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특별외전 5. Happy birthday to you (1)
3월의 마지막 날, 선우는 호텔의 베이커리에 있었다. 런치 뷔페가 한창일 시간이라 그런지 라운지가 복작거렸다. 선우는 앞사람이 계산하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딸기 케이크를 예약했는데요.”
“예약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이선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쇼케이스의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오늘의 스케줄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았다.
케이크는 찾았으니까……. 백화점에 들러서 선물을 찾고, 잊지 말고 와인도 사야지. 아, 꽃, 꽃도 사야 해. 4시에는 규원이 놀이학교, 문도 씨가 7시에는 퇴근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선우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이 오후 1시. 계산으로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지 않았다. 침착하게 준비하면 무리 없이 저녁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듯했다.
직원에게서 케이크를 받고 주차장으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핸드백 안의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규원의 놀이학교 전화번호였다.
“네, 선생님. 네네. 제가 4시까지 데리러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평소 데리러 오던 시터 이모님과 기사님 대신 어머님이 오시는 게 맞는지 한 번 더 확인을 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고 한다.
문도의 생일상을 직접 차리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 겸사겸사 시터 이모님에게도 하루 휴가를 드렸다. 세 식구만 오붓하게 생일을 축하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좋아해 줄까. 그랬으면 좋겠다.
생일상을 받은 문도가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시동을 걸었다.
스케줄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한 건 선물을 찾기 위해 들른 샵 앞에 줄을 섰을 때부터였다.
이미 며칠 전에 계산까지 마쳐 놓은 터라 들어가서 찾기만 하면 되는데, 앞서 상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예 기다리는 팀들이 많으면 다른 일을 보고 올 텐데, 선우의 대기 번호는 3번이었다.
생각보다 길었던 기다림이 끝나고 주문해 둔 선물을 찾은 선우는 서둘러 지하의 식품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케이크와 같이 먹기 좋은 와인을 추천받아 사고, 반대편에 있는 꽃집까지 빙 돌아서 갔다.
라넌큘러스 한 단을 사고, 와인에 선물이 담긴 쇼핑백까지 팔에 주렁주렁 걸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시간을 확인하니 3시 반. 여유 있게 규원을 데리러 갈 수 있겠다는 계획은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엄마아.”
아슬아슬하게 4시에 맞추어 간 선우는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는 규원을 안아 들었다.
“규원이가 오늘 엄마가 온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요.”
배웅을 나온 선생님이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온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다며. 가끔씩 이렇게 선우가 데리러 오는 걸 규원이 무척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겸사겸사 데리러 가겠다는 계획을 세운 거였는데, 덕분에 시간이 많이 빠듯해졌다.
선우는 규원을 카시트에 태우고 벨트를 매어 준 뒤 빙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켜고 계기판의 시계를 보니 4시 하고도 20분.
“후우, 규원아 엄마 출발할게.”
선우는 숨을 크게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 아무래도 조금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할 듯했다.
“그러니까……. 간장이 여섯 큰술. 그리고 설탕이…….”
선우는 뒤를 돌아 설탕을 찾았다. 분명 아까 잡채 양념을 만들 때 쓰고서 근처에 두었는데.
인덕션 앞에서 찾은 설탕통을 들고 다시 양념 중이던 불고기 앞에 섰다. 레시피를 메모해 두었던 핸드폰 화면이 까맣게 꺼져 있어 양념이 묻은 손으로 다시 비밀번호를 눌렀다. 기름과 양념이 묻은 액정이 얼룩덜룩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아. 이거.”
잔뜩 풀어 준 레고는 이제 시시해졌는지, 규원이 스테고사우르스가 나오는 책을 들고 왔다.
“규원아 엄마 잠깐 이거 해야 하거든? 규원이 튀밥 먹고 있을래? 엄마 금방 갈게.”
선우는 규원이 좋아하는 쌀튀밥을 꺼내 그릇에 담아 주었다. 저녁밥을 먹기 전에 과자 같은 간식은 자제시키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미역국, 불고기, 잡채, 샐러드, 이 네 가지를 두 시간 안에 하려고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손질되지 않은 재료를 받아서 더욱 그랬다.
당근을 썰다가 미역을 볶았고, 고기 양념을 하다가 당면을 삶았다. 엄마를 도와 주방일을 한 적도 많았고, 자취한 경력도 짧지 않아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네 가지 메인 메뉴를 혼자서 만들어야 하는 건 한 종류의 음식을 만들 때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마음이 조급해서 더욱 그랬는데, 문제는 규원이를 돌봐 가며 해야 한다는 거였다. 덕분에 주방은 금방 어지러워졌고, 규원이 놀고 있는 거실도 마찬가지였다.
“불고기 양념은 다 됐고, 당면만 건지면.”
선우는 당면이 익은 냄비를 들어 채반에 부었다. 삶은 당면의 물기를 털고서 커다란 볼 안에 넣었다.
“엄마 머 해?”
“으응. 오늘 아빠 생일이라서 엄마가 요리해.”
“요이 어똥거?”
“불고기도 하고, 잡채도 하고, 미역국도 끓여. 규원이 미역국 좋아하지?”
까치발을 들어 아일랜드 식탁 위를 올려다보려는 규원을 보며 선우는 비닐장갑을 끼었다.
“엄마 어릴 때 생일이 되면 할머니가 이렇게 해 줬거든. 그래서 엄마도 아빠 해 주려고.”
식구들의 생일이 되면 엄마는 어김없이 불고기부터 재웠다. 그래서 선우는 생일상이라 하면 잡채와 불고기, 그리고 미역국부터 떠올랐다.
엉망이 되어 가는 주방을 보고 있노라니 조리법이 비교적 단순한 파스타 같은 일품요리를 했어야 했을까, 잠깐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생일이니까.
“이거는 당근, 이거는 머야?”
규원이 불린 목이버섯을 보면서 물었다. 아무래도 오늘만큼은 안 되겠다. 강력한 지원군이 필요했다. 선우는 끼고 있던 비닐장갑을 벗었다.
“규원아, 규원이 뽀로로 볼까?”
마지막 수단으로 선우는 규원의 앞에 태블릿을 놓아 주었다. 이제 남은 일은 잡채를 무치는 일과 불고기를 볶는 일.
그다음으로 어질러진 주방을 정리하고 요리하느라 나온 그릇들을 식기 세척기에 돌린 뒤, 꽃을 화병에 꽂고 테이블 세팅을 하면 된다. 아, 그 전에 거실을 치우고.
시간은 좀 빠듯하겠지만……. 어쩌면 많이 빠듯하겠지만……. 괜찮아. 할 수 있어.
선우는 다시 장갑을 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볶아 놓은 야채와 당면에 양념을 비빌 차례였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거실로 향하던 문도의 발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눈앞의 거실이 평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흩어진 레고 블록, 여기저기 놓여 있는 공룡 동화책, 흩뿌려진 하얀색 쌀튀밥. 그 가운데에 규원이 앉아 미간을 모으고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서규원.”
문도의 목소리를 들은 규원이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표정을 짓는 아들을 향해 걸어가는데 파삭 소리가 나며 발끝에 무언가가 밟혔다. 슬리퍼 바닥에 흰 튀밥이 붙어 있었다.
“엄마는?”
규원의 고개가 돌아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아일랜드 아래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아, 왔어요? 잠깐……만요.”
선우가 잠깐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문도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달달한 불고기 냄새가 진동을 하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꺼냈다.”
선우가 아일랜드 아래에서 꺼낸 건 길쭉한 타원형 형태의 접시였다.
“거의 다 했어요. 잠깐이면 되니까…….”
커다란 볼에 듬뿍 담긴 잡채를 그릇에 옮겨 담으며 선우가 말했다. 이번만큼은 혼자 힘으로 차려 보겠다고 하니 내버려 두라는 장 여사의 말을 떠올리며 문도는 주방을 둘러보았다.
다이닝룸의 식탁 한가운데 화사한 꽃이 꽂혀 있고, 앞앞이 수저와 앞접시도 세팅이 되어 있었다. 아일랜드 위와 싱크대 위에는 이런저런 그릇들이 나와 있긴 해도 엉망은 아니었다.
위잉위잉 돌아가는 식기세척기에 제법 괜찮은 냄새를 풍기는 불고기까지. 생각보다 주방은 멀쩡해 보이는데.
선우의 몰골만은 멀쩡하지 않았다.
코밑을 쓱 훔친 뒤에 장갑을 갈아 끼는 선우의 볼에는 깨가 붙어 있었다. 아침에 보았을 때는 반으로 단정히 묶여 있었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하늘색 셔츠에는 양념이 튄 자국들이 있었다.
“뭐 도와줄 건 없어?”
문도는 웃음을 참으며 잡채를 그릇에 담고 있는 선우에게 말했다. 선우가 잠깐 눈을 들어 문도를 보더니 거실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차리기만 하면 돼요. 규원이만 식탁에 앉혀 줄래요?”
문도는 뽀로로에 한껏 집중해 있는 아들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입가에 붙은 쌀튀밥을 떼어 주고 주변에 늘어져 있는 공룡 책을 대충 한곳에 모았다.
“밥 먹으러 가자. 뽀로로 안녕해.”
원 없이 뽀로로를 보고 있던 규원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문도는 뽀요요, 하는 안타까운 소리를 들으며 태블릿PC를 껐다.
“이제 미역국만 뜨면 되니까. 잠깐만 기다려 줘요.”
선우가 티타월에 손을 쓱쓱 닦은 뒤 부지런히 음식을 날랐다. 손끝에 묻은 양념을 빨아 먹기도 하고 그릇의 위치도 다시 조절해 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뭐랄까.
아이는 과자를 입에 붙이고 뽀로로를 보고 있고, 거실은 어질러져 있으며, 생일이라고 불고기와 잡채를 차려 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이선우가 있는 지금의 풍경이 어쩐지…….
언젠가 이야기로 들었던 선우네 가족을 떠올리게 했다.
퇴근을 한 엄마는 뭐라도 만들어 주겠다며 서둘러 요리를 하고, 민우는 옆에서 감자와 양파를 다듬었다고 했었다. 선우는 상을 차리고, 조금 늦게 들어온 아버지는 설거지 담당이었다고.
이선우를 지탱해 주었던, 평범하고 따뜻한 가족.
굳이 힘들여 세 식구만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 했던 선우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지금은 그가, 그리고 그들의 아이가 선우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사랑. 자신이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다 됐다. 오세요.”
선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갈게.”
문도는 규원을 안아 들었다. 오늘 은 그의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