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특별외전 2. 아무 날도 아닌 날 (2)
새벽, 푸르게 동이 터 오는 하늘을 보며 달리던 문도는 러닝 머신의 속도를 줄였다. 삐삐삐 - 버튼을 누를 때마다 한 칸씩 낮아지는 속력에 걸음이 느려지고 숨이 차올랐다.
“후우.”
문도는 속력을 줄여 걸으며 앞을 보았다. 지층에 위치한 트레이닝룸은 전면이 정원을 향해 있어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푸른 잔디밭이 잘 보였다.
동이 터 오는 하늘 아래로 녹색이 짙어지고 있는 정원이 보였다. 선우가 아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텃밭과 모래 놀이터도 보인다. 차양을 드리운 흔들 그네도.
삐-
긴 소리를 내며 어느새 멈추어 선 러닝 머신 위에서 문도는 가만히 앞을 보았다. 동이 트는 풍경 위로 연하게 미소를 짓던 선우의 얼굴이 겹쳐진다.
‘괜찮아요. 아쉽지 않아요.’
그 대답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괜찮다고, 아쉬운 것 없다고 말하며 빙그레 웃던 이선우는 정말 괜찮은 것이겠지만.
문도의 시선이 러닝 머신에 머물렀다.
이 집에는 그를 위한 트레이닝룸이 있고, 아이를 위한 텃밭과 놀이터가 있었다. 선우 역시 공부를 하기 위해 서재를 따로 쓰고는 있지만 그건 발레리나 이선우를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지난번에 연습할 때 파트너 빠진 애 옆에서 잠깐 상대해 주는데, 실력 여전하더라. 학부 애들 공연 짜고 그럴 땐 같이 하기도 하고 그러나 봐.’
어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문도는 러닝 머신에서 내려와 트레이닝룸을 돌아보았다. 집을 매입하며 각종 기구들로 채워 놓은 트레이닝룸이지만, 집에서 느긋하게 운동을 할 시간이 없다 보니 주로 주말에나 이용하고, 주중엔 대부분 회사의 트레이닝 센터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 공간이 이렇게 클 필요가 있다.
문도는 유리문을 열고 나와 지층의 거실을 바라보았다. 위층만큼 커다란 거실에는 역시 정원이 보이는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었다.
문도는 사람이 앉는 일이 거의 없는 소파와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명 실장에게 일어나면 전화를 달라는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고 돌아서는데 벨이 울렸다.
- 네, 전무님. 명규진입니다.
“깨운 건가요?”
- 아뇨. 일어나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지하에 공사를 좀 할까 하는데. 트레이닝룸이랑 거실 쪽으로요.”
문도는 원하는 공간에 대해 규진에게 간단히 이야기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자세한 스케치는 공간 디자이너와 다시 이야기를 해 봐야 나오겠지만, 대강의 모습은 벌써 머릿속에 있었다.
해가 환하게 들어오는 넓은 연습실. 긴 바가 있고, 유리 너머로는 아이가 뛰어노는 정원의 풍경이 보이는 곳.
문도는 다시 한번 공간을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 * *
햇볕이 따뜻한 오후, 선우는 규원이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아기 브라키오사우르스는 엄마를 찾아 돌아다녔어요. 나무야, 나무야 우리 엄마를 보았니?”
“보안니?”
규원이가 마지막 말을 따라 하던 순간, 따가운 소리가 커다랗게 공간을 울렸다.
드르르르르르륵-
바닥까지 흔드는 드릴 소리에 규원이 손으로 귀를 막았다. 몇 초 정도 더 이어진 드릴 소리가 멎은 뒤에 규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엄마, 시꾸러요.”
“아래층 공사 중이어서 그래. 아빠 운동실이 오래돼서 고치는 거래.”
선우의 말에 규원은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렸다. 아일랜드에서 딸기를 씻던 장 여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첫날인 오늘만 시끄럽고 내일부터는 괜찮대요. 큰 소음은 철거하는 오늘이나 있다고 하니까. 내일부터는 크게 시끄러운 거 없댔어요. 게다가 낮 시간에만 공사할 거고.”
선우도 어제 문도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트레이닝룸의 기물들을 교체하며 구조도 조금 바꿀 예정이라고 했다. 선우가 나가 있는 낮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니 신경 쓸 일은 없을 거라고도 했다.
“시터 아주머니는요? 낮에 시끄러웠을 텐데, 괜찮으시대요?”
“숙소동으로 건너가 있어요. 곧 건너올 거예요.”
이번엔 드릴 소리가 아닌 무언가를 쿵, 하고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규원이 다시 코끝을 찡그렸다.
“우리가 오늘 일찍 와서 그런가 보다. 조금 있으면 끝난대. 놀이학교가 조금 일찍 끝났어. 그치?”
평소보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월요일이라 직접 놀이학교로 규원을 데리러 갔었다. 4시 이후로는 공사를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보다 일찍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공사 소리를 듣게 되었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장 여사가 가져오는 커다랗고 빨간 딸기에 시선을 빼앗긴 규원은 선우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은 듯했다. 많은 과일 중에 유달리 딸기를 좋아하는 규원이었다.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딸기를 바라보더니 포크로 꾹 찍어 장 여사에게 건네며 말했다.
“함미 먼저.”
가차 없는 아빠의 교육은 이럴 때 효과를 발휘했다.
“함미는 먹었어요. 규원이 먹어요.”
규원이 그 말에 되돌아온 포크를 쥐었다. 조급함을 담은 까만 눈동자가 선우를 향했다.
“엄마 먼저.”
“엄마도 먹었어. 규원이 먹어.”
선우도 웃음을 참고서 규원에게 말했다. 이제 한숨 돌린 규원이 딸기를 크게 베어 물었다. 장 여사가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선우에게 말했다.
“일주일 정도 걸린대요. 전무님이 먼지도 있고 위험하기도 할 테니까 내려가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많이 시끄러울 것 같으면 본관으로 건너갈까요?”
“아니에요. 끝날 시간 다 되어 가는데 그냥 있을게요.”
“그나저나 이제 날씨가 다 풀렸네. 봄이 왔나 봐요.”
장 여사가 멀리 정원을 보며 말했다. 선우도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정원을 바라보았다. 담장에 서 있는 목련나무에 흰 목련꽃이 피어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노란 개나리도, 벚꽃도 뒤를 이어 피어날 거였다. 그때는 규원이와 손을 잡고 나무 아래를 걸어도 좋을 듯했다.
“딸기 벌써 다 먹었어?”
“딸기 조아요.”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규원에게서 딸기 냄새가 물씬 났다. 그 언젠가 딸기 농장을 통째로 들고 온 것처럼 쇼핑백 가득 딸기를 사 왔던 남자가 생각나는 냄새였다.
어제처럼 생생하기도 하고 아주 오래전 일처럼 까마득히 멀기도 한 그날. 종류별로 놓인 딸기를 먹다가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었다.
너만 날 좋아하면 된다는 말에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이제는 그와 똑같이 생긴 아들이 선우의 무릎에 앉아 딸기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엄마도 딸기 제일 좋아하는데. 엄마랑 규원이랑 똑같네?”
“또가타?”
“응. 엄마랑 규원이랑 똑같아.”
드르르륵.
다시 한번 짧게 드릴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공사를 마치면 규원이와 함께 내려가 새로 단장한 트레이닝룸을 구경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선우는 배시시 웃는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이 집에서 맞이하는 네 번째 봄이었다.
* * *
늦은 밤.
문도는 주차장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주주총회 준비로 바빠 연이어 며칠째 야근이었다. 한 손으로는 뻐근한 뒷목을 누르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스크롤을 쭉 내리니 명 실장이 보낸 메일의 제목이 보였다.
[새로 단장한 트레이닝룸과 연습실 사진입니다.]
늦은 오후에 받은 메일을 이제야 열었다. 첨부된 파일을 누르자 전과는 달라진 지층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몇 장을 넘겨 확인을 한 문도는 회신 버튼을 눌렀다. 요청 사항 몇 가지와 준비해야 할 것들을 적는데 딩,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요청 사항을 마저 적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문도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미등이 켜진 거실 너머로 선우의 서재가 보였다. 살짝 열어 놓은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다. 서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이 열리며 선우가 나왔다.
“왔어요?”
“왜 안 자고 있어?”
“그냥, 자료 조사할 것도 있고…….”
문도는 선우를 당겨 안으며 고개를 내렸다. 뭐라 말을 하려고 열렸던 선우의 입술이 그의 입술 사이에 부드럽게 닿았다. 문도는 달콤한 살점을 조금 더 깊게 베어 물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각도를 바꿀 때마다 선우가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어느새 문도의 목에 선우의 팔이 감겼다. 문도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발갛게 달뜬 숨을 쉬는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기다리지 말고 자라니까.”
문도는 머쓱하게 웃는 선우의 이마에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
선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맑은 눈동자로 잠시 그의 얼굴을 눈에 담고는 입을 열었다.
“별일은 없었고, 규원이 공룡 동화책을 열 번 정도 읽었어요.”
“브라키오사우르스 그거?”
“네. 그거.”
규원이 엄마 브라키오사우르스를 찾아 모험을 하는 아기 브라키오사우르스의 이야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기 전에도
꼭 그 책을 들고 왔다.
“내일도 별일 없을 예정인가?”
“아마도요? 수업은 4시에 끝나고, 팀 과제 같이하고, 아, 내일이면 지하 공사 끝난다고 아까 장 여사님이 말씀하셨어요. 마무리만 남았대요.”
문도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요?”
“내일은 오랜만에 저녁 같이 먹게. 퇴근 일찍 할 테니까 약속 잡지 마.”
선우가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의 귀 옆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한 번더 입술을 포개려는데 선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모처럼인데 규원이 데리고 다 같이 본관 가서 먹을까요? 어머님이랑 같이? 스케줄 되나 여쭤보고서.”
“……선우야.”
내가 어머니랑 식사하려고 지하를 뒤엎었겠니. 그 말을 삼키며 문도는 말했다.
“본관에는 부를 때만 가는 거야.”
뭐라 말을 더 하려는 선우의 입술에 문도는 다시 입술을 포갔다. 눈치 없는 이선우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