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외전 16. 그래도 될까
문도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선우의 차가 멀어지는 것이 보이는데 꼼짝할 수 없었다.
처음이라고.
처음에 의미를 두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런 것에 연연해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목 끝까지 빨개져 그를 보던 선우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꾹 다물었던 입술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자신의 입술 외에는 누구의 입술도 닿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몸을 흐르던 전율이.
처음이라고.
기막힌 일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입술을 물고서 정신을 놓은 건 그였다. 이성이 날아가는 걸 알면서 붙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보이는 건 이선우밖에 없어서.
헛웃음 나오는 일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았다. 선우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보내기는 싫다는 것.
쫓아가.
머리가 아닌 마음이 말했다. 문도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 * *
전화벨이 울린 건 선우가 막 아파트 주차장에 막 주차를 마쳤을 때였다.
가방과 키를 챙겨 차에서 내리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가방을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니, 이름은 없지만 어느새 눈에 익어 버린 번호가 보였다.
선우는 복잡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벨 소리는 한참을 울리고 나서야 끊겼다. 이제 되었나 싶어 걸음을 옮기려는데 곧바로 메시지가 들어온다.
[전화받아요.]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선우는 아파트 사이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물다 콜백을 했다.
— 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실 말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할 말이 없으니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 지금 오목교 지나는 길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요?
“네?”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어디라고?
— 어디가 편해요?
“어디시라고요?”
— 목동 아무 곳이나 찍었더니 이리로 안내하던데.
“왜…… 아니…….”
말이 막혔다. 그대로 헤어졌어도 되었다. 뭐 하러 굳이 다시 만나려 하는 걸까.
— 그렇게 들여보내긴 싫어서 그래요. 괜찮은지만 보고 갈 거니까.
남자의 말에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찮다는, 그러니 그냥 가라는 말을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 만나기 편한 곳으로 주소 보내요. 그쪽으로 갈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우습게도 상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선우는 입술을 깨물며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아파트 단지 앞의 공원 이름을 적어 보냈다.
공원 벤치는 왜 긴 걸까.
선우는 엉뚱하게도 그 생각을 했다. 왜 길어서 나란히 앉게 만들까.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떡하라고.
“괜찮아요?”
물어보는 질문에 잠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아까부터, 커피숍에 앉아 담배를 피던 남자를 보았던 그 순간부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네. 괜찮아요. 그냥 가셨어도 됐는데요.”
“어떻게 그냥 가. 이선우 씨가 그런 얼굴로 갔는데.”
남자의 미소가 부드러웠다. 그게 따뜻한 물처럼 마음을 위로했다.
선우는 맞은편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밤이 되었다. 한적한 아파트 단지의 공원에는 가로등 불빛이 길을 밝혔다. 발끝까지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렸다.
운전을 하며 돌아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많은 생각을 해 보려고 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고, 왜 그랬는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떠올려 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냥 입을 맞추었던 순간의 감각들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터져 나올 뿐이었다.
첫 키스를 했다는 것. 그것도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인 사람이랑 했다는 것. 그런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멈추라고 말도 못 했다는 것.
선우는 발끝에 닿아 있는 나무의 그림자에서 눈을 들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머리숱이 많고 눈썹이 짙은 남자를.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나. 문득 그 생각이 들어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서른셋.”
서른셋. 선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껏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조금 웃겼다. 아는 게 하나도 없네. 그 생각을 하는데 문도가 말했다.
“집 주소는 이태원 27—3. 서도 케미컬 다니고, 키는 189, 몸무게는 77. 형제자매는 없고.”
잠시 뜸을 들이다 피식 웃는다. 그러더니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쓱 쓸어내리며 목을 뒤로 젖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선우를 보았다.
“지금은 몹시 이선우랑 연애하고 싶고. 그래요.”
남자가 한 번 더 웃었다. 부드럽고 깊은 눈빛이 선우를 향해 있었다. 선우는 문도가 정말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을 했다. 무례한데 다정하고, 날카로운데 부드러운 이상한 사람이라고.
문도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겨울밤의 아파트 공원에는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 번씩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선우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대답을 해야 할 때라는 걸 알았지만, 마음은 헝클어진 실타래 같기만 했다.
“저는…….”
뭐라 이야기를 하려다 선우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까지 이렇게 끌리는 남자는 없었다는 것. 이유도 없이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은 이 남자가 처음이라는 것.
그렇지만…….
이래도 괜찮은 건가. 너무 섣부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는 시간이 필요해요. 생각을 해 볼게요.”
선우의 말에 문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다릴 테니까, 연락해요.”
다시 바람이 불었다. 선우는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 * *
며칠이 흘렀다.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선우는 엄마와 민우가 빨래를 개고 있는 거실로 향했다.
“선우야, 딸기 좀 먹어 봐. 아빠가 어제 사 왔는데 큼지막한 게 맛있어 보이네. 세상 많이 좋아졌어. 12월에도 이렇게 맛있는 딸기를 먹을 수 있고.”
동그란 접시에 큼지막한 딸기가 가득했다.
“먼저 먹지.”
“너 딸기 좋아하잖아. 같이 먹어야지. 이게 맛있겠다.”
엄마가 제일 크고 색이 진한 것을 골라 선우를 주고, 그다음으로 큰 것을 민우에게 건네주었다.
“엄마도 먹어.”
“응. 우리 이따 오이 마사지나 할까? 영어 전담 선생님이 요즘 피부에 광이 나는 거야. 그래서 뭐 했냐고 물어봤더니 오이가 많이 생겨서 먹다가 얼굴에도 붙였대. 우리도 해 보자.”
의욕에 가득 찬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딸기를 먹었다. 민우가 개어 놓은 수건을 화장실 수납장에 차곡차곡 넣어 두기도 하고, 감자 껍질을 벗길 때 쓰는 필러를 꺼내 오이를 얇게 저미기도 했다.
그러는 내내 서문도를 생각했다. 첫 키스의 멍한 충격이 가신 뒤, 천천히 생각을 해 보는 중이다. 춤을 추는 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에 남자를 떠올렸다. 생각하려 하지 않을 때도 생각이 나서,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선우는 오이를 그릇에 담아 거실로 향했다. 불려 온 민우가 투덜거리며 누워 있는 혜숙과 선우의 얼굴 위로 오이를 하나씩 붙여 주었다. 선우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엉.”
“나 발레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기억나?”
“기억나지 그럼.”
선우는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며 그때를 생각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매일매일 친구가 다녔던 학원으로 걸어가 한 시간씩 문 앞에 앉아 있다 왔었더랬다.
“어느 날 갑자기 발레학원 다니고 싶다고 했잖아. 친구 누구더라.”
“은지.”
“응. 은지 다니는 학원에 가고 싶다고.”
어릴 적 맞벌이를 하는 엄마 때문에 시간을 학원에서 보내야 했는데.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그랬듯, 학교 앞의 상가에 있는 피아노학원과 미술학원을 다녔다.
아주 재밌어하지도 않았지만, 크게 불만이 있지도 않았다. 그냥 무던하고 성실하게 학교와 학원을 오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발레학원에 가서 한눈에 빠졌을 때도 자각이 늦었다. 그냥 와, 예쁘다 그 정도 생각을 했었는데 매일 생각이 났다.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다니는 학원을 매일 갔다. 창문 너머로 수업받는 것을 훔쳐보기도 하고, 레슨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집에 돌아와 부랴부랴 저녁을 차리는 엄마를 보는데, 마음은 저절로 소리가 되어 나왔다.
‘엄마, 나 발레학원 다니고 싶어.’
눈을 휘둥그레 뜨는 엄마에게 한 번 더 말을 했었다.
‘나도 발레 배우고 싶어.’
처음으로 소리 내서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을 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 그렇게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을 한 일이 없었다.
발레 하나면 부족한 것이 없어서. 그거 하나면 충분해서. 그게 전부여서.
“그다음 날 엄마가 그랬잖아. 발레학원 다니라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다 재미없고 힘들면 그때 그만둬도 된다고.”
“그랬나?”
“응.”
어린 나이였지만 똑똑히 기억이 난다. 엄마 손을 잡고 발레학원을 가는 길이었다. 해 보고 아니면 마는 거라고. 이게 아니어도 또 재밌는 일이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럴 거라고. 그러니 두려워 말고 뭐든 해 보라고.
남자는 살면서 두 번째로 자꾸 생각이 나는 무엇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흔들어 놓는 바람이었고, 같이 가 보자고 발목을 휘감는 물살이었다.
그래도 될까.
겪어 보고 아니면 말아도 될까. 두려워 말고 한 발을 디뎌 보아도 될까.
“실은 엄마가 외출을 달고서 낮에 학원에 먼저 다녀왔었어. 어떤 학원인가 궁금해서 가 봤더니 네가 매일 와서 앉아 있다 갔다는 거야. 그래서 아, 시켜야겠다. 생각을 했지.”
“두 분 다 그만 떠드세요. 마사지 중에 말하면 주름 생깁니다.”
머리맡에서 민우가 엄숙하게 말했다. 엄마가 웃는다. 같이 웃으며 선우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깊고 부드러웠던 남자의 눈동자가 생각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