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특별외전 6. Happy birthday to you (2)
잡채, 불고기, 샐러드, 국과 밥, 배추김치와 깍두기.
분명 쉬지 않고 바쁘게 많은 요리를 한 것 같은데, 차려 놓고 나니 이상하게도 단출해 보였다.
게다가 열심히 할 때는 몰랐는데, 잡채는 장 여사가 해 주었을 때보다 윤기가 덜했고 면은 불어 있었다. 불고기도 당근과 파, 버섯 같은 야채가 색색으로 들어 있지 않고, 간장에 절인 듯 거무튀튀하기만 했다.
깨를 더 많이 뿌릴 걸 그랬다. 선우는 어딘가 비어 보이는 식탁을 바라보다 문도에게 물었다.
“조금 허전하죠? 밑반찬을 더 놓을까요?”
“됐어.”
“김치라도 몇 개 더…….”
규원을 식탁 의자에 앉힌 문도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앉아. 충분하니까.”
몇 번이나 냉장고 쪽을 돌아보던 선우는 마지못해 문도의 맞은편에 앉았다. 멸치볶음이라도 꺼내 놓을걸. 살짝 후회를 하는데 규원이 숟가락으로 미역국을 떠서 후우 불었다.
“잘 먹을게.”
규원에 이어 문도도 숟가락을 들었다. 선우는 살짝 긴장한 마음으로 문도가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까 간을 보긴 했는데, 계속 맛을 보다 보니까 잘 모르겠더라고요.”
미역국에 이어 불고기를 집는 문도를 보며 선우는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 불고기는 유튜브 레시피 참고했어요. 조리사 아주머니께도 물어보고요. 계량대로 하긴 했는데.”
“맛있어.”
문도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는 정말 괜찮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선우에게 한 번 더 말했다.
“맛있으니까 먹어. 만드느라 고생했을 텐데.”
“규원이도 맛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규원을 본 선우는 젓가락을 들어 조금씩 다시 맛을 보았다. 불고기에서는 불고기 맛이 났고, 윤기가 조금 덜한 잡채에서도 많이 먹어 본 그 맛이 나기는 했다.
“많이 먹어요. 규원이도 많이 먹어.”
선우는 작게 잘라 놓은 불고기를 규원의 밥 위에 얹어 주었다. 그 모습을 흘깃 보는 문도에게도 불고기 한 점을 올려 주었다. 피식 웃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선우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주방은 조금 너저분하고 상차림은 어딘가 부족해 보였지만. 거실은 많이 지저분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송 배어 나왔지만.
이만하면 성공적인 생일 상차림이라고 여겨도 될 것 같았다.
밥을 먹은 뒤에는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선우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노래를 불렀고, 규원이가 마지막 단어만 따라서 불렀다.
이번에도 규원 때문에 촛불은 세 번을 껐다. 반 토막으로 줄어든 촛불에 다시 불을 붙인 선우는 문도에게 말했다.
“이제 소원 빌어야죠.”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선우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문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짧게 소원을 빌고 눈을 뜨자 선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또 있어?”
이만하면 행사를 끝낼 때도 되지 않았다.
“규원이 케이크 잘라 주고 있어 봐요. 금방 가져올게요.”
총총 사라진 선우가 냉장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나타난 이선우는 샴페인과 미리 잘라 놓은 과일을 들고 있었다.
아주 코스대로 준비를 했네. 문도는 한 번 더 웃음을 삼켰다.
이 집에서 생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따로 약속을 잡아 식사를 하는 일도 드물었다.
스케줄이 맞을 때나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정도였는데, 무겁게 먹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데다 불고기나 잡채 같은 잔치 음식을 좋아하지도 않아서 아침상에 미역국이 나오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이렇게 정직하고도 보편적인 생일상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자신이 웃음을 참는 줄도 모르고 세워 놓은 계획을 우직할 정도로 성실히 실행하는 선우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유혹조차 성실했던 이선우, 어설퍼도 멈추지 않았던 이선우. 어떨 때는 바보 같고 어떨 때는 미련했던 이선우.
선우는 그가 민우의 핸드폰을 별채에 두지 않았을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집 안 어딘가에 핸드폰이 있을 가능성이 1%라도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몰라서. 그 막연한 희망이라도 붙들어야만 해서. 포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력을 해 본 뒤에야 할 수 있는 거라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선우는 그렇게 미련했고, 그렇게 포기를 몰랐다.
외롭고 지친 마음을 기댈 곳이라곤 서문도밖에 없었음에도, 그에게 기대기만 하면 편해질 수 있었음에도, 선우는 동생의 핸드폰을 찾겠다는 의지를 끝끝내 놓지 않았다.
그에게 마음을 전부 주어 놓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흔들려 휘청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에 눈이 멀지 않는 너라서.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너라서. 그런 너여서.
관심은 끌림이 되었고, 끌림은 사랑이 되었다.
“백화점 지나가다가 지난번에 마셨던 와인 생각이 나서 사 봤어요. 케이크나 디저트랑 잘 어울리는 걸로 골라 달라고 했는데, 생일이라고 하니까 샴페인으로 골라 줬어요.”
“지난번에 좋았지.”
문도는 샴페인을 따며 말했다. 그 말에 선우의 얼굴이 옅게 붉어졌다.
“오늘도 기대할게.”
한 번 더 얼굴을 붉히는 선우에게 샴페인을 따라 주었다. 포그르르 올라온 기포가 톡톡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건배를 했다.
“생일 축하해요.”
선우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치워야 하는 그릇들은 늘어만 가고, 크림을 입가에 묻혀 가며 케이크를 먹는 아들은 꼬질꼬질하고, 이선우는 점점 초췌해지고 있지만.
“고마워. 이런 생일은 처음이야.”
선우가 다행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다음부터는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을 해 주려다, 그 미소가 너무 뿌듯해 보여 문도는 말없이 미소만 지으며 샴페인을 마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규원이 재워야 하는데.”
어느덧 9시를 넘긴 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질러진 식탁 위와 주방, 거실을 돌아보고는 마른세수를 하듯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내가 할 테니까 선우 너는 규원이 씻겨.” “아니에요. 당신 생일인데 내가 해야죠.”
선우가 생일인 사람에게 뒷정리는 시킬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규원이 재울 준비해 줘요.”
문도는 생크림을 입가에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시터 이모님과 장 여사가 살뜰히 입히고 씻겨서 언제나 말끔했던 아들은 오늘따라 꾀죄죄했다.
“시터 이모님도 휴가를 드렸다고?”
“네. 당신 생일이라서.”
선우가 빈 그릇을 포개며 말했다. 그렇지. 오늘이 내 생일이지. 문도는 생일을 다시 한번 언급하는 선우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우리 셋이서 오붓하게 보내는 게 좋을 거 같았거든요.”
오붓하게 고생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하며 문도는 식탁 의자에 앉은 아들을 빼 들었다.
“씻자. 아들.”
* * *
문도는 규원을 씻기며 같이 샤워를 했다. 그사이 주방을 정리한 선우는 문도가 나온 뒤에야 씻고 오겠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서규원 이리 와.”
문도는 아들의 몸에 로션을 발랐다. 통통한 볼에도, 작은 손에도 로션을 발라 주고 잠옷을 입혔다. 1층 침실에 가습기를 틀고, 조명을 낮추어 두었다.
“공룡 책 이리 가져오고, 블록은 이 상자에 넣어.”
말끔해진 아들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와 흐트러진 장난감을 정리했다. 동화책을 모아 오라 시킨 뒤, 문도는 레고 블록을 통에 넣었다. 점점이 흩어진 쌀튀밥까지 대강 정리를 하고 일어서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선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 중에서 딱 한 권만 골라.”
시터 이모님이 없는 지금, 서규원을 얼른 재워야 ‘셋이서 오붓하게’를 끝내고 ‘둘이서 오붓하게’를 실현할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스테고사우르스 책을 고른 규원을 안아 들고서 선우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사방이 보호 가드로 둘린 커다란 침대 위로 올라간 선우가 하아,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불고기하고 잡채 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 누우니까 너무 좋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문도는 스테고사우르스 책을 펼치며 말했다.
“이다음으로 준비한 것도 있는 거지?”
“다음이요?”
“생일인데 선물은 줘야지.”
사실 다 필요 없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선우가 목에 리본을 두르고 오늘 밤은 내가 선물이라고만 해 준다면.
하지만 수줍음 많은 선우가 그런 도발적인 선물을 준비할 리는 없으니, 차고 있는 리본 모양의 목걸이만 남도록 이선우를 벗기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데.
“아, 선물. 준비했어요. 잊어버릴 뻔했네.”
피곤한 눈을 하고도 맑게 웃는 걸 보니 그가 기대하는 선물과는 거리가 먼 선물을 준비했나 보다.
“이따 올라가서 줄게요. 규원이 재우면…….”
선우가 옆으로 팔을 괴고 누우며 말했다. 선우가 토닥토닥 규원의 배를 다독이는 모습을 보며 문도는 신속하게 책을 열었다. 일단 규원이부터 빨리 재워야 했다.
“스테고사우르스는 가방을 잃어버렸어요. 노란 나비가 그려진 가방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가방 안에는 칫솔이랑 컵, 쿠키와 우산이 들어 있었어요.”
문도는 쭉쭉 읽어 내려갔다. 어째서 공룡에게 칫솔과 우산, 쿠키 따위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방아, 가방아 어디 있니.”
“어딘니.”
규원이 따라 말했지만, 가방은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파랑새야 내 가방을 보았니?”
“보안니?”
“아니, 못 보았는데?”
“모 뽀안는데?”
“애벌레야, 애벌레야 내 가방을 보았니?”
그때 툭,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눈을 감은 선우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선우야.”
“서누야.”
“자니?”
“자니?”
선우를 불러보았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규원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만이 문도의 말을 메아리처럼 따라 할 뿐이었다.
“선우야, 선우야.”
“서두야, 서누야.”
“일어나.”
“이러나.”
“이러지 마. 내 생일이잖아.”
“이쟈나.”
문도가 피식 웃자 규원도 웃었다.
“다음부터는.”
“느은.”
“그냥 호텔 가는 거다?”
“가능거다아? 긍데 아빠 이거 아니야. 스떼고 아니야. 다시 일거.”
누굴 닮았는지 잠이 없는 서규원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쌔근쌔근 선우의 고른 숨소리만이 야속하게 울려 퍼지는 밤.
문도는 스테고사우르스가 가방을 찾는 이야기를 세 번 더 읽고 나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여러모로 특별한 생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