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특별외전 1. 아무 날도 아닌 날 (1)
3월도 절반이 지났다.
제법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었다. 문도는 풍성한 꽃다발을 들고 아트센터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정문의 옆쪽에는 건물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랗게 붙여 놓은 대형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발레극 ‘하백’.
눈을 지그시 감은 여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선우의 지도교수인 이임선 교수가 오랜 시간 공들여 기획한 발레 공연의 오프닝 날이었다. 덕분에 교수를 도와야 하는 선우 역시 겨울방학 내내 바쁘게 지내야 했다.
공연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문도는 로비에 들어서며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많이 바빠?”
- 조금요. 바쁘다기보다 정신이 없어요. 첫날이라 그런가 봐요.
문도는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보았다. 티켓 판매 부스도 보이고 커다랗게 꾸며 놓은 포토월도 보였다. 기념품샵 앞에서 걸음을 멈춘 문도는 쌓여 있는 팸플릿 한 장을 집어 들었다.
- 당신은 아직 회사예요? 저녁은 먹었어요?
“저녁은 먹었고, 회사는 아니야.”
문도는 대답하며 제일 뒷장을 훑어보았다. 기획, 연출, 조연출, 음악감독, 무대감독. 수십 명의 스탭 이름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쓰여 있는 곳에 선우의 이름은 없었다. 잡일을 도맡을 뿐, 아직 그럴싸한 직책 하나 없는 대학원생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 퇴근하는 중이에요?
“응.”
- 잘됐다. 당신이라도 규원이랑 놀아 줘요. 공연 끝나고 가려면 아무래도 늦을 거니까.
“그건 불가능해. 지금 미리내홀 로비거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우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 어디라구요?
“로비. 공연장이야.”
- 어……. 잠깐만요. 왜……. 아니.
당황한 선우의 목소리에 문도는 웃었다. 교수가 내어 준 초대권은 며칠째 선우의 책상 위에 무심히 놓여 있었다. 자신이 기획팀으로 참여한 첫 공연이라 떨린다는 말을 하면서도, 올 수 있냐는 질문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이번 공연이 자신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긴 하나 누군가를 초대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성실하지만 무심한 이선우답달까.
“와야지. 이선우 첫 공연인데.”
건너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진 선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선우가
급하게 말했다.
- 로비라고 했죠? 그쪽으로 갈게요. 거기 잠깐만 있을래요? 교수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내가 갈게. 여기까지 왔는데 축하 인사는 드려야지.”
문도는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며 대답했다. 이름 모를 꽃들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수화기 건너편의 선우가 어, 그럼, 하고 말을 이었다.
- 그럼 기프트샵 뒤쪽으로 돌아서 복도 지나면 철문 있거든요. 그거 열면 계단 나와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오면 돼요. 나도 나갈게요.
“그래. 그쪽으로 갈게.”
문도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선우가 알려 준 대로 인적이 드문 긴 복도를 지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회색빛 철문을 열고 대기실로 이어지는 조금 어둑한 통로를 향해 가는데 저 앞쪽에 한복을 입고 몸을 풀고 있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교수님 옆에 있던 사람이 이선우 리나예요? 아, 이젠 리나 아닌가.”
문도는 들려오는 선우의 이름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응. 넌 첨 봤겠네?”
“네. 그 사람 맞죠? 국립발레단 유망주였는데 부상으로 그만뒀다는. 부모님 사고 때문이었던가? 그만두고서 학원으로 빠졌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는데, 결혼을 재벌 3세랑 했다면서요?”
“그랬다더라.”
“정말 소문대로 그, 서도……맞나? 거기 그 남자랑 결혼한 거예요?”
“그렇대. 나도 자세한 건 모르고 결혼하고 전공 바꿔서 학교로 돌아온 것만 알아.”
거리가 제법 있어서 그런지 그의 존재를 모르는 듯했다. 문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보며 걸음을 떼었다. 아마도 다음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스쳐 지났을 거였다.
“안타깝더라. 진짜 유망했던 리나였는데, 그렇게 주저앉은 거 보니까. 인생 참 한순간이야.”
“거의 원탑이었다면서요?”
“응. 진짜 잘했어. 지독한 연습벌레이기도 했고, 왜 그런 사람 있잖아. 타고난 데다 노력도 진짜 많이 하는, 그냥 춤추려고 태어난 사람. 그래서 밉지도 않고 질투도 안 나는 사람.”
가볍게 몸을 풀며 무용수가 말했다. 그 정도였냐고 물어보는 다른 무용수에게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연습할 때 파트너 빠진 애 옆에서 잠깐 상대해 주는데, 실력 여전하더라. 학부 애들 공연 짜고 그럴 땐 같이하기도 하고 그러나 봐.”
“다시 무대 서려고 하는 걸까요?”
“불가능하지. 나이도 나이고 기량도 그렇고, 취미 삼아 하면 모를까. 전공도 기획으로 틀었잖아.”
“아까 리허설 무대 보는 옆모습 보는데, 괜히 내 맘이 좀 그렇더라구요.”
“뭘 또 마음이 그래. 본인은 지금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던데. 공연 시작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다. 남 걱정은 그만하고 우리 걱정이나 하자구.”
무용수들이 우르르 대기실로 들어갔다. 문도는 텅 빈 복도를 바라보다 가볍게 숨을 쉬었다. 꽃다발을 고쳐 잡고 다시 걸어가는데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문도 씨!”
그를 본 선우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걸음을 빨리하며 그에게로 다가오는 선우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어떻게 온 거예요? 티켓 따로 샀어요?”
“첫 공연인데 왜 안 불러? 기다려도 안 주길래 알아서 챙겨 왔어.”
선우의 이름이 쓰여 있는 초대권 봉투를 꺼내자 선우가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교수님 도와서 보조하는 정도지, 정식으로 이름 올라간 스탭도 아닌걸요.”
선우의 눈길이 커다란 꽃다발로 향했다. 뭘 이런 걸 다 사 왔냐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는 선우를 보며 문도는 말했다.
“좋아하지 마. 교수님 거니까.”
그 말에 선우가 조금 민망하다는 듯 웃고 나서 말했다.
“교수님 좋아하시겠어요. 너무 예쁘다.”
문도는 비어 있는 손으로 선우의 손을 잡았다. 선우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늘이 없는 미소에 문도도 마주 웃어 주었다.
* * *
공연이 끝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문도는 선우의 손을 잡고 가로등 불빛이 환히 비추고 있는 계단을 내려왔다. 선우가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그런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타.”
문도의 말에 조수석 문을 연 선우는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조수석에 색이 고운 핑크색 튤립 한 다발이 있었다. 그사이에 꽂혀 있는 자그마한 카드에는 첫 번째 공연을 축하한다는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설마 내가 교수님 것만 샀을까.”
문도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선우에게 말했다. 핑크빛 튤립의 색으로 연하게 볼이 물든 선우가 한숨처럼 웃으며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고마워요. 이런 것까지 축하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선우가 참여한 첫 공연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스탭으로 이름이 올라간 것도 아니고, 아직 뭘 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걸요.”
“그렇긴 해.”
문도는 차를 출발시키며 순순히 긍정했다. 핸들을 돌리는 문도를 선우가 밉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눈매에 부드러운 웃음을 걸고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내려 꽃향기를 맡았다.
“예뻐요. 향기도 너무 좋고.”
너도 그렇다는 말을 하려다가 문도는 입을 다물었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서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선우의 옆모습이 그림 같아서 조금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침묵이 흐르는 동안 차는 강변도로를 따라 달렸다. 깜깜해진 밤의 강물은 어둠과 쉽게 구별이 되지 않았다. 멀리 대교의 불빛에 따라 흔들리는 물비늘을 보다가 문도는 물었다.
“아쉽지 않아?”
선우가 무슨 말이냐는 듯 문도를 돌아보았다.
“발레 그만둔 거 말이야.”
아, 그거요…….
선우가 작게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 잠시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희미하게 웃었다.
춤을 계속 추었더라면 어땠을까. 무대의 뒤편이 아닌 무대 한가운데 네가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처음엔 아쉬워할 겨를이 없었어요. 부상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데다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가끔 생각은 났지만, 그래도 민우랑 살아가는 게 먼저니까. 아쉬워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고요.”
선우는 이젠 아득할 정도로 오래된 날들을 생각했다. 재활을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였던, 너무나 당연히 돈을 버는 것을 선택해야 했던 그때. 민우의 등록금, 생활비, 각종 세금과 공과금. 그런 것들을 책임지는 게 더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민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그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시련은 더 큰 시련이 덮어 버렸다. 생의 전부였던 춤은 부모님의 죽음과 민우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문도의 물음에 선우는 빙그레 웃었다.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오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무대가 아닌 발레를 하며 몸을 움직이는 그 행위 자체였다. 바늘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집중의 순간들을, 호흡까지 잊을 정도로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들을 좋아했다.
“지금은 지금 하는 공부가 재밌어요. 더 많이 배워 보고 싶기도 하고요.”
선우는 흘깃 자신을 돌아보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문도에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학부생들 공연 안무 짜는 것을 도와주다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작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을 수 있겠다. 그저 학교 연습실에서 틈틈이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니.
굳어 버린 근육 때문에 기본의 기본부터 다시 천천히 시작해야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다고 해서 예전만큼의 기량을 회복할 수도 없겠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직업이 아닌 취미가 되었다고 해서 발레를 대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규원이도 너무 중요하고, 그리고.”
잠깐 그녀를 돌아보는 문도를 보다 선우는 웃었다. 하려던 말이 있었지만, 남편을 닮아 가는지 괜히 다른 말이 나왔다.
“어머님이랑 장 여사님도 너무 좋고, 그래서 괜찮아요. 아쉬운 것 없어요.”
문도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머니랑 장 여사님이 좋다 이거지.”
“네. 시터 아주머니도 좋고, 아, 옥수댁 아주머니도요. 돌아오셔서 좋아요.”
시치미 떼고 말하는 선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문도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아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때마침 앞에 보이는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속도를 줄여 차를 멈춘 문도는 손을 뻗어 선우의 손을 잡았다. 깍지를 끼고 힘을 주며 물었다.
“나는? 응? 나는?”
대답 없이 웃는 선우와 짧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신호가 바뀌었다. 다시 차를 출발시키는데 선우가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그의 손등 위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너무 좋아.”
그 한마디에 갈증이 일었다. 신호가 바뀌자 문도는 속력을 높였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