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67화 (167/168)

167. 특별외전 10. 공항에서 (3)

도착한 비행기가 많았는지 입국심사대에는 제법 줄이 길었다. 선우는 여권과 비행기표를 들고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국심사대에 서자 공항 직원이 간단한 질문을 했다. 여행 목적은 무엇인지, 며칠간 머물 것인지, 어디에 머물 것인지.

선우는 준비한 대답을 했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왔고, 하루를 머물 것이며, 호텔에 있을 예정이라고.

둥근 인상의 여인이 로맨틱하다고 말해 주었다. 선우는 작게 웃었고, 그녀는 행운을 빈다고 했다.

몇 마디 안 되는 대화였지만 나름 긴장을 했는지 어깨가 뻣뻣했다. 심사대를 나오며 선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찾을 수화물이 없으니 이대로 취리히 시내로 가는 기차를 타면 되었다. 선우는 지도를 살펴볼 요량으로 들고 있던 숄더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어?”

장 여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여덟 통이었다. 그것도 바로 전까지 왔었다. 입국심사를 하는 도중에 걸려 왔던 것 같은데 무음으로 해 놓아서 까맣게 몰랐다.

혹시 규원이가 아픈 걸까. 무슨 일이 생겼다.

선우는 급한 마음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자마자 장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유, 전화를 왜 이리 안 받아요. 메시지 보셨어요?

“아뇨. 아직. 바로 전화하느라 확인 못 했어요.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전무님 지금 공항이래요. 하루 일찍 끝나서 지금 비행기 탄다고.

“네?”

- 그러니까 얼른 전화해서 비행기 타지 말라고 해요.

선우는 그대로 굳었다. 어디라고? 공항? 비행기를 타려 한다고?

잠시 모든 게 멈추었다. 삐이- 전원이 끊어진 기계처럼 뇌도 손도 동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순간 깨어난 선우는 급하게 걷기 시작했다.

출국 게이트 쪽으로 가야 해.

그 생각과 동시에 서둘러 핸드폰으로 문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손으로는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을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서, 고개를 돌려 표지판을 살폈다.

받아요. 전화 좀 받아.

신호음이 오래오래 울리면 끊고 다시 걸었다. 나 여기 왔는데. 당신 만나러 왔는데, 전화 받아요. 그 비행기 타지 마.

간절한 마음으로 선우는 걷고 또 걸었다. 멀리에 ‘Departure’이라 쓰여 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선우는 여전히 울리고 있는 신호음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송정태가 캐리어를 한쪽으로 모았다.

“수화물로 보낼 게……. 캐리어 세 개하고, 백팩 세 개. 전무님도 짐 전부 보내실 거죠?”

“네.”

“어, 팀장님 제 백팩은 들고 탈게요.”

“잠깐……. 나도 쇼핑하려면 가방이 있어야 하나. 그럼 짐을 좀, 다시 정리를.”

송정태가 백팩을 다시 정리하느라 잠깐 어수선한 사이 누군가 문도의 다리에 쿵, 하고 부딪혔다. 금발 머리의 꼬마 남자아이였다. 차가운 오렌지 주스가 문도의 와이셔츠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손에 구겨진 주스팩을 들고 있는 아이가 당황한 얼굴로 문도를 올려다보았다. 오렌지 주스가 방울져 흘러내리는 사이, 아이의 부모가 와서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괜찮다 말을 하고 아이를 돌려보낸 문도는 정태에게 핸드폰과 티켓을 맡기며 말했다.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긴 홀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들어온 문도는 물을 틀어 손을 닦았다. 물기를 털고 화장실을 나오려는데 생각보다 많이 묻었는지 셔츠가 축축했다. 티슈 몇 장을 뽑아 툭툭 누르는데 전무님, 하고 크게 부르는 송정태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헐떡이는 목소리에 웃으며 말을 하자, 송정태가 핸드폰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전화, 전화를, 받아 보셔야, 헉헉. 할 것 같아서.”

일순 긴장한 문도는 송정태가 건네는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지이잉- 진동을 하고 있는 핸드폰의 액정에 선우, 두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울려서요, 혹시 댁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뚝 하고 진동이 멈췄다. 부재중 전화가 세 통. 모두 선우였다.

싸하게 피가 식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바로 콜백을 했는데 통화 중이라는 안내음만이 들려왔다. 선우와 엇갈려 전화를 걸고 있는 것 같아, 문도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명 실장이나 본가에서 따로 연락 온 건 없었습니까? 메시지나 메일 포함해서.”

“네. 없었습니다.”

“잠시 핸드폰 좀.”

혹시 몰라서 명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려고 정태의 핸드폰을 빌렸을 때였다.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이 다시 지이잉 진동을 했다. 문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선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문도 씨, 어디예요?

“무슨 일이야.”

- 비행기, 비행기 타지 말아요. 나 지금.

“선우야. 무슨 일인지.”

- 나 지금 공항이에요. 그러니까 비행기 타지 마.

숨이 가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말하는 선우는 공항이라고 했다. 잠시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너, 혹시.”

- 지금 어디예요? 출국심사 마쳤어요? 벌써 나갔어요?

선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도는 빠르게 걸어 화장실을 나왔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캐리어를 끌며 걷는 사람들, 체크인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의자에 앉아 대기 중인 사람들.

어디론가 떠나려 모여든 사람들을 눈으로 짚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곳 어딘가에 네가 있는 걸까.

“너 어디야.”

- 지금……. 가고 있어요. 공항 쇼핑몰인데, 체크인 카운터 1번 표지판이 보이고…….

어디인지를 확인하고 있는 선우의 목소리 끝이 늘어졌다.

“2번이야. 아니, 너 지금 어디야. 내가 갈 테니까.”

문도는 급히 말했다.

- 아니요, 그냥 거기 있어요. 내가 갈게요.

걷고 있는지 선우의 목소리에는 가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어떻게 그냥 여기 있으라는 말인가. 네가 여기 있다는데. 지금 이곳에 있다는데.

“뭐가 보이는지 말해. 내가 갈게.”

- 내가 가요. 엇갈리면 안 되잖아. 체크인 카운터 2번, 그쪽으로 갈게요. 그러니까…….

가쁜 숨을 내쉰 선우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 기다려요.

뭐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문도는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선우가 긴 시간 하늘을 날아 그를 보러 왔다고 한다. 그를 보러 날아왔다고.

그의 스케줄이 일찍 끝난 것을 몰랐을 테니, 선우는 정말 하루도 채 머물지 못할 것을 알면서 비행기를 탄 거였다. 바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토록 무모하고도 단호하게 그를 만나러 오고 있는 거였다. 그 사실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짧은 탄식 같은 웃음은 이내 목을 꽉 채우고 올라오는 어떤 감정이 되었다.

네가 온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 분명히 체크인 2, 라고 써진 표지판을 봤었다.

선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뒤를 돌았다. 왔던 길을 더듬어 걸으며 고개를 들어 표지판을 확인했다. 마침내 보인 표지판 옆으로 하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흰 화살표를 지표 삼아 선우는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커피하우스를 지나고 초콜릿이 가득 쌓인 상점을 지났다. 마트, 옷가게, 기념품 가게와 식당. 커다란 복합 쇼핑몰을 방불케 하는 매장들을 가로지르며 선우는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Check in-2’

검은색 바탕의 흰 글씨가 가리키는 길은 점점 선명해지고 단순해졌다. 화살표를 쫓는 선우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하아.

3층으로 올라가는 레일에 오른 선우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체크인 카운터 2번. 그것만을 되뇌며 초조한 마음으로 레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3층에 도착한 선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카운터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발을 내딛는 찰나, 넓은 홀 중앙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선명한 표지판 아래에 우뚝 서 있는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선우는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여기까지 이렇게 달려왔는데. 내 목적지는 오로지 당신이었는데. 어째서.

걸음을 멈춘 채 선우는 가쁜 숨만 쉬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부터 오로지 남편만 보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남편은 눈물에 가려 자꾸만 뿌예졌다. 고작 10미터. 후우, 숨을 내쉬며 웃은 선우는 쓱쓱 눈물을 닦았다.

흐려진 시야를 걷어 내며 선우는 걸었다. 10미터. 5미터. 3미터. 1미터.

마침내 목적지에 닿은 선우는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내내 목 끝까지 차올라 있던 말로 애써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왔어.

마지막 말은 하지 못했다. 남편의 뜨거운 품이 그녀를 숨 막히게 안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모두 덮어 버리는 남편의

품속에서 선우는 눈을 감았다.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침내 도착한 그녀의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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