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외전 17. 어느 생이라 해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문도는 식탁 위로 서빙이 되고 있는 누룽지 백숙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앞앞에 놓이는 커다란 유기그릇에는 작은 닭이 다리를 꼰 채로 올라가 있었다.
“아빠. 유라느은, 아빠가 건강해져서 너무 좋아. 아빠가 사 준 옷 입었는데 어땡? 완전 예쁘지? 그치?”
회장 옆에 착살맞게 달라붙은 서유라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니까 아빠, 나 결혼시켜 주라. 어? 나 진짜 이 사람 사랑한단 말이야아.”
얼마 전에 돈 뜯어먹던 배우 지망생과 헤어졌다더니, 이제는 웬 음악감독 나부랭이를 만난단다. 만난 지 두 달도 안 되어 결혼을 하겠다고 저 난리였다.
“내가 만나 봤는데, 사람은 괜찮은 거 같아요. 김 서방은 첨 봤을 때부터 그렇게 차갑더니 이쪽은 그래도 살갑게 인사도 하구 그러더라고요?”
박소영이 한마디를 곁들였다.
“이, 이혼한 지 어, 얼마나 되었다고. 메, 메리지가 장난이야? 장 여사, 겉절이 듬뿍 줘.”
심근경색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회장은 기력이 반으로 줄었다. 그래서인지 부지런히 보양식을 찾아 댔다.
“아버지, 요 갓김치도 좀 드셔 보세요. 기가 맥힙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을 하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표정을 구기고 닭다리만 헤집는 큰아버지. 큰아버지 귀에다 뭐라 속닥이는 큰어머니. 그 옆에서 처먹기 바쁜 서창도와 서준도.
분기별로 한 번씩 찾아오는 변함없는 풍경이 새삼스레 짜증이 났다. 문도는 벌거벗고 누워 있는 닭을 피해 누룽지죽을 한 숟갈 떴다. 기계적으로 입에 넣는데 부드럽게 흩어지는 죽이 모래알 같았다.
이대로 끝인가. 정말 연락을 안 할 건가.
오늘로 열흘째였다.
처음 이틀은 여유로웠다. 곧 연락이 오겠지. 신중하게 생각을 하는 중이겠지. 그렇게 사나흘이 지났다.
일주일이 지났을 땐 설마 거절을 하려고 이러나. 거절을 하려니 미안해서 연락을 못 하는 건가, 그 생각을 했는데 열흘째인 오늘은 모든 게 다 짜증이었다. 비위가 틀어지며 입맛이 없어졌다.
“아빠앙, 우리 그이 진짜 착하다니깐? 나 진짜 이번엔 이혼 안 할게. 우리 넘넘 잘 맞아. 먹는 것도 비슷하고 좋아하는 것도 비슷해. 아씨 진짜 나 결혼시켜죠. 어? 그이 만나구 나 약도 안 하잖앙.”
얼씨구. 약 안 하는 게 자랑이다.
한심해서 쳐다보자 유라가 눈을 흘겼다. 무감히 바라본 뒤 깔깔한 입안으로 동치미 국물을 흘려보냈다. 이건 왜 이렇게 짜. 속으로 짜증을 내다 다시 한숨을 삼켰다.
그때 키스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얼굴도장 몇 번 찍은 주제에 대뜸 입술부터 빨아 버렸으니 겁을 먹었겠지. 게다가 처음이었다는데.
그날의 이선우를 생각하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정신을 놓아 버릴 정도로 좋았던 입맞춤과 목까지 빨개졌던 얼굴.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 안에 앉아 새초롬히 그를 보던 예쁜 눈.
문도는 다시 한번 한숨을 삼켰다.
내가 싫은 건가.
생각은 단 한 번도 가정해 본 적 없는 곳까지 다다랐다. 혼자만의 거한 착각이었나. 너한테 나는 질척대는 미친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속이 얹힐 것 같아 찬물만 연거푸 마실 때였다. 의자에 희미한 진동이 왔다. 문도는 대충 걸쳐 놓은 재킷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쓱 화면을 보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문도 다 먹었어?”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재킷을 챙겨 성큼 나서는데 서용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뭔데 새파랗게 어린 게 식사 중에 일어서? 여기서 일은 너만 해?”
“그러게요.”
문도는 대충 대답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저, 저 싸가지 없는 새끼. 큰아버지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진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문도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한번 메시지를 읽었다.
[괜찮으시면 오늘 뵐 수 있을까요?]
지금 그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선우는 2층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서문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래층에서 딸랑, 맑은 종소리가 들리더니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서문도일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더니 계단을 올라오던 남자가 우뚝 멈추어 섰다.
“오셨어요?”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멈춰 선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후, 하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다시 걸어 선우가 있는 테이블까지 왔다. 싱긋 웃으며 말을 한다.
“기다리다가 숨넘어갈 뻔한 거, 알고 있어요?”
“아, 계속 공연이 있었어요.”
그랬냐는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이 있기도 했지만, 대답이 많이 늦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시간을 끌려던 건 아니었는데.
몇 번이나 전화를 할까. 메시지를 보낼까. 그렇게 망설이다가 그대로 접기를 반복했다. 마음은 이미 정해졌는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은 해 봤어요?”
자리에 앉은 문도는 선우가 권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선우는 눈을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너무 강하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세고, 너무 아름다웠다. 세찬 물살이 되어 그녀를 휘감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감당하기엔 버거운 남자라서.
게다가 남자가 가진 배경과 지위 역시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삶의 궤적이 하나도 겹치지 않는, 많이 다른 세상에 사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래 생각을 했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서 마음을 따라가 보았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미래에 대한 걱정도 지우고, 한낱 장난이 아닐까 하는 기우도 지우고, 많이 다른 세상에 대한 편견도 지우면.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
“네. 생각 많이 해 봤어요.”
남자가 톡톡, 커피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다 한숨을 쉬며 웃는다.
“이게 뭐라고 피가 마르네. 아직도 마를 피가 남았나.”
선우는 그 순간 작게 웃었다. 남자가 던지는 이상한 유머들이 좋았다. 시니컬한 농담을 툭 던질 때면 그냥 웃음이 나왔다.
“웃으니까 좋긴 한데, 그래서 대답은.”
“…….”
“거절이야?”
성마른 독촉에도 웃음이 나왔다.
“웃지 말고 말을.”
신기했다. 남자가 이렇게 초조할 수도 있다는 게. 그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어 선우는 입을 열었다.
“자꾸 생각이 났어요.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도 나고 신경도 쓰이고 그랬어요. 다시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도 했다가.”
연락을 기다리는 내내 온통 이 남자였다. 우산을 가져간 남자가 마음도 가져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전무님이랑 같이 있으면 제가, 제가 아닌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 괜히 의식해서 이상한 말이나 하고, 안 하던 행동도 하고.”
열흘 동안 망설였던 건 이 말을 하기가 어려워서였다. 나도 당신에게 끌린다는 말을, 그러니 우리 정식으로 만나 보자는 말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아무래도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에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무모한 것 같긴 한데요.”
선우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빠져들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그래도 한 발을 디뎌 보기로 한다.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물살의 끝에는 바다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저도 전무님 만나 보고 싶어요. 아직도 그럴 마음이 있으시다면요.”
돌고 돌아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만 같아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우리가 만난 게 어쩌면 운명인 것만 같아서.
선우는 이제야 천천히 미소를 짓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 *
그 밤, 남자는 여자에게 두 번째 키스를 했다. 세 번째 키스도, 네 번째 키스도 했다.
그렇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연애가 시작되었다. 남자는 자주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툭하면 끌어안고서 살냄새를 맡았다.
첫 밤에는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속삭였고, 아플까 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손을 잡고서 광화문 광장을 산책했고, 부암동 만둣국집을 자주 다녔다.
매일 집까지 바래다주다가 남동생에게 들켰고, 그 주말에는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다. 여자의 엄마가 차려 놓은 갈비찜을 먹었고,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을 하는 바람에 놀란 여자가 딸꾹질도 했다.
끌려 들어간 여자의 방에서 청혼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서 나랑 결혼하기 싫어? 입을 맞추며 물어보는 남자가 보인다.
눈만 깜빡이다 얼굴을 푹 숙이는 여자의 모습도, 아니요, 하고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그런 여자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는 남자의 모습도.
* * *
문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꿈에서 보았던 여자가 그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바깥에선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천장의 실링팬이 돌아가고 있었다.
문도는 새근새근 자고 있는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말간 뺨도 쓸어 보고 예쁜 눈썹도 가만히 어루만졌다. 선우가 잠결에 천천히 눈을 떴다.
“더 자. 아직 밤이야.”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하자, 잠이 묻은 눈동자로 그를 보더니 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의 내용이 점점 희미해진다. 아쉽지는 않았다. 어느 생에서 다시 만난다 해도, 그에게는 선우가, 선우에게는 그가 있을 것을 알았기에. 돌고 돌아 결국은 사랑할 것을 알았기에.
그래도 다음 생에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의 너는 아픔은 모르는 얼굴로 웃기를. 마음 아픈 일들은 전부 내 것이 되기를.
문도는 그렇게 기도하며 선우를 당겨 안았다. 부드러운 선우의 살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어느 생이라 해도 그의 사랑이었을 이선우의 냄새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