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외전 15. 처음 하는 키스
두 사람은 오페라하우스에서 제일 먼 곳에 있는 주차장까지 말없이 걸었다.
가로등이 켜진 계단을 내려오고 야트막한 내리막길을 걷는 내내 말이 없었던 선우는 회색의 벽 아래, 맨 가장자리의 자리에 멈춰 서며 말했다.
“저는 여기에 차를 세워 둬서요.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도가 인사를 건네는 선우를 바라보더니 스마트키를 눌렀다. 선우의 차와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주차된 대형 세단에서 삐빅— 소리가 나더니 불빛이 들어왔다. 바래다주느라 돌아오는 줄 알았던 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문도는 복숭아처럼 뺨을 붉히고 인사를 건네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저녁을 먹지 않겠냐는, 조금 더 같이 있어 달라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많은 말들이 목을 맴돌다가 천천히 내려온다.
이선우는 너무 예뻤고, 그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눈은 뜨겁고 머릿속은 수증기가 낀 듯했다. 이렇게 피곤한 날이면 절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곤 했다. 불쑥불쑥 손을 대고 싶은 충동을 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선우 씨도 잘 들어가요. 차선은 미리미리 바꾸고요.”
다시 한번 붉어지는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뺨을 쥐고서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도.
“네.”
그에게 아쉬운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선우. 그러면서 대답은 잘도 하는 이선우. 문도는 선우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투르르르.
걸리다 마는 시동 소리가 들려온 건 문도가 막 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투르르— 걸리다 마는 시동 소리가 요란했다.
문도는 웃음 머금은 얼굴로 낡은 차의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선팅이 무의미한 창문 안에서 선우가 흘깃 그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시동을 걸었다.
투르르, 툴툴.
단념을 하라는 듯, 오래된 차는 기운 없이 앓는 것 같은 소리를 내다가 조용해졌다. 낡고 좁은 주제에 시동까지 안 걸린다. 어쩐지 처음부터 정이 가더라니. 문도는 열었던 차 문을 닫고 선우의 차로 다가갔다.
“시동이 안 걸려요?”
똑똑. 유리를 노크하며 말했다. 웃음을 참지 못해서 그런가 선우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내비게이션 대신 걸어 놓은 핸드폰을 빼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술의전당이라느니, 오페라하우스 주차장이라느니.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긴급출동 서비스를 부르는 듯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차창을 내린 선우가 그에게 말했다.
“배터리 교체할 때가 되어서 그런가 봐요. 긴급출동 불렀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시동이 안 걸리지만 나는 괜찮다는 새침한 표정이 귀여웠다. 그 와중에 빨개진 볼은 더 귀엽고.
“데려다줄까요?”
“아뇨. 긴급출동 불렀…….”
“취소하면 되잖아.”
응? 하고 물어보듯이 고개를 기울이자 선우가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본다. 큰일 났다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웃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수 있나.
“취소 안 할 거고요. 전무님은 그냥 가셔도 돼요.”
선우가 야무지게 핸들을 잡고서 말을 한다. 문도는 눈을 들어 주차장 바로 앞의 도로를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차량이 많은 도로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퇴근 시간 정체가 절정일 시간이었다.
“길이 막혀서 한참 기다려야 오겠는데요.”
“괜찮아요.”
“같이 기다려 줄게요. 여자 혼자 두고 가기 뭐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그렇게 매너 없는 놈은 아니라서.”
이게 무슨 소리야, 라는 눈으로 선우가 그를 보았다. 정색하는 선우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선우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웃겨서. 핸들을 야무지게 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귀여워서. 그 와중에 안전벨트를 꼭 매고 있는 것까지도 사랑스러워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여자의 눈을 본다. 맑은 갈색의 눈동자가 예쁘고 또 예뻤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와서 나를 웃게 하나. 문도는 한숨처럼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피곤해서 이러지.
입술에 닿는 선우의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 * *
입술은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그게 입맞춤인데, 그게 저 사람 입술이었는데…….
운전대를 잡은 선우의 몸에서 움직이는 건 혼란스러운 눈동자뿐이었다. 그나마도 문도의 시선에 얽혀 있었다.
“싫었어요?”
가까운 거리에서 문도가 물었다. 말은 들리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진 것만 같았다.
싫고 좋고 그런 문제가……. 그게 그러니까…….
이상했다. 분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입술이 닿았던 그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스치는 숨소리, 포개지는 부드러운 입술, 비스듬히 내리뜬 눈동자. 그 눈동자에 담겨 있던 웃음과 한숨. 그런 것들이 전부…….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선우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으로 문도를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실감이 나지 않는데, 입술에는 감촉이 남아 있었다.
“방금…… 그게…… 왜…….”
더듬거리는 선우를 보며 남자가 느릿하게 웃었다.
“더 하려고 하는데.”
잠시 말을 멈추고 쉼표를 찍듯이 선우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분명 알아들었는데, 목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싫으면 말해요. 멈출 테니까.”
커다란 손이 선우의 두 뺨을 감쌌다. 고개를 기울인 남자의 입술이 선우의 입술과 포개어졌다. 커다랗게 눈을 뜬 선우에게 입을 맞춘 남자는 비스듬히 웃으며 그녀의 아랫입술을 당겨 물었다.
처음 경험하는 낯선 감각이었다.
흘러들어 온 탄식 같은 숨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물살에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고,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거듭 빨려 들어간 입술이 남자의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려지다 형체 없이 뭉개졌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아랫배에 저릿저릿한 감각이 고여 들었다. 선우는 고개를 비틀며 말했다.
“잠시, 전무님. 잠시만.”
“그럼 싫다고 해.”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싫다고 하면 멈출 것을 아는데도,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에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
입술만 달싹이는 선우를 보며 문도가 건조하게 웃었다. 감았다 뜨는 눈동자가 유난히도 밝게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아까보다 거칠게 입술이 포개어지며 아랫입술이 다시 빨려 들어간다.
하아.
떨리는 숨소리가 자신의 소리인 것이 믿기지 않았다.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며 선우를 바짝 당겼다. 핸들을 움켜쥐었던 손이 펴졌다가 다시 오므라들며 허공을 긁었다.
나직한 웃음소리와 그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욕설이 조각조각 흩어져 들렸다. 뜨거운 한숨이 흘러들어 오는가 싶더니 잇새 사이로 혀가 밀려들었다.
숨이 막히게 깊이 들어와 힘 있게 파고들었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각들이 밀려와 선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뜨겁고 차가웠다. 강하고 부드러웠다. 아프고 감미로웠다.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 어지러웠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들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문도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하아…….”
선우는 파랗게 떨려 나오는 숨을 쉬었다. 남자는 비스듬히 굽혔던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고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빨리도 오네.”
짧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탁하게 들리는 건 아마도 정신이 없어서일 거라고, 선우는 생각했다.
긴급출동 서비스 차량은 불빛을 반짝이며 나타났다.
“나오지 말아요. 입술이 엉망이야.”
남자가 슥, 손목의 안쪽으로 립스틱과 타액이 묻은 입술을 정리하며 말했다. 선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차에 앉아 몇 번이나 입술을 닦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동안, 서문도는 태연히 서비스 직원을 상대했다.
보닛을 여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배터리 점프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우에게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하고, 투르르르—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리자 직원에게 매너 좋게 인사를 한다.
긴급출동 서비스 차량이 다시 불빛을 반짝이며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꿈은 아닐까,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서문도가 다시 선우의 차로 다가왔다.
“배터리 여분이 있으면 교체를 하려고 했는데, 없다고 해서 일단 점프만 해 놨어요. 시간 될 때 서비스 센터 들러서 교체해 달라고 해요.”
선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키스를……. 아니야. 생각하지 마. 선우는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운전 조심해서 하고, 도착하면 잘 도착했다고 메시지 한 통 남겨요. 지금이라도 같이 저녁 먹고 싶으면 말하고.”
“아니요.”
선우의 빠른 대답에 문도가 웃었다. 제대로 눈도 못 맞추고 있는 선우를 물끄러미 보다 가볍게 말을 했다.
“키스 처음 해 봤어요?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 말에 선우가 퍼뜩 고개를 들어 문도를 보았다. 홧홧하게 열이 오른 얼굴은 삽시간에 빨개져 목 끝까지 붉게 물을 들였다.
“처음……이었어?”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선우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차창을 올리는 버튼을 눌렀다.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는 문도를 남겨 두고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 속의 남자가 점점 작아진다.
처음에 물어봤을 때 싫다고 했어야 하는데. 이러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런 사이 아니지 않냐고, 내가 우스워 보이는 거냐고 그렇게 말을 했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가 이렇게 속이 상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