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특별외전 3. 아무 날도 아닌 날 (3)
오랜만에 세 식구가 마주한 저녁 식사는 고집스럽게 ‘내가!’를 외치는 규원 때문에 조금 소란스러웠다.
“내가, 할 뚜 이써요.”
규원은 주먹을 쥐듯 포크를 잡고서 작게 잘라 놓은 두부조림을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애호박볶음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남기면 안 돼.”
문도의 한마디에 규원의 미간에 서린 근심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더니 문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호바근 마시 업떠요.”
어눌한 발음으로 심각하게 말하는 규원을 보며 선우는 웃음을 참았다. 문도가 규원에게 차분히 말했다.
“차려 주신 음식은 맛이 없어도 먹어야 해.”
“아빠처엄?”
“응. 아빠처럼.”
그 말에 규원이 눈에 힘을 주더니 포크를 들었다. 작게 자른 호박 조각을 꾹 찔러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에 넣었다. 문도는 규원이 호박을 입에 넣는 것을 지켜보다가 선우에게 말했다.
“저녁 다 먹으면 아래 내려가 볼래?”
“아, 트레이닝룸이요?”
“응. 다 됐대. 가서 오픈식 해야지.”
오픈식이라는 말이 농담이라 생각한 선우가 웃었다. 물을 마시던 규원이 컵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거 머야?”
“뭐가 뭐야?”
선우가 되묻자 규원이 말했다.
“그거 어프…….”
“아, 오픈식? 아빠 운동실 공사 다 끝났대. 전에 규원이가 시끄럽다고 했었잖아? 그거 이제 다 끝나서 아빠 이제 새로운 운동실에서 운동할 수 있거든.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가 볼 건데 문 열고 짜잔, 하는 거. 그게 오픈식이야.”
문을 열고 짜잔, 이라는 부분에서 규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규어니도.”
규원이 작은 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통통 치며 말을 했다. 문도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문도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규원에게 말했다.
“너도 가고 싶어?”
“으응!”
“그럼 오늘은 이모님이랑 자는 거야. 약속하면 데려가 줄게.”
엄마도, 아빠도 있는 날인데 시터 이모님이랑 같이 자는 거라는 말에 잠시 갈등을 하던 규원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규원이도 같이 가. 아빠가 특별히 허락해 줄게.”
“와, 엄마랑 아빠랑 규원이랑 같이 보러 가면 되겠다.”
아이와 함께하면 트레이닝룸을 보러 내려가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 되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특별한 일이 되었다. 선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그럼 케이크도 가지고 내려가서 촛불 후, 할까? 아빠 운동실 새로 한 거 축하해요, 하면서?”
케이크에 초를 꽂고서 후- 부는 것을 좋아하는 규원이 응응, 하고 신이 나서 대답을 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일부러 와아 크게 감탄도 하고 짝짝짝 박수도 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규원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당신이 이것 좀 들어 줄래요?”
문도는 선우가 내미는 트레이를 받았다. 작은 트레이 위에는 가느다란 초를 꽂은 마카롱이 올라가 있었다. 여분의 초와 캔들 라이트까지 챙긴 선우가 규원의 손을 잡았다.
“이걸 꼭 가져가야겠어?”
문도는 앙증맞은 민트색의 마카롱과 그 위의 핑크색 초를 보며 물었다.
“규원이가 좋아하잖아요.”
선우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문도가 잠시 선우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규원이 멈추어 서며 입을 벌렸다.
“우아…….”
문도도 멈추어 서며 잠시 눈을 의심했다. 아이가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곳에는 양쪽에 말뚝처럼 서 있는 황금색 봉이 있었다.
그사이에 길게 늘어진 무지갯빛 리본. 그 옆의 은쟁반과 가위, 흰색 실크 장갑까지. 광화문 사옥 오픈 날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이거 다 당신이 준비한 거예요?”
선우가 문도를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간단한 커팅식을 위한 리본과 가위. 그 한 문장이 이렇게 거한 풍경으로 실현될 줄은 몰랐지만, 준비한 것은 맞았다.
“아마도.”
선우는 이 모든 것이 문도가 규원이를 위해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오픈식이라고 했구나. 그냥 농담한 건 줄 알았어요. 규원아, 이것 봐, 여기 규원이 장갑도 있네? 와, 아기 가위도 있어.”
앙증맞은 가위에 규원이 눈을 빛냈다. 명 실장다운 꼼꼼함이었다.
길게 늘어진 리본 뒤로 새로 단장한 트레이닝룸의 두꺼운 유리 벽이 보였다. 긴 버티컬 블라인드가 유리 벽의 안쪽을 가리고 있고, 그 중간쯤에 역시 유리로 된 출입문이 있었다.
당연히 그의 트레이닝룸이라 생각을 하는지 선우는 유리 벽 너머의 공간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규원에게 상냥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장갑 끼워 줄게. 이거 끼고 가위로 리본을 이렇게 자르는 거야. 그다음에 짜잔 하고 문 열어 보자. 그다음에 촛불 켜고 후, 하는 거야. 알았지?”
규원이 다소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의 도움으로 규원이 아직은 헐렁한 장갑을 손에 끼고서 어설프게 가위를 잡았다.
“자, 엄마도 끼고, 아빠도 끼고…….”
선우가 문도에게 흰색 실크 장갑을 내밀었다. 반은 기념 삼아, 반은 장난 삼아 둘이서 간단하게 커팅식을 할 생각이었지, 이렇게 본격적인 기념행사를 치르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문도는 깃털도 미끄러질 것 같은 새하얀 실크 장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충이 없는 명 실장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서요.”
장갑을 낀 선우가 말했다. 아이만큼, 어쩌면 아이보다 더 즐거워하는 선우를 보며 피식 웃은 문도는 매끄러운 장갑을 꼈다.
“규원이 가위 같이 잡아 줘. 나는 블라인드 걷을 테니까.”
“그럴게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성대하게 치러 줄 생각으로 문도는 거실의 불을 껐다. 블라인드로 가려진 연습실 문을 열고서 안쪽에만 환하게 불을 밝혔다.
블라인드를 걷는 리모컨을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와 고개를 끄덕여 선우에게 신호를 주었다. 선우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합니다. 아빠 운동실 오픈을 축하해요.”
“어프 추카해여.”
“자, 이제 잘라요.”
문도가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선우의 손이 움직였다. 서걱 소리와 함께 커다란 끈이 잘려 나가고, 동시에 지잉 - 소리를 내며 세로로 긴 블라인드가 옆으로 걷히기 시작했다.
우아…….
규원이 감탄사를 내뱉을 때, 웃으며 연습실을 바라보던 선우가 숨을 멈추었다.
“어……. 이게…….”
블라인드가 옆으로 걷힐 때마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빈 공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밤의 정원이 보이는 맞은편의 커다란 통유리창. 전면이 거울로 되어 있는 왼쪽 벽. 그 벽면을 따라 세워져 있는 새하얀 발레 바.
블라인드가 완전히 걷히자 가려졌던 마지막 벽이 드러났다. 탈의실이라 적힌 아치형의 문이 보였고, 그 옆에는 레오타드가 가지런히 걸려 있는 클래식한 클로젯이 있었다. 게다가 코너에 위치한 커다란 스피커까지.
선우는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문도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뭐겠어. 이선우 연습실이지.”
“왜…….”
선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완전히 드러난 연습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클로젯에 걸린 새하얀 튀튀와 레오타드. 길게 이어진 바와 그 아래에 놓인 토슈즈까지.
“이렇게 느끼하게 소개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장갑을 흘깃 내려다본 문도가 선우에게 다가왔다. 기왕 하는 김에, 라고 말하더니 초를 꽂혀있는 마카롱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선우를 보며 말했다.
“연습실 오픈 축하해. 규원이도 엄마 축하해 줘.”
“엄마 추카해여.”
선우는 울컥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눈앞의 규원을 꼭 안았다.
“상대가 틀렸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고.”
문도의 말에 선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규원이 엄마 빠이, 라며 애타는 눈으로 타들어 가고 있는 초를 보았다. 규원의 재촉에 세 식구가 동그랗게 모여 후, 하고 초를 껐다. 짝짝짝. 규원이 박수를 쳤다.
“엄마 조아?”
규원이 묻는다.
“응. 좋아. 너무 좋아.”
시큰거리는 눈가를 누르며 선우는 미소를 지었다.
* * *
촛불을 세 번 끄고도 한 번 더, 를 외치던 규원은 결국 문도의 품에 안겨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멍하니 서 있던 선우는 환하게 빛나고 있는 연습실 안으로 천천히 한 발을 디뎌 보았다.
먼지 하나 없는 커다란 거울. 새하얀 발레 바. 데코용으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토슈즈와 튀튀 스커트.
선우는 이것을 준비하며 문도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래 트레이닝룸을 리모델링 하겠다고 말을 했던 순간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발레 바를 가만히 만져 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마음에 들어?”
돌아보니 문도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피식 웃는 가벼운 웃음이 여전한 남자. 그녀를 보는 눈빛도 여전한 남자.
“마음에 들어요.”
선우는 먹먹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문도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쪽의 탈의실로 향하더니 하늘색 쇼핑백 하나를 들고나왔다.
“아직 뭐가 남았어요?”
“메인 이벤트가 남았지.”
선우의 물음에 문도가 답을 하며 스위치를 내렸다. 일시에 조명이 꺼진 연습실은 잠시 어둠에 잠겼다가 이내 달빛으로 가득 찼다.
“앉아.”
문도의 옆으로 앉은 선우의 앞에 투명한 와인잔이 놓였다. 문도의 앞에도 하나, 그사이에 칸이 나누어진 나무 접시도 하나.
칸칸이 나누어진 접시 위에 올리브와 생햄이 놓였다. 마지막으로는 투명한 살굿빛이 도는 로제 와인을 선우의 잔에 따라 주었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이에요?”
연습실에, 커팅식에, 와인까지. 혹시 자신이 잊은 기념일이었던가 생각을 하며 선우가 물었다.
“아니. 아무 날도 아닌데?”
“그런데 왜…….”
“아무 날도 아닌 날이니까.”
선우는 담담히 답하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문으로는 이제 벚꽃이 흐드러지기 시작한 밤의 정원이 보이고, 달빛은 길게 내려와 문도의 어깨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이선우랑 술이나 한잔하려고.”
문도가 잔을 들어 선우의 잔에 가져다 댔다. 가볍게 부딪힌 와인잔에서 챙, 하는 맑은 소리가 났다.
정말 그게 전부라는 듯한 표정으로 문도가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눈이 마주치자 왜? 라고 묻는 것처럼 눈썹을 들었다.
엷은 미소를 지은 선우도 잔을 들었다. 청량하고도 쌉쌀한 와인이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그녀의 남편을 닮은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