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특별외전 11. 공항에서 (4)
네가 왔다. 나를 만나러.
선우를 힘껏 안은 문도는 질끈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떨리는 숨결이, 그 숨결을 따라서 넘어오는 향기가, 그토록 그리웠던 선우의 것이었다.
안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아 문도는 양손으로 선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두 손 가득 얼굴을 쥐고서 다시 바라보았다. 눈물이 맺힌 눈을 하고서 선우는 웃고 있었다.
이마 위 보송보송 솜털 같은 잔머리. 반짝이는 눈물이 맺혀 있는 반달 같은 눈. 도톰하게 벌어진 산호색 입술. 선우가 맞았다. 그의 선우가 맞았다.
문도는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이곳이 넓은 공항의 한가운데라는 것도, 지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상관없었다. 선우가 왔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산호색 입술이 벌어지며 그를 품었다. 떨리는 숨소리와 애틋한 마음이 하나로 섞이며 아릿하게 번져 갔다. 천천히 입술을 떼자, 그의 품에 안긴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문도는 먹먹해진 마음으로 선우의 뺨을 쓸며 말했다.
“뭐 하러 왔어. 내가 갈 건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혼자 몸으로 긴 시간 비행을 하며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게 왜 이리도 마음 아프고 기특한 건지.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요.”
어슴푸레 웃는 미소 위로 한 번 더 눈물이 번졌다. 문도는 뺨으로 흘러내리는 선우의 눈물을 쓸어내렸다.
“못 만나면 어쩌려고 연락도 없이 와.”
“만났잖아요.”
이런 일을 벌인 사람치고 태평한 대답이었다. 정말이지 선우가 이렇게 대책 없이 무모하게 날아올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결혼기념일에 혼자 두지 말아야겠다고 그 생각만을 했을 뿐이다.
“학교는?”
“시험 기간이라고 교수님이 휴가 주셨어요.”
문도는 말을 하는 선우를 다시 한번 품에 당겨 안았다. 고작 몇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 선우가 왔다. 그 사실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를 찾아 헤매던 눈동자와 마주쳤던 순간을,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하리라.
“당신은요? 왜 일정이 당겨졌어요?”
“협상이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 지어졌어.”
어제까지 아무 말 없었잖아요.”
문도는 말을 하는 선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에, 코끝에,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선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놀라라고.”
“나도 그래요.”
선우가 연하게 웃으며 답했다. 피식 웃은 문도는 선우를 한 번 더 꼭 끌어안았다. 취리히, 4년 전 여름의 그 도시 위로 그들의 이야기가 한 번 더 쌓이고 있었다.
* * *
시간이 없었다.
호텔 방의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입술이 포개어졌다. 선우의 원피스 지퍼를 내리는 문도의 손길이 성급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원피스가 허리에 걸리기도 전에 선우의 몸이 들렸다.
“아, 흣.”
브래지어의 레이스 위로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벽에 등이 닿은 선우는 고개를 꺾으며 파르르 떨었다. 몇 번을 깨물리는 동안 어느새 브래지어가 벗겨졌다. 문도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 살점에서 낯뜨거운 소리가 났다.
선우는 문도의 어깨를 그러쥐고 몸을 떨었다. 가슴 끝이 뜨거웠다. 저릿거렸고, 갈고리에 걸린 것 같았다. 아프도록 깨물고 빨리는 것이 좋았다. 그럴 때마다 팽팽한 줄이 당겨지며, 몸이 딸려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번져 나가는 쾌감은 또 다른 안타까움으로 이어졌다. 헐떡임의 끝에서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문도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문도 씨. 문도 씨.”
고개를 들지 않고 더 깊게 베어 무는 남자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잇새에서 빠져나오는 붉은 살점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선우는 문도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추고 싶어서였다.
정염에 물든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짙었다. 선우는 떨리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깊게 얽히는 시선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보고 싶었어요.”
선우는 그 말을 하며 문도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남편이 없는 밤은 밤이 아니었고, 낮은 낮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모든 것이 텅 빈 것 같아서.
“내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속삭이며 입술을 거듭 머금었다. 이렇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래도 부족하고 부족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고 더 깊게 남자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살을 훑고서 남편의 혀를 찾아 마주 대며 안으로 빨아들였다.
하.
낮은 탄식 같은 소리와 함께 강인한 혀가 밀려들었다. 어지럽게 뒤섞이는 동안 발밑이 아득해져 갔다. 숨이 턱에 찰 만큼 깊어진 입맞춤의 끝에서 빨갛게 타들어 가는 눈으로 문도가 말했다.
“4년.”
선우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문도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나에게 오는 데 걸린 시간.”
아니야.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왜 눈물이 나오려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늘 당신뿐이었는데, 당신은 이런 나를 항상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을까.
“아니. 틀렸어요.”
선우는 엄지를 벌려 문도의 뺨을 쓸었다. 예전엔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안다. 내리쬐는 햇빛을 태연히 가르며 나타났을 때부터, 무심한 얼굴로 서류에 사인을 했을 때부터, 수건을 내밀어 흐르는 물을 닦으라고 했던 그때부터. 나는.
“그렇게 오래 나는 비행기는 없어요.”
선우는 언제나 아름다웠던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항상 시선의 끝에 당신이 있었어. 당신만 나타나면 그 넓은 집이 팽팽한 공기로 가득 찬 것 같았고, 빤히 나를 볼 때면 숨이 막혀 왔어.
당신이 당신이어서, 그래서 내가 감히 커피를 마시자고, 카모마일은 어떠냐고,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
우리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들이 사실은 서로에게로 향한 길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만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나도 이제는 알아요.
“열다섯 시간 십오 분.”
선우는 말을 하며 문도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당신을 향해 날아온 시간은 열다섯 시간 십오 분.
“내가 날아온 시간. 그리고…….”
선우는 한 번 더 문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탄식 같은 숨을 뱉는 남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가 같이 돌아갈 시간이에요.”
어쩌면 속도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는 성급한 편이고, 자신은 언제나 느린 편이었으니까.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내내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있었다는 것. 속도는 달라도 목적지는 같았다는 것. 그렇게 서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
다시 한번 입술이 겹쳐졌다. 휘감아 오는 남편의 혀를 받으며 선우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비로소 이 남자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마지막 종착역. 그중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 환하게 햇살이 드는 가장 밝은 자리. 놓치려야 놓칠 수 없는 바로 거기에 서서 오래도록 그녀를 기다려 온 마음.
그게 이 남자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선우는 이제 알 것 같았다.
* * *
침대에 힘없이 엎드린 선우의 몸이 주르륵 끌려갔다. 문도가 품에 가두듯이 안고서 이마에 입을 맞춰 오는데 뭐라 소리를 낼 기운도 없었다.
“휴가 낼까?”
네? 하고 물어봐야 하는데, 허, 하는 숨소리만 나왔다. 문도가 선우의 이마에 입술을 댄 채로 말을 했다.
“이번 주 통째로 휴가 낼까? 신혼여행 왔다고 하고.”
“누가…….”
결혼 4년 차에 신혼여행을 와요……. 그 말도 기운이 없어 말줄임표로 대신했다. 침대에서, 욕실에서, 다시 침대에서 연이어 정사를 갖는 바람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게다가 작년 여름에 평창을 가지 않았던가. 그때도 신혼여행 대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휴가 낼게. 이틀만 더 있다가 가.”
“휴가는……. 규원이랑 같이……. 가야죠.”
“그럼 연차 쓸게.”
임원도 연차가 있다. 잠시 그 생각을 하는데 문도가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취리히가 유서가 깊은 도시예요.”
어떤 점에서 유서가 깊은 거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잇는다.
“여기서 내가 두 번이나 고백을 받았잖아. 4년 전에 전화로 한 번, 오늘은 육성으로…….”
말을 하다 말고 문도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꼽았다.
“침대에서, 욕실에서, 바닥에서, 또 어디였더라? 아, 내 위에서. 네 번인가?”
“그거는 당신이.”
“당신이?”
짓궂은 문도의 표정에 선우는 으, 소리를 내며 문도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정신없이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더는 못 견딜 것 같다고 몇 번이나 애원했던 것이 기억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리마트 강변에 산책로가 있어.”
뒷머리를 감싸 안으며 말을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샌드위치를 사서 벤치에서 먹자. 산책로를 따라서 산책도 하고, 백조도 보고.”
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좋을 것 같았다. 선우는 둘이서 손을 잡고 봄날의 강변을 걷는 모습을 상상했다.
“해 질 녘엔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한 저녁도 먹어. 장 여사랑 규원이가 좋아할 만한 선물도 사고, 꽃집에 들러서 꽃도 한 다발 사.”
이어지는 남편의 목소리는 근사했고, 상상으로 그려지는 취리히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선우가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자 문도가 빙그레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트램을 타고, 아무 길가에 내려서 다시 걸어. 호텔로 돌아와서는 다시 사랑을 나누고, 또 나누고, 또 나누는 거지.”
선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른한 졸음이 몰려왔다. 나른하게 등을 쓸어 주는 문도의 손길 때문인 것 같았다.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비행기를 타서 그런지도 몰랐다.
“결혼기념일이니까 한 번 더 해야겠다.”
그런 게 어딨냐는 말 대신 선우는 눈을 감은 채 피식 웃었다. 문도의 손길이 부드럽게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선우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깜빡, 깜빡, 느리게 점멸하는 시야 속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있었다.
“선우야.”
“네 .”
“다음 생에도 꼭 나를 만나.”
“으응…….”
“꼭 나를 만나러 다시 와 줘.”
그때 대답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우는 남편의 품을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달칵, 시곗바늘이 한 칸을 움직여 하나로 모였다.
4월 26일, 00시 00분.
서로의 품에서 맞이하는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