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2. 로마 최고 대부호 크라수스 ────────────────
"키야~포도주 맛이 죽이는구나."
완벽히 마르쿠스의 몸에 적응한 재훈은 오늘도 친우들과 함께 호화로운 연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람의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고대 세상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진 불편함은 며칠 만에 전부 그럭저럭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됐다.
돈 걱정 없이 제철의 진수성찬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고, 말만 하면 뭐든지 들어주는 노예들이 언제나 곁에 상주하고 있다.
오히려 현대에 있을 때보다 더욱 더 편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현대인의 감수성을 지닌 재훈은 노예들에게 가혹한 명령은 절대 내리지 않았다.
노예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양심이 쿡쿡 찔렸으나 이 시대의 통념이 그러니 일단은 그대로 따랐다.
재훈에게는 시대의 이념에 적극적으로 항변할 만큼의 정의감이나 적극성은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대신 노예들도 충분히 인간적으로 대우하겠다는 자기 위로에 가까운 변명을 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가문의 노예들은 마르쿠스가 달라졌다며 수군거렸다.
마르쿠스는 더 이상 노예들을 때리지 않았고 술을 떡이 될 정도로 마시지도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적당히 취기가 오를 정도로 포도주를 마시고, 진수성찬을 즐길 뿐이었다.
그 정도의 유희는 크라수스도 허락해주었기에 재훈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마르쿠스가 된 재훈은 현재의 생활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크라수스와 푸블리우스가 죽는 파르티아 전쟁은 어차피 이십 년 뒤의 일이다.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성인이 된 뒤에 해도 차고 넘친다.
지금은 일단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친우인 카시우스가 빈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르며 권했다.
"자, 한 잔 더하자고. 아직 취하지 않았겠지?"
"당연하지! 이 정도야 한입에 쭉 들이킬 수 있다고."
"오오, 역시 크라수스가의 장남!"
포도주를 원샷하자 친구들과 뒤에 도열한 노예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크~여기가 바로 천국인가?'
이전의 삶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호사스러운 나날의 연속이다.
행복한 삶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재훈은 딱 취하기 일보직전 상태에서 술자리를 파했다.
내일은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의 경기를 보자는 약속을 나누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으로 향했다.
크라수스 가문의 저택이 위치한 곳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입지조건이 좋은 팔라티노 언덕이다.
고지대에 있으면서도 물이 풍부하고, 테베레 강을 끼고 있어 산뜻한 서풍이 불며, 비탈길을 내려가면 도심인 포로 로마노가 곧바로 나온다.
로마에서 나름 권세 있고 부유한 가문은 대다수가 이 팔라티노 언덕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로 치자면 강남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비유 할 수 있겠다.
서울은커녕 수도권에 집 한 채 마련하는 게 인생의 꿈이었던 이전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금의 연회도 서민들이 모여 사는 수부라의 한 술집을 통으로 빌려서 벌인 것이다.
'재벌 2세의 삶이란 게 바로 이런 거겠지?'
물론 재훈은 태어나서 재벌 2세 따위는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래도 드라마에서나 접한 부류의 사람들과 같은 대열에 들어섰다는 게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도련님, 오르시지요."
지적으로 보이는 그리스계 청년이 재훈을 호화로운 가마로 안내했다.
셉티무스라는 이름의 청년은 크라수스가 아들의 보조 겸 감시로 붙여놓은 해방노예였다.
크라수스는 다양한 종류의 사업에 손을 대고 있는 만큼 수많은 해방노예들을 부리고 있다.
원로원 의원은 원칙적으로는 상업에 종사할 수 없다.
물론 허울 좋은 법률일 뿐이다. 대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대리인을 내세워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다.
해방노예는 일단 법적으로는 자유민의 신분이었기에 나중에 추궁을 당하더라도 빠져나가기가 용이하다.
셉티무스도 눈치 빠르고 명석한 부분이 크라수스의 눈에 들어 노예의 신분을 벗게 된 케이스였다.
현재 그의 주된 업무는 마르쿠스의 교육과 그가 친 사고의 뒷수습을 하는 것이었다.
가마에 오르라는 셉티무스의 권유에 재훈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됐어. 오늘은 기분도 좋으니 집까지 걸어가야겠다. 무거운 가마를 지고 가봐야 쟤네들만 힘들 거고."
"그게 노예의 일이니까요. 예전에는 정원에서도 가마를 타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내가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고."
"불과 사흘 만에 철이 드시다니 도련님의 훈육을 맡은 입장에선 감격스럽기 그지없군요."
제훈은 셉티무스의 신랄한 풍자를 가볍게 웃어넘겼다.
아버지의 심복인 그를 원래의 마르쿠스는 상당히 꺼려했다.
해방노예는 노예랑 달리 엄연히 씨족의 일원이라 가장을 제외하면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핑계를 만들어 그를 멀리하곤 했으나 재훈은 달랐다. 오히려 저렇게 확실하게 말해주는 비서 타입의 남성이 옆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연회, 내일은 검투사 경기, 그 다음날도 연회. 키야~이게 바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셉티무스도 그렇게 생각하지? 여기야말로 지상낙원이라고."
"유토피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련님께서 그리 느끼신다면 그런 것이겠죠."
"그래, 그래. 로마야말로 내가 찾던 이상향이라고. 평생을 이렇게 행복하게 살 거야."
재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수부라 거리를 걸었다.
행복함에 취해 걸어가고 있을 때, 저 앞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두꺼운 문이 스르륵 열렸다.
재훈은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인지 살펴보았다.
문 틈새로 땅딸막한 남성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뒤를 따라나온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땅바닥에 포대 한 자루를 집어 던졌다.
쓰레기처럼 던져진 자루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 거리는 게 보였다.
"뭐야 저건? 동물이라도 담겨 있나?"
자루 안에 있는 내용물은 여전히 미세하게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재훈은 눈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현대에도 동물을 학대하는 수준 이하의 인간들은 많았다.
알코올이 들어가 약간 업 된 상태인 재훈은 설교라도 해줄까 싶어 남성에게 다가갔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밤거리에 울려 퍼지며 거리가 좁혀졌다.
포대를 지나치려던 재훈은 무심코 발을 멈췄다.
미세하게 풀린 포대 사이로 들어난 내용물에 눈길이 확 돌아갔다. 재훈의 발목에 따뜻한 무언가가 미세하게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손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워낙 힘이 미약해 잡혔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다.
포대자루에서 기어 나온 손의 주인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제 열 살쯤 되었을까. 갈색에 가까운 흑발을 지닌 트라키아인 소녀였다.
흐릿한 눈동자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어깨 아래로는 구타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영양실조에 가까워 보이는 몸은 이미 사람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저 목숨만 붙어있을 뿐, 시체에 가까운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처참한 몰골에 기분좋게 올라오고 있던 취기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이게 무슨······."
아연실색한 재훈의 발을 트라카이아인 소녀는 필사적으로 놓지 않았다.
사실 간단히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힘이 아닌 집념 같은 게 전해져왔다.
어떤 집념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삶에 대한 집착이다.
소녀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입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애썼다.
"···도와주기를 원하는 건가?"
재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에 반응한 듯 소녀의 마른 입술이 미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였다.
호흡소리만도 못한 가냘픈 음성이었으나 재훈에게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어이! 뭔 짓을 하는 거야, 꼬마! 혼나고 싶어?"
땅딸막한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턱짓을 했다. 뒤편에 서 있던 건장한 체구의 노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남의 일에 끼지 말고 꺼져. 안 그러면······."
위협적으로 말을 이어가던 남성은 재훈의 뒤에 도열한 노예들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노예들의 체격이나 복장만 봐도 가문의 격을 간접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거기에 셉티무스와 노예들의 뒤편에는 호화스러운 가마까지 놓여 있었다.
눈치가 빠른 남성은 재훈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설마 귀족···입니까?"
로마는 귀족이라고 해도 평민들을 마음대로 짓밟을 권리는 없다. 로마 시민권자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관계없이 로마인으로서 보장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권력과 부를 지닌 명문가라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 형태로 상대방을 묻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같은 로마인이라고 해도 평민이 명문 귀족 앞에서 목을 뻣뻣하게 세우는 건 무리였다.
재훈은 마르쿠스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로마의 현실을 잘 알았다.
그는 예전의 마르쿠스처럼 한없이 거만한 표정을 연기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알겠느냐. 이래서 무지한 것들은."
"며, 면목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뭐냐?"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목소리에 완연한 분노가 실렸다.
사내가 비굴하게 손을 싹싹 비비며 미소를 지었다.
"제 노예입니다. 조금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훈육을 하는 중이었죠."
"훈육? 이게 훈육이라고?"
재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가 한층 더 깊어졌다. 이 시대의 노예가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것쯤은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백만광년쯤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물론 현 로마에서는 재훈 같은 반응을 보이는 쪽이 이상한 쪽에 속했다.
주인이 노예를 어떻게 대하든 그건 주인의 마음이다.
막말로 마음에 안 든다고 때려 죽여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주인이 노예의 가치에 해당하는 금전적인 손해를 볼 뿐이다.
현대인의 감성을 가진 재훈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개소리에 불과했지만.
"이 아이가 어떤 잘못을 한 게 아니라 그냥 교육이 필요해서 이런 무자비한 구타를 했다는 것인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놔야 나중에 시중을 들게 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이니까요. 본판이 제법 괜찮으니 이렇게 확 꺾어둔 뒤에 꾸며놓고 처음을 팔아줘야 본전 이상의 뽕을 뽑지 않겠습니까."
듣기만 해도 귀가 썩어 들어갈 것 같은 역겨운 이유였다. 재훈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남성이었다.
그는 눈앞의 귀족 도련님이 어째서 화가 났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재훈은 상대방의 그런 표정을 보며 솟아오른 화가 차게 식어버리는 걸 느꼈다.
분노대신 가슴속에서 피어난 것은 짙은 혐오감이었다.
그 대상은 눈앞의 남성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여긴 지상낙원이라며 노래를 부르던 자신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기가 유토피아라고? 개소리 하고 자빠졌네.'
할 수만 있다면 몇 분 전의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달이 환하게 뜰수록 그 밑에 드리워진 어둠은 깊고 진하다.
고대의 생산력은 현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곳에서 재벌과도 같이 막대한 부를 휘두르려면 필연적으로 밑에 깔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지 재훈은 보려 하지 않았다.
흙수저로 평생을 살아왔던 그는 귀족의 삶이 가져다주는 부유함에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어린 소녀가 현대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재훈이 현대가 아닌 고대 로마에서 태어났다면 분명 이 소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으리라.
"이 애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예? 그거야 당연히 지금처럼 계속 교육을 하겠죠."
"그러다가 죽으면?"
"이 일을 한두 해 해본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로 하면 숨이 넘어가는지는 다 압니다."
재훈의 표정에서 뭔가 싸한 예감을 받은 남성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건 법률상 확실히 제 소유입니다. 로마법상 아무리 귀족나리라 하더라도 시민의 재산을 침해할 수 없다는 건 아시죠?"
"그래서."
우뚝 움직임을 멈춘 재훈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