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특별외전 4. 아무 날도 아닌 날 (4)
느슨하게 앉아 있는 선우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와인 두 잔에 목 언저리까지 발긋했다.
문도는 선우가 커다란 창문 너머의 정원을 보며 나른히 눈을 감았다 뜨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와인도 술이라고 발그레 물이 든 뺨이 귀여워서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홍조가 올라온 뺨을 쓸었다. 선우가 피싯 웃는다. 문도도 가볍게 웃었다.
“취했네.”
단정하는 문도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취한 게 아니라, 그냥.”
문도는 선우의 다음 말을 알았다.
“빨개진 거지.”
선우가 새초롬하게 문도를 보더니 금세 다시 피시 웃었다. 그리고 잔을 들어 투명한 살구색 와인을 찰랑찰랑 기울여 보더니 한 모금을 마셨다.
“달지도 않은데 맛있어요.”
청량한 장미 향이 어딘가를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느리게 한 모금을 삼킨 선우는 짭짤한 맛이 도는 생햄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취하진 않았는데 감각이 느슨해진 것 같았다.
이런 걸 알딸딸하다고 하는 걸까.
숨이 조금 뜨거워졌고, 얼굴에는 미열이 올랐다. 선우는 무릎을 세워 머리를 기댔다. 깜빡깜빡 떴다가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남편이 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조금은 무심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와인을 마시고, 손가락으로 올리브를 집었다. 입에 넣으며 그녀를 보았다.
“뭘 그렇게 봐.”
문도가 물었다. 당신, 이라는 대답 대신 선우는 그냥 웃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꺼풀이 깜빡이는 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문도가 다시 물었다.
“왜?”
선우는 조금 더 남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규원이가 딸기를 좋아해요.”
그 말에 문도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 봄에 말이에요.”
대답 없이 그녀를 보기만 하는 남편을 보며 선우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사다 준 딸기가 제일 맛있었어.”
시간이 지나도 서러운 감정들은 남을 줄 알았다. 아이를 지우라 했던 것. 빼앗겠다고 했던 것. 차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왔던 날에 차디찬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억지로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
잊지 못할 상처라 생각했던 감정들은 거짓말처럼 희미해졌다. 대신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어떤 장면들이 오래 남았다.
딸기를 씻어 주던 문도의 뒷모습. 붉은 딸기가 종류별로 한 알씩 놓여 있던 둥근 접시. 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만둣국. 무덤 같았던 차 안에서 자신을 안아 주었던 남자의 체온 같은 것이.
“킹스베리. 잊혀지지도 않네.”
문도의 말에 선우는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꼭 살구색 달빛을 담아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입 머금고 잔을 내려놓는데 문도가 올리브 한 알을 집어 선우의 입에 가져다 댔다.
선우는 코를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찝찔한 올리브가 사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서 한 번 더 피하는데, 문도가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먹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하다가 웃음이 터지며 몸이 기울어졌다.
문도는 자신의 품에 비스듬히 누워 있게 된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은 예쁘게 휘어져 있고,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먹어 봐. 맛있으니까.”
도리질을 쳐 봐도 풀색 올리브가 입술 가까이에 닿았다. 아직 입가에 웃음이 남은 선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올리브를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당신처럼?”
장난으로 물었는데, 뱉어 놓고 나니 야릇한 말이었다. 문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웃음을 머금은 빤한 눈빛이 선우를 보고 있었다. 전이라면 민망했을 텐데 정말 취했나 보다.
선우는 손을 뻗어 문도의 얼굴을 감쌌다.
아치형으로 휘어 있는 눈썹을 더듬어 보고 속눈썹이 긴 눈꺼풀도 가만히 만져 보았다. 곧게 내려온 콧날을 따라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정점을 그리는 콧방울을 지나 붉은 입술로 손가락을 내렸다.
붉은 입술의 윤곽을 따라 손끝을 움직이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있어 주던 문도가 짙게 한숨을 쉬며 선우의 손을 잡았다. 올리브가 데구루루 바닥을 굴러가고, 선우의 손끝이 붙들렸다.
선우는 문도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만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우는 작게 물어보았다.
“나 춤 안 추면 어떡하려고 연습실 만들었어요?”
문도가 가늘게 웃었다. 와인은 문도가 더 많이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건 조금 억울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문도가 말했다.
“춤추라고 만든 거 아니야.”
“그럼…….”
“누워서 뒹굴거리라고.”
그 말에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는 선우의 얼굴을 문도가 감싸 쥐었다. 선우는 밤하늘처럼 드리워진 남편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비스듬히 비추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나랑 이렇게 술도 마시고, 규원이랑 술래잡기도 해. 친구들 불러서 자랑도 하고, 그러다 내키면 춤도 춰. 그림을 그려도 좋고, 그냥 누워만 있어도 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엄마 이선우 말고, 아내 이선우 말고, 그냥 이선우로.”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을 어루만지는 남편의 손길이 다정했다. 선우는 문도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에 맞추어 문도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입술이 맞물리며 더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닿았던 입술은 이내 벌어지며 깊게 맞물렸다. 뜨거운 혀가 안으로 밀려들어 선우의 숨을 흩트려 놓았다. 아랫배로 더운 열기가 모여드는 것을 느끼며 선우는 문도의 목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깊게 겹쳐진 입술 사이로 열기가 밀려들었다. 숨은 어지럽게 얽혔고 가끔씩 탄성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각도로 고개를 비틀기 위해 문도가 잠시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선우가 흐트러진 숨을 쉬며 문도에게 말했다.
“더…….”
문도는 다시 선우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와인 맛이 묻어나는 입술을 벌리며 혀를 얽었다. 달뜬 숨을 쉬는 선우가 한 번씩 몸을 뒤척였고,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의 가슴이 맞붙었다가 떨어졌다.
다리와 다리가 얽히고 티셔츠가 말려 올라갔다. 커다란 손으로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쥐자 선우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짧게 끊어지는 신음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입술을 삼키는데 선우가 말했다.
“나……. 취한 것 같아요.”
그걸 이제 알았다. 문도가 어이없어서 웃는데 선우가 속삭였다.
“하고 싶어.”
문도는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이 예뻤다.
“올라가자.”
등을 안아 일으키려는데 선우가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못 참을 거 같아.”
뒷목이 뜨끈해지는 말에 문도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이면 연습실의 연, 자만 꺼내도 얼굴을 붉힐 이선우를 떠올리자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 후회하지 마.”
낯뜨거운 기억들을 많이 만들어 줄 생각으로 문도는 고개를 숙였다. 선우가 등을 들어 올리며 그의 입술을 당겨 물었다. 그를 취하게 하는 향을 머금으며 문도는 선우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귀를 울리는 밤, 꽃잎은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달빛은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아무 날도 아닌 날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선우는 본관 주방의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말린 미역은 여기에 있고, 다음 날 쓸 고기는 전날 미리 말해 놓으면 오후에 배송이 와요. 마늘은 난 그날그날 까서 필요할 때마다 빻아서 쓰거든. 선우 씨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으니까 미리 빻아서 넣어 두라고 할게요.”
선우는 장 여사의 말을 들으며 하나씩 기억을 해 두었다. 별채의 주방에도 어지간한 것들은 구비해 두었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도구나 재료들은 본관 주방에 있었다. 혹시라도 필요하게 되면 여기서 구해 가야 했다.
미역은 팬트리 중간, 냄비는 싱크대 아랫칸,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조리도구는 서랍 속. 부지런히 머릿속에 새겨 넣는데 장 여사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여행을 미룰까? 할 수 있겠어요?”
“아니에요. 여행 다녀오셔야죠.”
올봄, 장 여사가 여동생과 함께 부은 여행 적금이 드디어 만기가 되었다. 겸사겸사 장 여사가 몇 년 만에 일주일간 휴가를 내었는데, 마침 그때 문도의 생일이 있었다.
“숙소동에서 알아서 해 줄 텐데.”
“제가 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선우는 싱크대에 기대서면서 말했다.
본관은 규모부터 달랐다. ᄃ자의 커다란 싱크대와 여러 개의 화구가 있고, 빼곡한 수납장과 안쪽에 팬트리도 있었다. 선우는 주방의 벽면에 걸린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시선을 주었다.
식구들의 스케줄과 한 주일의 메뉴, 규원의 간식까지 꼼꼼히 적혀 있는 보드 위에는 3월 31일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별표까지 두 번 그려 놓은 그날이 바로 문도의 생일이었다.
“주말도 아니고 평일이라 힘들 텐데. 수업도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요, 오전 수업만 있으니까 한번 해 보려고요. 여사님처럼 잘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제가 해 주고 싶어서요.”
선우는 종일토록 따뜻한 빛이 드는 연습실을 떠올리며 말했다.
문도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한 번쯤은 자신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의미가 있는 선물이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하던 찰나에 장 여사의 휴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요, 그럼. 나야 그래 주면 편하고 좋지.”
“모르는 건 조리사 아주머니께 여쭤보면서 할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선우는 자신이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못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레시피가 있다면 따라 하며 만들 수 있는 정도랄까.
민우와 자취 생활도 제법 했었고, 규원의 이유식도 만들었다. 칼질이 능숙하거나 계량 없이 음식을 만들 만큼 솜씨가 좋지는 않았지만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메뉴는 짰어요?”
“네.”
“뭐 뭐 하려고?”
“미역국 끓이고, 잡채 하고, 불고기도 하려고요. 아, 샐러드도요.”
장 여사 앞이라 그런지 메뉴를 말하는 것도 왠지 쑥스러웠다.
“잔칫날 같겠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 가면서 해요. 요즘은 뭐 워낙 인터넷이 잘되어 있어서 검색하면 다 나온다면서.”
“네. 그렇게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요.”
꽃도 사고 와인도 준비해야지. 미리미리 케이크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다시 한번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