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외전 14. 무례한 질문
“잠깐 쉬었다가 4시부터 리허설 할게요.”
부단장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을 했다. 여기저기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도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선우 언니, 우리 떡볶이 시켜 먹을 건데 오케이?”
“응.”
“이따 휴게실로 내려와요.”
선우는 먼저 가방을 들고 내려가는 혜은에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을 정리하며 토슈즈를 벗고 발을 살피고는 연습실 한쪽에 마련된 아이스버킷 앞으로 다가가 시린 얼음물에 발을 담갔다.
“으.”
옆으로 다가온 송지가 발을 담그며 소리를 냈다.
“매일 담가도 매일 짜릿해.”
송지의 농담에 선우가 웃었다. 욱신거리는 발을 시린 얼음물에 넣으면 머리끝까지 쩡 하고 얼어 버리는 것 같긴 했다.
“혜은이가 떡볶이 시킨대.”
“어, 김밥도 시켜 달라 그래야겠다. 거기 진미채 김밥 맛있던데.”
핸드폰을 든 송지가 혜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튀김과 순대도 같이 시켰다는 말을 듣는데, 경영팀 정현이 들어와 두리번거리다가 선우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선우 씨. 아까 사무실로 선우 씨 찾는 전화 왔었어.”
“전화요?”
“응. 연습 중이라니까 이리로 연락 달라던데.”
정현이 내미는 노란색 쪽지에는 핸드폰 번호가 쓰여 있었다. 그 아래로 서문도, 세 글자의 이름이 보였다.
“너한테 빌린 물건이 있다는데, 맞아?”
극성팬이 있는 단원들도 있고, 개인 정보이기도 해서 사무실에선 단원들을 찾는 전화가 오면 무슨 일로 찾는지를 물어보고,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처를 받아 놓는 식이었다.
“네.”
선우는 쪽지를 가방 안에 넣었다. 발끝부터 차근차근 얼어 가는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맞은편의 커다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지난 보름의 시간 동안 한 번씩 남자를 생각했던 이선우가 얼음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처음엔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기를.
그러다 사나흘이 지났을 때 언제쯤 연락을 해 올까 생각을 했다. 연락이 오면 우산은 그냥 가지시라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대엿새를 지나 다시 주말이 되었을 땐, 자신이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오지 않는 연락을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우산을 돌려주겠다는 말은 그냥 한 말인데, 그걸 그대로 믿고서.
그렇게 반달이 지났다.
얼음물에서 발을 꺼낸 선우는 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다시 테이핑을 하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핸드폰을 들었다.
[이선우입니다. 우산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자의 번호로 메시지를 전송한 뒤 후,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정리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웃었다.
정리할 게 있기나 한가. 떡볶이나 먹으러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문도는 예술의전당 안에 있는 카페의 야외 흡연석에 앉았다. 장우산을 옆좌석에 비스듬히 기대 놓고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담뱃불을 붙이고서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이 걸렸던 이번 중국 출장은 유난히 길었다는 생각을 한다.
숨 한번 돌릴 시간도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는데도, 중간중간 시간이 더럽게 안 간다는 생각을 했다.
문도는 피곤한 눈을 지그시 감으며 목을 뒤로 젖혔다. 천천히 눈을 뜨니 어두운 하늘 위로 하얀 담배 연기가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뭐 하는 짓인지.
출장에서 돌아온 게 오늘 점심이다. 내일을 위해 쉬면서 피로를 풀어도 모자란 마당에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우산을 굳이 돌려주러 왔다.
다가갈 여지를 주지 않는 여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상대의 호감을 얻는 데 노력을 기울여 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런 상황이 새롭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막막하기도 하고.
전화를 해 볼까. 메시지를 보낼까. 얄팍한 핑계를 대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였다. 건물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슷하게 생긴 체형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왔는데, 그의 눈에는 이선우만 보였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었고, 얇은 모직 코트에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선우가 눈이 반달이 되도록 웃으며 길을 내려온다. 동료가 뭐라고 말을 하자 이번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멀리 있는데도 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동료를 향해 손을 흔든 이선우가 카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찬 바람이 불자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걸었다.
아직 노을이 남아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여자가 걸어온다. 바람이 불어 입고 있는 원피스 자락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부드러운 미소가 남아 있는 얼굴이 눈이 부시게 어여뻤다. 맥이 빠진 웃음이 나왔다. 저 얼굴이 보고 싶어 피곤에 짓눌린 상태로도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서.
답 없는 새끼.
문도는 선우가 잠시 멈춰서 핸드백을 뒤적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갑을 찾아 다시 걷는 여자는 아직 그를 보지 못했다. 카페 앞에 거의 다 와서는 안으로 들어가려다 그를 발견하고는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문도는 담배를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에게 다가갔다. 열흘하고도 닷새 만의 재회였다.
“잘 있었어요?”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네……. 전무님도…… 잘 지내셨어요?”
조금 멍해서 그런가 대답이 늦게 나왔다. 남자의 뒤로 의자에 기대 세워 놓은 검은색 우산이 보였다. 선우는 눈에 익은 우산을 보며 말했다.
“우산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그럴 거예요. 기껏 가져왔는데 주인이 안 받겠다고 해서.”
그럼 아까 메시지를 보냈을 때 오는 길이었던 걸까, 생각하는데 문도가 이어서 말했다.
“출장 다녀오느라 연락이 늦었어요.”
“아……. 네.”
“우산 떼먹는 줄 알까 봐 돌아오자마자 연락한 건데, 너무 늦은 건가.”
“아니에요. 그냥 가지셔도 됐어요. 아빠 친구분이 기념품 사업을 하셔서, 집에 여러 개 있어요. 비도 안 왔고요.”
당황해서 그런지 말이 두서없이 나왔다.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보는데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선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앉아요. 커피 사 올게요.”
선우에게 자리를 권하며 남자가 일어섰다.
“아뇨, 괜찮…….”
선우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며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뜨거운 김이 오르는 커피 한 잔을 가지고 나왔다.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앉으라 눈짓을 한다.
선우는 망설이다 자리에 앉았다. 앉으라 눈짓을 한 남자는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선우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두 손에 쥐고서 한 모금을 마셨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도 컵을 들어 남아 있던 커피를 마신다. 잠시 말이 없는 시간이 흘렀다.
“영준 씨 고백은 거절했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별것 아닌 질문이라는 듯 남자가 웃고 있었다.
선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예상대로, 그리고 선우의 예상대로 영준은 다시 연락을 해 왔다. 할 말이 있다고 했고,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그 할 말이 무엇일지 선우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할 말이 있다며 둘만의 자리를 만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고도 눈치를 못 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무례한 질문이세요.”
선우의 말에 맞은편의 남자가 웃는다. 그런 건 무례의 축에도 못 낀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선우에게 말했다.
“우산은 핑계인 거 알잖아.”
진짜 무례한 말을 툭 던져 놓고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항상 당당할까.
선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문도를 바라보았다. 문도가 커피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의 여자친구한테 고백을 하는 헛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은데요.”
대꾸하지 않는 선우를 보고도 남자는 가볍게 웃고 만다. 눈앞의 남자는 아마도 결과까지 짐작하고 있을 거였다.
남자의 짐작대로 선우는 영준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춤을 추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을 했던 선배였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 주말에 우연히 이 남자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선배를 조금은 더 만나 봤을까. 거절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영준의 고백을 듣는 자리에서 눈앞의 남자를 생각했다. 생각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무심코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
어렵게 마음을 말하는데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는 게 미안했고, 그래서 거절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선후배로 남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영준이 더듬거리며 괜찮다고 했다.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선우는 영준과는 상반되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문도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가감 없이 표현하면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긴장을 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남자를 계속 봐야 하는 건 아니었다. 끌리는 것과 별개로 남자는 너무 세고 강했다. 발을 담그면 급류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
선우는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이만 일어나 볼게요.”
“그럴까요?”
지금도 그랬다. 선우의 말에 남자는 미련 없이 일어나 계산서를 집어 든다. 남자의 얼굴은 서늘해 보이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선우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이 남자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