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51화 (151/168)

151. 외전 11. 공기의 정령

입구에서 나누어 준 팸플릿에는 올 한 해 동안 국립발레단이 공연했던 작품들이 적혀 있었다. 문도는 자리에 앉아 팸플릿을 눈으로 훑었다. 제목만 아는 유명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자리에 앉자 불이 꺼지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한 공연은 10분 정도로 짧게 짧게 진행이 되었는데, 솔로로 나와 하이라이트 부분을 선보이거나 남녀 듀엣으로 나와 파드되를 추었고, 국립발레단 이은주 단장이 간단한 해설을 곁들였다.

이번에 세 번째던가. 네 번째였나.

문도는 감흥 없는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애프터 파티까지 어머니를 에스코트할 생각으로 참석을 하긴 했지만 원래 이런 쪽으로는 무감한 편이었다.

1년에 한두 번 임직원이라는 이유로 의무적으로 단체 관람을 해야 할 때나, 지금처럼 꼭 자리를 지켜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제 발로 공연장을 찾은 적이 없었다.

“이번 작품은 ‘라 실피드’입니다. 공기의 정령이라는 뜻인데요, 낭만 발레의 대표작이죠.”

마이크를 든 단장이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 뒤로도 작품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설명을 조금 더 이어 갔다.

관객석의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고 무대의 조명이 점점 밝아지는 가운데 문도는 꿈속의 여자에 대해 잠깐 생각을 했다.

얼굴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고 실루엣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한 가지 감정만은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나를 봐.

목 끝까지 지글지글 끓는 감정으로 여자의 뺨을 쥐고서 입을 맞추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봐. 그 무엇보다 나를, 오로지 나만을.

문도는 불이 꺼진 관객석에 앉아 꿈이니까 가능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있을 리 없으니. 가볍게 실소하며 눈을 감았다 뜰 때였다. 무대의 왼편에서 흰색의 튀튀를 입은 발레리나가 사뿐히 걸어 나왔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움직임에 시선이 제일 먼저 갔다. 그대로 허공을 날아 환영처럼 사라진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무게감이 없었다. 여자가 사뿐사뿐 걸을 때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튀튀가 나풀거렸다.

이어 반대편에서 발레리노가 등장을 했다. 두 사람의 파드되가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파트너를 향해 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여자는 빛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손을 대면 흩어질 것만 같고 입김만 불어도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공기의 정령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렸다.

문도는 손에 들린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이선우. 여자의 이름을 읽은 문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무대를 보았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빤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일곱 개의 짧은 공연이 모두 끝난 후에는 식사와 함께하는 애프터 파티가 있었다. 오랜만에 나온 자리라 그런 건지, 어머니의 옆자리라 그런 건지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인사를 왔다.

“우 대표님은 자주 뵈었는데, 서 전무는 이런 자리에서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씨엔 커뮤니케이션 의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문도에게 말을 걸었다. 발레단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고 소개를 하며 대화를 이어 가는 걸 적당한 미소로 상대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단원들 들어오네요.”

공연을 했던 단원들이 줄지어 입장을 했다.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여자에게 문도의 시선이 닿았다. 무대 화장을 지웠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년의 남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여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단조로운 회색의 모직 원피스와 동그란 진주 귀걸이.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와 부드럽게 움직이는 산홋빛 입술.

문도는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잔을 들었다. 길고 섬세한 유리잔의 목을 쥐고서 남은 술을 천천히 마셨다. 잔 너머의 여자는 이제 교수처럼 보이는 어떤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대표님, 어려운 걸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은 부회장님이 안 보이시네요?”

어느새 다가온 단장이 우현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아들이랑 동행했어요.”

“너무 훤칠한 분이랑 같이 오셨는데요?”

이은주 단장이 웃으며 문도를 보았다. 문도는 묵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서문도입니다.”

“이은주예요. 대표님께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잘생긴 분이실 줄은 몰랐지만.”

단장이 뼈마디가 톡톡 불거진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며 가볍게 미소를 짓는데 여자가 문도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가 싶은 순간, 누군가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문도는 가까워지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도의 시선을 눈치챈 여자의 표정이 조금 어색해진다. 미소가 지워진 차분한 얼굴로 그를 스치는 여자는 뒤쪽에 서 있던 단발머리의 여자를 향해 손을 작게 흔들었다.

“어, 선우 씨.”

단장의 목소리에 여자가 멈칫 뒤를 돌았다.

“선우 씨는 후원의 밤 처음이지? 우 대표님께 인사드린 적 아직 없겠네?”

“네. 처음 봬요.”

“인사드려요, 서도 금융 그룹 우현희 대표이사님이세요. 아드님이신 서도 케미컬 서문도 전무님. 이쪽은 이번에 드미솔리스트로 승급한 이선우 발레리나. 이번 신작으로 솔로 데뷔한 우리 발레단의 유망주예요.”

여자의 시선이 단장의 안내에 따라 어머니에게 닿았다가 그에게 닿았다.

고요하고 깨끗한 눈동자가 그를 마주하더니 이내 다시 어머니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이선우입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다. 여자의 모든 것이 신경줄을 죽죽 그어 내린다. 문도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 * *

애프터 파티가 한창인 연회장을 빠져나온 선우는 로비의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달아오른 얼굴도 식힐 겸,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자리도 잠시 피할 겸 바깥쪽에 위치한 널찍한 정원으로 향했다.

“이런 행사는 처음이라 힘들지?”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멍하니 걷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선선하게 웃고 있는 남자는 학교 선배이기도 한 현대무용단의 영준이었다.

“아, 선배님.”

“나는 무대보다 이런 행사가 더 힘들더라.”

영준의 말에 선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영준의 말대로 공연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인사와 소개가 더 힘들었다.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몇 마디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동기들도 있고, 선배들도 있고, 교수님도 계셔서 많이 어색하지는 않아요.”

“학교 다닐 때가 좋았어. 마음대로 살아도 됐는데. 월급받는 신세가 되니 신경 쓸 게 많네.”

현대무용을 전공한 영준은 춤으로도, 이력으로도 튀는 존재였다.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국무용을 하다가 현대무용으로 전공을 바꾼 것도 그렇고, 재학 중에 스트릿 댄스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것도 그랬다.

“지난번 공연 왔었다며. 은정이가 얘기하더라.”

“네. 은정 선배랑 인수 선배랑 같이 갔었어요.”

“인사하지. 그랬으면 술 한잔 사 줬을 텐데. 그러고 보니 은정이도 왔던데, 봤어?”

“네. 아까 인사했어요.”

졸업을 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며 학원을 차린 은정은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며 한참 토로를 했었다.

“나 좋다고 한참 따라다니더니, 인수랑 사귈 줄 누가 알았냐. 역시 남자는 얼굴인가.”

영준이 농담을 하고서 먼저 크게 웃는다. 선우도 조금 어정쩡하게 웃었다.

“맞다. 너 목동 산다며.”

“네.”

“내 친구도 목동 사는데. 전지수라고 알아? 거기서 오래 살았는데.”

선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적막이 흘렀다.

“그……. 이따 집에 같이 갈래? 내가 이번에 차를 뽑았는데, 가는 길에 내려 줄게.”

“저도 차 가지고 와서요.”

“아, 차 가지고 왔구나. 하루 여기 놓고 가면 주차비 많이 나오려나…….”

그때 마침 전화벨이 크게 울렸다. 주머니를 더듬거린 영준이 손을 들어 양해를 구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PD님. 아……. 재촬영이요? 잠시만요,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요.”

미안한 표정으로 자리를 옮기며 전화를 받는 영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선우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색했던 대화가 끝이 나니 이제야 좀 마음이 편했다.

이제야 좀 쉬어 보려는데, 로비 출입문으로 교수님과 선배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선우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붙잡히면 다시 또 시작일 거였다.

건물 뒤편으로 가면 인적이 드문 곳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긴 벤치도 있었고, 커피 자판기도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야지. 그 생각을 하며 모서리를 돌던 선우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아. 죄송합니다.”

코너를 돌자마자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선우는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들었다. 벽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던 남자가 선우를 본다.

“죄송할 것까지야. 부딪친 것도 아닌데요.”

설핏 웃어 주는 얼굴이 친절한 듯 무심했다. 기억이 안 나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연회장에서 몇 번 눈이 마주쳤던 남자였다. 사람들 무리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서늘한 눈빛을 가진 남자.

선우는 실례했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남자를 피해 걸음을 걸었다. 두어 걸음쯤 옮겼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 실파드, 맞나요? 실피드였나.”

선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싱긋 웃는다.

“실피드예요. 라 실피드.”

남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 실피드, 한 번 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그리고는 갈 길 가라는 듯 손가락에 들려 있던 담배를 입으로 가져간다. 스치듯 눈이 마주치자 한 번 더 가볍게 웃어 준 남자는 이내 무심한 눈으로 정원 어딘가를 보았다.

서문도.

선우가 기억하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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