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특별외전 9. 공항에서 (2)
선우는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해 몸을 옆으로 돌리며 비행기 통로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리를 확인했다. 네 개가 이어진 좌석 중에 가운데에 끼인 자리가 선우의 자리였다.
덩치 좋은 외국인의 무릎으로 막혀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선우는 비좁은 공간을 지나며 말했다.
“익스큐즈 미. 실례하겠습니다.”
두 개의 자리를 지나 중간에 낀 자리에 앉았다. 옆으로 메고 있던 숄더백을 앞으로 돌려 안으며 선우는 후우, 숨을 길게 뱉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작은 창문으로 비행기 날개가 보였다. 정말 떠나게 되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지만.
‘구했습니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명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구했다는 말을 듣는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었다.
가야겠다. 그 생각만 들어서.
‘한 좌석이 남아 있어 구하기는 했는데, 이코노미석입니다. 장시간 비행이 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다고 했다. 고맙다고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부탁했다. 남편에게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혹시 몰라서 왕복표로 준비했습니다. 돌아오시는 비행편은 전무님과 같은 비행편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목이 메어 와 간신히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기고, 몇 번이나 문도가 묵고 있는 호텔의 주소를 확인하고, 구글 지도를 열어 호텔로 가는 길을 더듬어 보았다.
선우가 취리히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4시. 남편이 호텔로 복귀하는 시간은 대체로 저녁 8-9시 근처.
호텔 로비에서 기다릴까. 아니면 룸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문을 두드릴까. 전화를 걸어 문을 열어 보라고 할까. 그때 당신은 나를 어떤 눈으로 볼까.
그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비행편은 내일 오후였다. 선우가 문도와 취리히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하룻밤도 채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잠만 자고 일어나 다시 공항으로 가야 할 테지만, 그렇게 결혼기념일이 다 가도록 하늘을 날아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할 테지만.
돌아오는 내내 함께할 수 있을 테니.
준비를 마친 선우는 곤히 잠이 든 규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장 여사에게도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겼다. 깜깜한 길을 달려 공항에 도착했을 땐 부옇게 동이 트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걸려 왔던 모닝콜은 일부러 받지 않았다. 씻느라 받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시험 감독 스케줄이 있어 일찍 나간다는 말도 남겼다.
잘 자고, 일어나서 다시 연락을 달라는 말로 메시지를 끝냈다. 아마도 문도가 일어났을 때쯤엔 하늘 위를 나느라 전화를 받지 못하겠지만, 한국 시간으로 새벽이니 그러려니 할 거였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이내 이륙을 시작한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를 달렸다. 선우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둔 뒤, 머리를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날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내려온 송정태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옆에서 하품을 쩍 하며 내려오는 강선욱 과장 얼굴 역시 푸석푸석했다.
“굿모닝입니다. 전무님.”
넓은 접시 가득 빵과 햄, 치즈와 계란을 담아 온 송정태가 앞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했다. 우유에 시리얼만 담아 온 강선욱도 옆자리에 앉았다.
“스케줄도 없는데 일찍 일어나셨네요.”
보름 동안 누적된 피로는 어쩌지 못하겠는지, 송정태는 말꼬리에 하품을 붙이고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일찍까지는 아니고, 제시간에 일어났습니다.”
문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진한 커피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회의 준비며 이동 준비를 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여유 있는 아침이었다.
“어우 죽갔네. 풀악셀로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니까 몸이 왜 이렇게 뻑적지근한지. 강 과장, 우리 공항 갈 시간도 남았는데 한 바퀴 뛰고 올래? 강 따라서 쭉 한 바퀴 어때?”
“대체……. 몸이 뻐근한데 왜 달리기를 하세요?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뛰자, 몇 번을 선욱에게 치대던 송정태가 빵을 반으로 갈라 버터를 듬뿍 바르며 말했다.
“할 땐 빡셌는데, 일찍 끝나니까 여유롭네요. 아, 사모님은 뭐라세요? 일찍 돌아간다니까 좋아하시죠?”
“글쎄요. 아직 말을 안 해서.”
“네? 아니,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라면서요. 선물을 그렇게 사셔 놓고 왜…….”
송정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렸다. 송정태의 말대로 매일 녹초가 되어 진행했던 계약이 어제를 기점으로 마무리되며 유럽에서의 모든 스케줄이 끝났다.
“아, 서프라이즈, 서프라이즈 하시려고 그러시는구나.”
스스로 납득해 버린 송정태가 커다란 햄을 입에 넣더니 짜다고 진저리를 쳤다. 문도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을 했다.
일정이 빨리 끝나 하루 먼저 돌아가게 되었다고, 아마도 화요일 저녁 6시면 도착을 할 것 같다고 전화를 하며 선우에게 알려 주려 했었는데 받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 씻고 나와 보니 메시지가 몇 통 들어와 있었다. 씻느라 못 받았다는, 시험 감독을 하러 학교에 가야 한다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잘 자고, 오늘 하루도 잘 보내라는 선우의 메시지를 읽으며, 이대로 모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프라이즈.
아슬아슬하게 결혼기념일 저녁에 도착하는 게 서프라이즈가 될 수 있을까 싶지만,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담담하게 잘만 지내는 이선우가 그리 놀랄 것 같지도 않지만.
“팀장님.”
강선욱이 송정태를 불렀다.
“왜?”
“레고가 스위스 거였나요?”
“어…… 글쎄다.”
“건물이 희한하게 레고를 닮지 않았나요?”
“어……. 이상하네. 우리 전에 언제 이런 얘기하지 않았냐?”
“아. 맞네. 전에도 했었네요. 어쩐지 갑자기 레고 생각이 난다 싶었네.”
그때 어디 거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문도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레스토랑의 창문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오전의 강가에는 백조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좋아해요, 전무님.’
유구한 역사의 호구 유전자를 증명했던 날이 떠올라 문도는 피식 웃었다. 끊어 내려고 그렇게 길게 염병첨병을 떨어 놓고는,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에 다 날려 버렸지.
생각해 보면 참 자존심도 없었다. 하루라도 더 버텨 볼 것이지, 10분도 안 되어서 다시 전화를 걸어 바로 계속하자고, 그 여름, 밤마다 이선우를 찾아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작은 방, 좁은 침대에서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던 기억도.
아주 눈이 멀었더랬지.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덴마크, 덴마크였네.”
4년 전과 똑같이 검색을 하고 나서야 덴마크라고 말을 하는 송정태였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먼저 출발하는 멤버는 두 분뿐이죠?”
“예. 오 대리랑 이 대리는 하루 더 쉬겠답니다. 6시 비행기니까 저희는 넉넉잡아 3시에 호텔에서 출발하면 되겠어요.”
“그럼 쉬셨다가 이따 3시에 로비에서 뵙죠.”
“네.”
드디어 집에 가네, 정태가 길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하루를 쉬어도 집에서 쉬어야 쉬는 것 같다는 목소리를 들으며 문도는 식당을 나섰다. 지금쯤 학교에서 돌아와 규원이 저녁 준비를 하려나.
문도는 시간을 가늠해 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선우와 규원이 활짝 웃고 있는 바탕화면을 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일이면 선우를 만날 수 있었다.
* * *
쿠쿵.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으며 기내가 크게 흔들렸다. 아래위로, 양옆으로 몸이 흔들리는 동안 비행기는 활주로를 달리다 이윽고 멈추어 섰다.
선우는 후우, 숨을 내쉬며 안고 있던 가방을 한 번 더 챙겼다. 떨어뜨린 것은 없는지 주위도 살펴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짐을 꺼내려 발돋움을 하는 사람들 틈새에 끼어 선우는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에는 공항의 메인 터미널로 가는 셔틀 트레인을 타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셔틀 트레인에 오른 선우는 손잡이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도착을 한 셔틀 트레인의 문이 열렸다.
선우는 우르르 사람들과 뒤섞여 내렸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사이에 끼어 계단을 올라가고 있자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도착했구나.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던 기내에서는 여전히 어딘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공항 터미널에 발을 디디고 나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는 취리히.
그녀의 남편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문도는 체크인 카운터가 있는 출국동을 향해 걷는 중이었다.
“체크인 줄이 길지 않아야 할 텐데요.”
마음이 급한지 송정태가 서둘러 걸었다. 강선욱이 급할 게 뭐 있냐는 목소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시간 있는데 천천히 가도 되지 않아요? 어, 저기 커피하우스 있다. 커피 한잔 사 올까요?”
“체크인 해야지, 수화물 보내야지, 출국심사에 보안 검색까지. 서둘러야 해. 나 우리 경아 선물 아직 못 샀다고, 면세점에서 뭐라도 사고 비행기 타기 전에 햄버거라도 먹으려면 빠듯해.”
“그러게 시간 될 때 사 두시라니까.”
“바빴잖아. 인마.”
면세점이 급하다는 송정태가 성큼성큼 걸었다. 문도는 먼저 가라 손짓을 한 뒤 핸드폰을 꺼냈다. 선우는 몰라도 장 여사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
- 네, 전무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이 늦은 시간에.
“저 지금 출발합니다.”
- 예?
화들짝 놀라는 목소리에 문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이 일찍 끝나서 하루 먼저 출발해요. 내일 도착하면 선우랑 밖에서 저녁 먹을 거니까, 식사는 준비하지 마시라고요.”
- 아니…….
“선우는 모르고 있으니까 나 간다는 이야기는 말고요.”
- 그……래요.
“전무님, 이쪽입니다!”
장 여사의 대답이 정태의 목소리에 가려졌다. 문도는 전화를 끊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걸 어째. 못 만나는 거 아닌가 몰라.”
장 여사만이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