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특별외전 8. 공항에서 (1)
베개 밑에서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선우는 잠에 취한 채로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벌써 아침이 되었을까.
“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다. 잠이 깨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니 멀리에 있는 문도가 짧게 웃었다.
“자고 있었어?”
“이제 깼어요.”
선우는 대답을 하며 침대에 등을 기대앉았다. 아이를 꼭 끌어안고 누웠어도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뒤척이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깨는 바람에 두 시간 정도를 뒤척거리다, 동이 틀 때쯤 다시 눈을 붙였다.
짧은 아침잠에 취해서인지 눈꺼풀에는 풀이 말라붙은 것 같았고, 머리는 무거웠다. 그래도 선우의 입가에는 가늘게 미소가 그려졌다.
“당신은 이제 쉬려고요?”
- 응.
취리히와 서울의 시차는 여덟 시간. 늦은 밤이 되면 문도는 선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두 사람 모두 시간에 쫓기지 않고 통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때뿐이라 문도는 하루를 마치며, 선우는 하루를 시작하며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 먹었어. 만찬이 있었거든.
내쉬는 문도의 숨소리가 느릿했다. 선우는 문도에게 물어보았다.
“술도 마셨어요?”
- 조금.
조금이 정말 조금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문도가 물었다.
- 규원이는?
“잘 자고 있어요.”
- 옆에 있어?
“네. 저쪽으로 굴러가 있지만요.”
온 방을 돌아다니며 자는 규원을 생각했는지 문도가 웃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 너는?
“저도 잘 지내죠.”
- 나 보고 싶지는 않고?
장난처럼 물어 오는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거짓이었을 때는 잘만 나왔던 보고 싶다는 말이, 빨리 돌아오라는 그 말이 목 끝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마른침만 넘긴 선우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며칠만 있으면 돌아오잖아요.”
- 그건 그렇지.
“아, 어제부터 티라노사우르스 읽고 있어요.”
- 얜 또 뭘 잃어버렸는데?
문도의 시니컬한 목소리에 선우는 웃음을 참으며 답했다.
“초록색 풍선이요.”
- 칠칠치 못한 공룡들 같으니.
툭 내뱉는 말에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가슴 아래께가 저릿거렸다.
문도에게 말한 대로 티라노사우르스는 초록색 풍선을 잃어버렸다. 초록색 풍선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티라노사우르스에게 사자 친구는 파란색 풍선을 선물로 주었다. 너구리 친구는 빨간색 풍선을 선물로 주었다.
그렇게 친구들이 건넨 보라색, 분홍색, 노란색 풍선이 차례차례 티라노사우루스의 앙증맞은 앞발에 쥐어졌고, 양손 가득 색색의 풍선을 쥐게 된 티라노사우르스는 하늘을 날아 저 멀리 산꼭대기에 걸려 있는 초록색 풍선을 찾게 된다.
나도 색색의 풍선을 쥐게 되면 당신에게 날아갈 수 있을까. 둥실둥실 밤하늘을 날아 내려앉은 곳이 당신이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선우가 그렇게 생각을 할 때였다.
- 오늘 막공하는 날이라고 했지?
“네.”
첫 공연이라며 문도가 꽃을 사 들고 왔었던 발레극 ‘하백’은 오늘로 막을 내린다. 45일간 이어졌던 공연의 피날레가 오늘이었다.
- 바쁘겠네.
“아마도요. 회식까지 참여해야 해서 늦을 거 같아요.”
마지막 공연의 막이 내릴 때까지 기획팀과 함께 지켜보기로 했다. 회식까지 하고 나면 자정 즈음에야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 내일모레였지? 결혼기념일.
“네. 출장 다녀오면 맛있는 거 먹어요.”
- 그래.
문도의 대답을 들으며 선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는 초록 잎이 싱그럽게 돋아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사실은 호텔 숙박권을 예약해 두었다. 여행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해서 하룻밤만이라도 둘이서만 지내보려고 예약을 했는데, 그다음 날 바로 문도의 출장 스케줄이 잡혀 버렸다.
- 갖고 싶은 거 생각해 놔.
“그럴게요. 당신도 생각해 놔요.”
선우의 대답에 문도가 피식 웃었다. 그리 길게 대화를 나눈 것 같지 않은데 시간을 보니 벌써 7시가 넘어 있었다. 취리히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일 거였다.
“늦었어요. 전화 끊고 얼른 자요. 피곤할 텐데.”
다시 침묵이 흘렀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서 끊어야 하는 것을 아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수화기만 붙들고 있는 사이 째깍째깍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정말 인사를 하고 끊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 선우야.
문도가 선우를 불렀다. 불리는 이름에도 가슴이 저릿거렸다. 선우는 괜스레 시트를 만지작거리다 대답했다.
“네.”
- 보고 싶어.
느릿한 목소리가 마음을 휘감는다.
나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마음이 너무 크면 뱉어지지 않는다는 걸 선우는 처음으로 알았다. 입술만 벙긋거리는 사이 달칵,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꾹 쥔 선우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 * *
마지막 공연의 배우와 무용수들이 커튼콜을 하고, 기획했던 이임선 교수와 무대를 연출했던 정찬주 감독이 마지막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발레극 '하백'의 막이 내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뮤지컬. 다양한 장르의 배우들이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말을 하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막공을 기념한 전체 회식은 한우갈비집을 통째로 빌려서 진행을 했다.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대화를 나누는 왁자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선우 너도 고생 많았어. 수업 보조하랴, 내 비서 노릇하랴. 고생했다. 한잔 받아.”
“교수님이 제일 고생하셨죠.”
선우는 교수가 따라 주는 맥주를 한 잔 가득 받으며 말했다.
“수업 자료까지 챙기느라 힘들었지?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부쩍 힘이 많이 드네. 다음 주 학부 애들 중간고사 기간이지?”
“네. 스케줄 나왔는데, 금요일 2시에 304호로 잡혔어요. 전날 한 번 더 알려 드릴게요.”
“그래. 그때까지 나도 쉬고 너도 쉬자. 수업도 없는데 푹 쉬었다가 그다음 주에 봐. 시험 감독은 정운이 시킬 테니까.”
뜻밖에 주어진 휴가에 선우는 눈만 깜빡였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만 하자 이임선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애 엄마가 방학에 쉬지도 못했잖아. 일주일만 푹 쉬고 와.”
“아……. 네……. 감사합니다.”
“건배나 한번 하자. 끝나니까 후련하네.”
선우는 교수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내미는 유리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휴가. 뜻밖의 단어가 시원한 맥주와 함께 목을 타고 내려갔다.
잔을 내려놓으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갈 수 있을까?’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선우는 스케줄 어플을 열었다.
지금이 일요일 밤. 남편이 돌아오는 건 수요일 저녁. 결혼기념일은 화요일.
선우는 술을 마셔 어지러운 머리로 시간을 계산했다. 만약 내일 비행기로 출발을 하면……. 그러면…….
문도는 취리히까지 가는 데 열여섯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지금 떠나 열여섯 시간이 걸려서 취리히로 간다고 해도, 몇 시간 뒤 곧바로 다시 열여섯 시간이 걸려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을 따져 보는 동안에도 말도 안 되는 짓이라 생각했다. 고작 몇 시간 더 일찍 남편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건, 그러는 건…….
무엇보다 가능하지 않을 거였다. 내일 당장 출발하는 인천발 취리히 도착 비행기라니.
그럼에도 선우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핸드폰을 들었다. 검색어를 한 글자 한 글자 써 넣었다.
4월 25일 인천 취리히 항공 노선.
떨리는 손으로 검색 버튼을 눌렀다. 빙글빙글 작은 동그라미가 돌아가더니 주르륵 시간표가 떴다. 쿵쿵 선우의 심장이 뛰었다.
취리히로 떠나는 비행기는 대부분 새벽에 있었다. 그것도 1시 아니면 2시. 회식이 끝나 가는 지금 시간이 자정이니, 아무리 빠르게 서둘러도 한 시간 안에 비행기를 탈 수는 없었다.
선우는 항공 스케줄이 적혀 있는 화면을 계속 아래로 내렸다. 하나쯤은 시간이 맞는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일 오전에 아니면 오후에라도 떠나는 비행기가.
리스트를 아래로 내리던 선우의 손이 멈추었다. 있었다.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인천발 취리히행 비행기가.
부다페스트를 경유하는 항공편은 취리히까지 열다섯 시간 십오 분이 걸린다고 쓰여 있었다. 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스케줄표를 눌렀다. 가입을 하느라 이런저런 것들을 입력하고 구매창을 눌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아 있는 항공표는 하나도 없었다. 선우는 등을 벽에 기대고 물러앉아 각종 항공사와 티켓 플랫폼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나만, 딱 한 자리만.
이젠 곧 돌아올 사람을 마중하기 위해 열다섯 시간을 날아가는 일이 더 이상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보고 싶어.’
생각나는 건 깊은 밤을 날아왔던 남편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목 끝까지 차올랐던 자신의 마음. 차마 뱉을 수도 없었던,
보고 싶다는 그 마음 때문에.
“후우…….”
모든 플랫폼의 검색을 마친 선우는 힘없이 머리를 벽에 기댔다. 그사이 취소가 되는 표가 있을까 싶어서 몇 번을 다시 눌러도 소용이 없었다.
점점 더 소란해지는 회식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선우는 문득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핸드폰을 열고 빠르게 연락처를 찾았다.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자정에 가까운 시간인데 전화를 걸어도 되나. 짧은 망설임을 뒤로하고 선우는 버튼을 눌렀다. 두 번 만에 전화를 받는 목소리에 안도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명 실장님.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혹시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 비행기표 말씀이십니까?
명 실장이 조금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내일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인천발 취리히행 비행편이요. 제가 알아본 곳에서는 전부 좌석이 없는 것으로 나와서요. 이런
일로 밤늦게 연락드려서 죄송한데, 부탁드릴게요.”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 장이면 되는 거죠?
“네. 네.”
-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나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있다니. 그래도 가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선우는 마지막 남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며 명 실장의 연락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