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특별외전 7. Happy birthday to you (3)
달칵.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선우는 천천히 잠에서 깼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쌔근쌔근 자고 있는 규원이 보였다.
선우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정전이 된 것처럼 까맣기만 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지 창문 쪽이 푸르스름한 어둠이었고, 규원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젯밤 문도가 비스듬히 누워 있던 자리였다.
몇 시나 되었을까. 아직 새벽 같은데.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보니 5시가 조금 넘었다. 선우는 잠이 든 규원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머리를 묶으며 거실로 나온 선우는 주방에 들러 물을 한 잔 따랐다. 밤사이 깔깔해진 목을 축이는데 규원에게 책을 읽어 주던 문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가방아, 가방아 어디 있니.’
‘어딘니.’
선우는 작게 웃었다. 강약도 없고 고저도 없이 책을 읽어 주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눈이 저절로 감겼던 게 기억이 났다. 규원이를 재우고 나서 선물을 주겠다고 이야기를 했던 것도.
늦어도 출근 전에는 전해 줘야지.
물잔을 내려놓은 선우는 아직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한 남편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작은 박스를 뒤로 감춘 선우는 문도를 드레스룸에서 발견했다. 깨끗한 흰색 셔츠를 걸쳐 입은 문도가 단추를 잠그다. 말고 흘깃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픽 웃더니 마저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뭐 하러 일어났어.”
잠에서 덜 깨었을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선우는 잠시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3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순간이면 한 번씩 예전의 어리숙한 이선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서문도 전무와 시선이 마주치면 목이 막혀 와 할 말을 잃었던 그때의 이선우로,
선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기만 하자 문도가 성큼 걸어 선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파란 어둠 속에서 조금 더 깊게 시선이 얽혔다.
“선물……주려고요.”
선우가 뒤로 감춘 선물 박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문도가 한 발을 더 다가오며 물었다.
“지금?”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가 한쪽 입매를 올리며 비스듬히 웃었다. 커다란 창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푸르스름한 여명의 빛이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늦었지만, 고맙게 받을게.”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 쥐는 순간,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물렀다. 푸른 새벽이 담긴 것 같은 문도의 시선이 가까워지고, 이어 입술이 내려앉았다.
가볍게 닿았나 싶더니 곧바로 입술이 물리며 숨이 섞였다. 혀가 거침없이 들어와 깊은 안쪽부터 아릿할 정도로 휘어 감았다.
정제되지 않은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입맞춤에 선우는 조금씩 뒤로 밀렸다. 키스는 선우의 등이 한쪽 벽에 닿았을 때 잠시 멈추었다.
“아……. 선물……을.”
“받고 있잖아.”
문도가 말하며 선우가 입고 있는 잠옷의 단추를 풀었다. 순식간에 두 개가 풀어지고 세 개째의 단추가 풀리려는 순간, 선우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문도에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진짜 선물이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문도에게 붉은색 상자 하나를 건넸다. 문도가 묘한 얼굴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당신한테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서 주고 싶은 걸로 샀어요.”
필요한 건 이미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선물을 고르는 데도 오래 걸렸다.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린 케이스에는 오래전에 문도의 카드로 선우가 샀었던 그 시계와 커플로 찰 수 있는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피식.
문도의 김 빠진 웃음에 선우도 웃었다.
“비싼 거 샀네.”
“채워 줄게요.”
선우는 선반 위에 시계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순순히 내어 주는 손목 위에 시계를 채우는데, 문도가 고개를 숙였다.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며 방해를 한다.
쏟아지는 장난스런 입맞춤을 피해 가며 간신히 시계를 다 채운 선우는 눈을 들어 문도를 올려다보았다. 문도의 시선이 잠시 손목의 시계에 닿았다가 다시 선우에게 향했다.
“고마워. 그런데 선우야, 그거 알아?”
뭘 아느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문도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나 어제 스테고사우르스 가방 네 번 찾아 줬어.”
쿡, 하고 웃음이 터지는 순간 시계를 찬 손이 선우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호텔 룸넘버나 남겨 줘. 힘들게 생일상 차리지 말고.”
“힘들지 않았어요.”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힘들지 않았다. 몸이 피곤하긴 했지만 그건 익숙지 않은 일이라 그런 거고,
“너 어제 코 골았어.”
문도의 말에 선우의 얼굴이 빨개졌다. 농담이겠지? 진짜 코 골았나? 기억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문도는 당황한 선우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어제의 선우는 숨소리도 새근새근 예뻤었다. 물론 코를 골았다 해도 무척 귀여웠을 테지만.
“나한테 필요한 게 뭔지 알아?”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선우.”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문도가 말했다.
“부족한 것도……. 이선우.”
문도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한 번 더 삼켜지며 다시금 혀가 밀려들었다. 깊고 짙은 입맞춤이 이어진다. 선우의 숨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언제쯤 너를 실컷 가져 볼 수 있을까.”
느리게 입술을 뗀 문도가 말했다. 선우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문도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를 셋쯤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으면, 그렇게 30년쯤 흐르면, 그때쯤엔 네가 좀 지겨워지려나.”
문도의 엄지손가락이 선우의 입술을 옆으로 쓸었다. 뭉개지듯 밀려나는 붉은 살점 위로 문도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만 보면 옷부터 벗기고 싶은 마음도 좀 줄어들고 그럴까?”
아니.
선우는 다시금 밀려드는 혀를 받으며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내가 늘 당신에게 떨리듯이, 당신도 내게 떨렸으면 좋겠다고,
창문 밖으로 4월이 밝아온다.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에는 둘이서만 여행을 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문도의 목에 팔을 감았다.
* * *
시간이 흘러 어느새 연둣빛 잎들이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세상이 온통 연초록으로 물든 것 같은 날.
“바람이 따뜻해서 이제는 얇게 입어도 춥질 않네요.”
햇볕이 환하게 들어오는 봄날의 오후에 장 여사가 열린 창문을 통해 말했다. 선우는 주방 창문으로 장 여사가 건네주는 소쿠리를 받아 들었다. 초록색 잔디와 아기자기한 꽃들로 꾸며진 뒤뜰에는 장난감 물뿌리개를 들고 있는 규원이 있었다.
“규원이 지금 물 주고 있는 거야?”
규원이 응, 하고 대답을 하며 코끼리 모양의 물뿌리개를 기울였다.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며칠 전 심은 토마토 모종 위로 뿌려졌다. 규원은 요즘 오후마다 장 여사를 따라 나가 밭에 물을 주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여사님, 이게 머위잎이죠?”
선우는 소쿠리에 담긴 넓은 잎을 보며 장 여사에게 물어보았다. 장 여사가 장갑을 낀 손으로 흙이 묻은 옷자락을 툭툭 털며 말했다.
“시골에서 몇 뿌리 캐다가 담장 아래에 심었더니 이렇게 많이 번졌네요. 먹을 사람도 없는데 너무 많이 땄다.”
쓴맛이 나는 머위잎을 좋아하는 남편은 열흘이 넘도록 출장 중이었다.
“결혼하고서 이렇게 긴 출장은 처음이죠?”
장 여사의 말에 선우는 데,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렇게 긴 출장은 처음이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출장이 잦은 문도였지만, 2주가 넘도록 집을 비운 적은 없었다. 그 말은 곧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잘 지내신대요?”
“네. 잘 지낸대요. 바쁘기도 하고요.”
드문드문 들려주는 일 이야기는 잘 모르는 선우가 듣기에도 빡빡했다. 계약 조건을 두고 몇 시간씩 마라톤 회의를 하는 건 다반사인 듯했다. 게다가 나라를 이동하느라 더 정신없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독일 드레스덴이었다가, 어제부터는 스위스 취리히였다.
“옆에 없으니까 허전하고 그렇죠?”
선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한집에 있어도 밤이 되어서나 조금 길게 얼굴을 볼 수 있는 남편이었다. 공장을 짓고 있는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쪽으로 며칠 짧은 출장을 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며칠씩 떨어져 있는 것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며칠이 일주일을 넘기고 2주를 넘어가니 때때로 멍했고, 음식은 맛이 없었다. 밤은 너무 길고 시간은 종종 멈춘 듯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오는데요.”
그래도 겉으로 의연한 척 말을 해 보았다. 바쁜 낮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기도 했으니까.
막공에 다다르고 있는 공연에도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았고, 중간고사용 공연을 준비 중인 학부생 후배들을 도와줘야 하는 일도 많았다. 집에 돌아와 규원을 먹이고 씻길 때까지도 괜찮았다.
규원을 재우고 밤이 내려오면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아침이 되면 하루의 일과를 끝낸 문도가 전화를 걸어올 것을 알아도, 목소리를 듣고 서로의 안부를 전할 것을 알아도…….
마음이 앉을 자리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선우는 다른 일들로 시간을 채우려 노력 중이었다.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란다는 교수님을 대신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규원을 씻기고 재우는 일도 꼬박꼬박 선우가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의미 없는 수다를 많이 떨었고, 얼마 전에는 숙소동 조리사 아주머니와 함께 손뜨개도 다시 시작했다.
“낼모레가 결혼기념일인데, 전무님이 없어서 어째요.”
“여사님이랑 맛있는 거 먹으면 되죠.”
선우의 말에 장 여사가 실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다녀오면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해요. 선물도 잔뜩 사 오라고 하고.”
“네. 그럴게요.”
선우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앞으로 다섯 밤. 다섯 밤만 지나면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