군단이나 투입한다면 당연히 저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재정적인 문제도 고려해야하지 않겠소?"

  푸블리니콜라가 그의 말을 받아 반대에 한 표를 더했다.

  "지금 재정 상황상 8개 군단을 편성하는 건 압박이 너무 심하오. 6개 군단이라면 모를까 8개 군단이라니···그런 재원이 어디에서 나온다는 말이오?"

  "저한테서 나옵니다."

  크라수스의 간단명료한 반박에 원로원 회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6개 군단만 국고로 편성해주십시오. 2개 군단은 제가 사비로 충당하겠습니다."

  원로원 의원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렌툴루스와 푸블리니콜라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손을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 뒤에는 일사천리로 크라수스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하고 토벌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반대표는 나오지 않았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