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외전 12. 눈이 마주치는 순간
비가 많이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차에서 내린 문도는 키를 발레 요원에게 넘겼다. 짧은 시간에도 굵은 빗방울이 머리를 적셨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한성 호텔의 로비 라운지로 들어서자 특유의 따뜻한 불빛이 쏟아지듯 내려왔다. 문도는 왼편의 라운지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약속 시간은 5시.
20분 정도가 남아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먼저 한 잔 시켰다. 피아노 선율과 뜨겁고 진한 커피. 안락한 소파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스산한 가을 정원. 그 풍경 위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선우입니다.’
느리게 감았다 뜨는 눈꺼풀 사이로 여자의 잔상이 남는다. 부드럽게 미소 지었던 무대에서의 모습. 차분히 인사를 하던 모습. 깜짝 놀라 걸음을 물리던 모습. 뒤를 돌아 실피드에요, 라고 말을 하던 모습.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는 여자를 생각했다. 얼굴 한 번 본 것이 전부인, 이선우라는 이름의 여자를.
잠이 들기 전에, 아침에 눈을 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순간순간에. 생각하지 않으려는데 생각났고, 떠올리지 않으려는데 떠올랐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락 없이 누군가가 머릿속을 헝클이는 그 기분은 뭐랄까,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의 의지를 배반한 무엇이 자신을 지배하는 느낌은 거슬리는 것을 넘어서 반감까지 들게 했다.
한 번 본 게 전부인 여자가 뭐라고.
커피를 반잔 정도 마셔 갈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네.”
— 약속 장소에는 잘 나갔나 확인차 전화했다. 바쁜데 마지못해 나가는 거라고 말해 뒀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잘 나왔습니다. 걱정 마세요.”
계획에도 없었던 만남을 허락한 이유도 어쩌면 그 반발심에서였을 거다. 몇 번 아버지 쪽에서 보채듯 이야기가 있었던 송원 식품의 셋째딸. 후원의 밤에 인사를 나누고 난 뒤 아버지에게 한 번 더 연락이 왔다고 했다.
거절을 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불쑥불쑥 떠올라 일상을 비트는 여자와 떠올릴 때만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자. 그가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단연코 후자였으니.
* * *
붉은색 신호등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선우는 열심히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은정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급하게 이야기를 했다.
“선배. 저 거의 다 와 가요.”
엄마가 10년이 넘게 타고 다니던 낡은 차는 블루투스 기능이 고장이 났다. 번거로워도 손을 뻗어 통화 버튼을 눌러야 했고, 상대방이 들을 수 있게 크게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요즘은 한 번씩 시동이 제대로 걸리지 않았다.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러 배터리 점프를 받고서 출발하느라 여유 있게 나왔는데도 약속 시간에 빠듯하게 도착할 듯했다.
“한 5분? 그 정도 걸릴 것 같아요.”
— 아, 다 와가? 근데 있잖아. 나랑 인수는 오늘 못 갈 것 같아. 둘이 재밌게 놀아.
“네?”
— 영준이는 벌써 도착했다더라. 베이커리 쪽에서 기다리고 있대.
“그럼 식사는…….”
호텔 뷔페 초대권이 네 장이나 생겼다며 약속을 잡은 은정이었다. 주말엔 식구들과 집에서 쉬고 싶다고 말을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날짜가 임박했고, 런치도 아니고 디너표이고, 날리기엔 너무 아까운 거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가 보겠느냐며.
— 흐흐. 영준이가 쏜대. 맛있게 먹어!
뭐라 말을 더 잇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선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앞 유리 너머로 호텔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다.
집으로 다시 갈까. 단둘이 식사를 하는 건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하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선우는 이대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영준이 도착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정이 생겼다며 돌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래쪽 주차장 건물에 차를 세우고, 우산을 꺼냈다. 호텔로 올라가는 차량을 불러 주겠다고 직원이 말했지만 괜찮다 말을 하고 우산을 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우산을 펴고 50미터쯤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가 사람들이 오가는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우산을 접은 뒤 뒤를 도는데 키가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아는 사이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남자와 시선이 얽히며 잠시 모든 것이 멈춰 섰다.
먼저 인사를 건네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빗소리가 멀어지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저 눈을 마주한 것뿐인데 남자와 선우, 두 사람만이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보고 서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발목이 묶인 것처럼 멈추어 있는 선우를 향해 성큼 걸어왔다. 빛을 머금은 갈색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고 생각을 할 때였다.
“또 보네요. 이선우 씨.”
남자의 목소리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무척이나 낯설게 들려, 선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 * *
약속 시간을 30분 넘기고도 송원 식품의 셋째딸은 오지 않았다. 대신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한 통이 왔다. 네, 하고 전화를 받으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약속 상대였다.
오는 길에 오토바이와 접촉 사고가 나서 늦어진다는 말을 전하며 죄송하다고 했다. 다음에 꼭 다시 뵙고 싶다고.
문도는 괘념치 말고 사고 처리를 잘하라고 친절히 이야기를 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노라고도 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이 쓰이는 어떤 여자 때문에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예정에도 없던 만남을 가지려 했던 게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간만에 일찍 들어가 잠이나 더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입구에 나와 차량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데, 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환영인가.
몇 번씩 생각이 나더니 이제는 착각이 드는 건가 생각을 했지만 골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검은색 우산을 쓰고서 천천히 걸어오는 여자는 환영일 수가 없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나.
문도는 기막혀 웃었다.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었던 여자의 모습에 파직파직 금이 간다. 상상은 실제에 현격히 미치지 못했다. 실제의 여자는 너무 생생해서 눈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걸어오고 있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군가 강제로 시선을 고정시켜 둔 것만 같았다. 눈만 뗄 수 없었을까. 손을 뻗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뺨을 쥐고서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의 품에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활짝 웃는 모습도, 엉엉 우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눈을 맞춘 채로 혀를 얽고 몸을 묻고 싶었다. 온통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은 원초적인 충동이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어이가 없었다.
뭘 안다고. 몇 번이나 봤다고.
스스로를 어이없어하며 문도는 아래에서부터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걸어 입구 안쪽으로 들어온 여자가 커다란 우산을 접는다. 빗물을 툭툭 털고서 뒤를 돌았고, 마침내 그와 마주친 깊은 갈색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눈이 마주하는 순간 알았다.
여자는 기어이 앓아야만 지나가는 열병 같은 존재가 될 거라는 걸. 끌리는 마음을 부정하면 할수록 징그럽게 생각날 거라는 것도.
이렇게 다시 만나서는 안 됐었는데. 피해 가기에는 늦어 버렸다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또 보네요. 이선우 씨.”
말을 건네자 잠시 대답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을 손끝으로 문질러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헛웃음이 나올 때, 선우가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전무님.”
“잘 지냈어요? 일주일만이네요.”
“네.”
선우가 어색한 대답을 한 뒤 안쪽을 살폈다. 잘 지냈냐는 의례적인 질문조차 없었다. 안쪽을 살핀 뒤 머뭇거리며 그를 보았다. 문도는 다음 말을 어렵지 않게 예상했다.
선약이 있어서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남자친구?”
무례한 질문에 이선우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걸 말해 줘야 할 필요조차 없다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볼 뿐이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목동에 오래 산 친구가 있는 그 남자인가.”
걸음을 옮기려던 선우가 다시 그를 보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나. 눈동자에서 속마음이 읽혔다. 지금 이게 나만 이런 거야? 너는 내가 신경 쓰이지 않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데 선우가 대답을 한다.
“네.”
“저녁 약속?”
“네.”
“둘이서만?”
“네.”
묻는 자신도 웃기고 대답하는 이선우도 웃겼다.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는 충동. 뭔가 반응을 보고 싶다는 충동. 몇 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충동. 안쪽에 있을 멀건 흰죽 같은 놈에게 보내고 싶지 않은 충동. 그런 것들이 불쑥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가지 말지?”
반 토막이 난 말과 선을 넘은 참견이 어이없다는 듯 선우가 문도를 보았다.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가지 말고 나랑 먹어요. 밥이든 술이든 사 줄 테니까.”
선우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맑은 빛이 도는 고요한 눈동자가 호수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괜찮습니다. 살펴 가세요.”
건조한 거절이었다. 여자에게 밥을 먹자 먼저 말을 한 것도, 다른 남자를 제치라 한 것도, 거절을 당한 것도 처음이지만 낯짝이 두꺼워서인지 창피하지도, 후회가 되지도 않았다.
“그래요. 살펴 가 볼게요.”
담담히 말하자 선우가 이상한 사람을 보듯 그를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안쪽을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보며 문도도 안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밥보다는 술이 당기는 흐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