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외전 13. 거절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선우는 난감한 얼굴로 운전대를 쥐었다. 안 그래도 능숙하지 않은 밤 운전인데, 취객을 둘이나 태우고서 낯선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어, 선우야. 다음 블록에서 우회전해야 해. 내비 따라가면 한참 돌아가는데.”
조수석에 앉은 영준이 길을 살피며 말했다. 조금 더 일찍 말을 해 주지. 선우는 차선을 세 개나 건너가야 하는 대로를 바라보며 연신 사이드미러를 흘깃거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의 도로에 집중을 하려 했지만 젖은 도로에 반사된 불빛 때문에 차선도 잘 보이지 않았고 간격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긴장해서 사이드미러를 보며 간격을 살피는데, 뒷자리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지금.”
내내 별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기 신호를 주는 남자의 목소리가 태연하기만 했다. 백미러로 남자를 흘깃 보느라 끼어들 타이밍을 놓쳤다. 좁아지는 차 간격에 선우는 핸들을 틀지 못하고 다시 직진을 했다.
끼어들기를 실패하고 나자 자신도 모르게 다시 백미러로 눈이 갔다. 남자의 탓이 아닌데 괜히 얄밉다. 눈이 마주치자 뒷자리 남자가 슬쩍 웃는다. 신경이 곤두선 선우는 입술을 깨물며 핸들을 꽉 쥐었다.
“어, 선우야. 우회전, 우회전 해야 하는데.”
알아요, 나도.
선우는 그 말을 꾹 삼키며 다시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차선 하나를 갈아탔지만, 신호가 코앞인데 우회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차선까지는 아직도 두 번이나 더 끼어들기를 해야 했다. 뒷자리에 앉은 남자는 창문으로 옆을 쓱 보더니 이젠 틀렸다는 듯 시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힘들 것 같으면 직진해요. 무리하지 말고.”
하……. 진짜.
선우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영준 선배까지만 태웠어야 하는데, 대체 왜 저 남자까지 태워다 준다고 말을 했을까. 새삼 후회되는 일이었다.
* * *
이 엉뚱한 동행의 시작은 라운지 바에서 이루어졌다.
영준에게 한 끼에 20만원 가까이하는 밥을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어 커피든 디저트든 사겠다고 했더니, 다음에 다시 만나 밥을 사 달라고 했다.
순간 멈칫했다. 영준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는 식으로 계속 만나도 괜찮을는지.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 그냥 오늘 사겠다고 했다. 다음을 약속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이라서.
그랬더니 영준이 술을 한잔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 하고 싶은 말도 있다며. 그 역시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차라리 오늘 결론을 짓는 게 나을 것 같아 멀리 가지 않고 호텔 위층의 라운지 바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선우는 커피를 시키고, 영준이 병맥주를 시켰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색하긴 해도 준비 중인 공연 이야기며 무용단 사람들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 갔으니까.
영준은 긴장한 듯 맥주를 마셨고, 정적이 자주 흘렀다. 딱히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커피잔을 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또였다.
시간이 멎는 것 같은 기분. 주위가 사라지며 흐릿해지는 기분.
투명한 유리잔에 위스키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조금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녀를 보았다. 잔을 쥐고 있는 길쭉한 손가락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진 또 괜찮았다.
그냥 눈이 마주친 것뿐이라 생각했으니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었을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술잔을 들고서 선우와 영준이 앉은 자리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설마 했다.
설마.
그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박영준 씨 맞으시죠? 남자는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영준에게 인사를 했다. 무대를 인상 깊게 보았다며 명함도 내밀었다. 선우에게는 구면이라 더 반갑다 말하고는 자연스럽게 합석을 청했다.
얼렁뚱땅 이루어진 합석의 분위기는 뭐라 정의할 수 없었다. 영준은 어색하게 남자와 대화를 이어 갔고, 선우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대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뻔뻔할 정도로 편해 보이는 건 서문도라는 남자 혼자였다.
남자가 위스키를 한 잔 더 시키고, 영준도 엉겁결에 병맥주를 더 시키고, 대화는 부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래, 그래도 거기까진 그나마 괜찮았다.
문제는 자리를 파한 뒤, 호텔 입구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나란히 섰을 때였다. 사람은 셋인데 우산은 선우가 들고 있는 것 하나뿐이었다.
주차장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던 선우는 난감했다. 혼자 우산을 쓰고 주차장까지 걸어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셋이 한 우산을 쓰는 것도 웃겼다.
그냥 호텔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주차장까지 내려가면 되겠다 했는데, 생각해 보니 두 남자는 술을 마셨다.
당연히 대리를 불러 집에 가겠거니 싶어 인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영준이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선우에게 말을 했다.
“선우야, 나 집까지 태워 줄래?”
어……. 하고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릴 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한, 이상하게 모순적인 눈동자를 보는데 괜히 의식이 되었다. 이 자리에 남자가 없었으면 미안하지만 운전이 서툴러서 안 된다고 말을 했을까.
“네……. 선배님. 데려다 드릴게요.”
시선은 남자를 향해 있으면서 대답은 영준에게 했다. 미세하게 올라가는 남자의 눈썹과 이 상황이 웃긴다는 듯 슬쩍 비틀어 웃는 입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리를 부르든 택시를 타든 알아서 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라고. 남자도 별다른 이야기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에게 대답했다. 조심히 들어가라고. 영준에게도 다음에 또 보자며 매너 있게 인사를 건넨다.
서먹한 인사를 마치고 우산을 펼쳤다. 영준이 당연하다는 듯 우산 안으로 들어오는데 이상하게도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옆의 영준은 부담스럽고, 뒤의 남자는 신경이 쓰였다. 선우는 잠시 멈춰 섰다. 머뭇거리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우뚝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한쪽 입매를 끌어당기며 느리게도 웃는다.
선우는 망설이다 우산 밖으로 나왔다. 한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빗속을 걸어 남자에게 다가갔다. 왜 다시 왔냐는 듯 자신을 보는 남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괜찮으시면 같이 타고 가실래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올라가는 남자의 입꼬리가 어쩐지 얄미웠다.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을 할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그럼.”
네 부탁을 내가 들어준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상황이 웃기게 돌아가게 된 것이.
* * *
영준은 마포가 집이라 했고, 남자는 여의도에 산다고 했다. 동선은 자연스럽게 남산 근처인 호텔에서 마포로, 마포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선우가 사는 동네인 목동으로 짜여졌다.
“어, 선우야, 들어가. 오늘 태워 줘서 고맙고. 이따 연락할게.”
영준이 비상 깜빡이를 켜고 아파트 입구에 차를 댄 선우에게 말했다. 남자와도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흘깃흘깃 뒤를 돌아보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후. 한숨을 돌린 선우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차라리 나도 술을 마실걸. 어쩌다 이렇게 기사 노릇을 하고 있나 후회를 하며 뒷자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여의도라고 하셨죠? 어디로 가면 될까요?”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입력하려는데 답이 없었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달칵달칵, 비상 깜빡이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선우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가 느리게 대답을 한다.
“……63빌딩.”
그 근처 어디쯤 사나 보다 생각을 한 선우는 의심 없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했다. 거치대에 핸드폰을 거는데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이고, 우리 집은 이태원인데.”
그 말에 선우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장난을 하는 건가 싶은데 남자의 눈빛에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집에는 알아서 갈 테니까, 우산이나 빌려줘요.”
황당해지려는 순간, 달칵 문이 열리며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빌려주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뒷좌석 바닥에 놓았던 우산을 가지고 내려선 활짝 편다. 그러더니 문득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차창으로 고개를 숙이고 유리창을 내리라 손짓을 했다. 지잉— 차창이 내려가자 남자가 말했다.
“박영준 씨 거절해요.”
“네?”
고백은 듣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거절을 하고 말고를 왜 제삼자가 이야기하는 건지. 황당하여 바라보는데 남자가 웃음기 없는 눈으로 말했다.
“거절해.”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해, 라고 생각할 때였다. 남자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산은 나중에 돌려줄게요. 조심해서 가요.”
그 말만 남겨 놓고 빗속으로 성큼 걸어간다. 정말이지 이상한 남자였다.
* * *
“다녀왔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땐 기운이 바닥나 버린 상태였다. 선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현관에서 중얼거린 뒤 신발을 벗었다.
“오, 어떻게 살아 들어오긴 했네? 밤 운전은 힘들다더니?”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방의 문이 활짝 열리고 민우가 나왔다. 선우는 말도 하기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누나 왔어!”
으응,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주방 안쪽에서 들려왔다.
“엄마 지금 요리하는 중이야?”
온 집안 가득한 버터 냄새에 민우에게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카레 끓인다고 양파 볶는 중이야. 연구부장님한테 비법을 배워 왔다는데 30분째 저러고 있어. 자리를 뜨면 안 된대.”
“아빠는? 아직이셔?”
“수능이 낼 모래잖아. 한창 특강 중일걸?”
방까지 졸래졸래 따라온 민우가 문간에 기대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치즈 케이크는?”
“응? 아, 맞다. 치즈 케이크.”
“아, 누나 진짜. 내가 꼭 사 오라고, 어?”
“다음에. 민우야. 다음엔 꼭 사 올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 선우는 외투를 벗어 걸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끈으로 머리를 동그랗게 묶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엄마, 저 왔어요.”
“어, 그래. 선우야 이것 좀 봐봐. 이게 갈색…… 비슷하지? 이게 탄 건지 캐러멜라이징이 된 건지 구별이 안 되는데, 어때 보여?”
“음…….”
족히 일주일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냄비에 흐물거리는 양파죽 같은 것이 끓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카레가 끝내주게 맛있대. 엄마 이거 한다고 화장실도 못 가고 있었잖아. 민우야, 잠깐만 이거 젓고 있어.”
나무 주걱을 받아 든 민우가 두어 번 휘적거리더니 선우를 곁눈으로 보며 말했다.
“씻고 들어가서 쉬어. 어차피 누나는 도움도 안 돼.”
“으……. 알았어. 그럼 먼저 들어간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샤워까지 마친 선우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형광등의 밝은 불빛에 눈이 시려 와 손으로 눈을 덮었다.
‘괜찮으시면 같이 타고 가실래요?’
그때 그 말을 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에 씐 것처럼 말을 건넸다. 그 순간의 이선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남자의 앞에 서면 생각지 않았던 말을 하게 되고, 예정에 없던 행동을 하게 되었다. 자꾸만 무언가를 흔들어 놓는 사람.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