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외전 10. If
여름의 평창은 온통 짙은 녹색이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산길을 따라 달린 지 한 시간 남짓. 인가가 점점 멀어진다 싶더니 길 끝에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네, 바르는 모기약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두 번만 발라 주면 되고요. 네, 접종은 잘 했으니까 혹시 저녁에 열 오르는지 그것만 봐주시면 돼요. 네,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선우는 멀리 보이는 철문을 중년의 남자가 여는 모습을 바라보며 통화를 마쳤다. 운전대를 잡은 문도가 선우에게 말했다.
“시터 아주머니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모기 물린 데가 많이 부었어요. 혹시 약 너무 바르실까 봐. 스테로이드 들은 거라 자주 바르면 안 되거든요.”
점점 가까워지는 커다란 문을 보다 선우가 이어 말했다.
“규원이도 데려올걸 그랬나 봐요.”
아무래도 처음 오래 떨어지는 거라 그런지 불안한 모양이었다.
“여기 모기 많아.”
“그래도…….”
“그리고 이제 막 돌 지난 애 데려오면 그게 신혼여행이야?”
그랬다. 결혼하고 1년을 훌쩍 넘겨서야 둘만의 늦은 신혼여행을 떠나올 수 있었다. 선우의 방학, 규원의 돌, 문도의 휴가까지 맞추느라 날짜는 점점 밀려 7월 하고도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다를 건넜어야 하는 건데.”
문도가 천천히 속력을 줄이며 말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일주일. 규원을 떼 놓고 가기 위해 문도는 해외를 골랐다. 비행도 지긋지긋하고 여행이라 해도 어차피 호텔과 그 근처가 될 게 뻔했지만, 그래도 신혼여행이니까.
행선지를 국내로 바꾸자고 한 건 선우였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미국, 하와이, 몰디브, 기타 등등. 마음대로 골라잡으라 했지만 얼굴에 근심이 짙어지더니 꼭 해외로 가야겠느냐고 물었다.
규원이를 놓고 멀리 가고 싶지 않다는 말에 만인의 신혼여행지인 제주도를 물망에 올렸는데, 장 여사가 평창 별장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뜬금없이 장소가 정해졌다.
“안녕하세요.”
커다란 문 앞에서 차를 세운 문도는 직접 차에서 내려 관리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우도 내려 인사를 하고, 결혼을 축하한다는 덕담을 들으며 키를 건네받았다.
이만 내려가 볼 테니 편히 쉬시라는 인사를 받고 다시 차에 올라타자 커다란 문이 닫혔다. 쭉 뻗은 숲길이 잠시 더 이어지더니 확 트인 정원과 깨끗한 흰색의 건물이 나왔다.
“수영장도 있네요?”
지붕이 기울어진 흰색의 이층집에 푸른 수영장. 그 뒤의 울창한 숲이 인상적이었다.
“뒤에는 황토방도 있어. 원한다면 불 때 줄게.”
태양이 작열하는 7월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문도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내렸다. 선우가 와, 감탄을 하며 정원을 바라본다.
“짐 내릴 테니까 한 바퀴 둘러보고 있어.”
“같이해요.”
“몇 개나 된다고. 구경하고 있어.”
문도의 말에 선우는 천천히 정원으로 나왔다. 물이 가득 찬 푸른 수영장이 보이고 넓은 잔디밭도 보였다. 데크 위로는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는 곳도 보였다.
“선우야.”
앞쪽의 데크를 둘러보는데 문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도니 문도가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에어컨이 켜져 있어 시원한 실내는 거실과 주방이 있는 1층과 침실이 있는 2층으로 나뉘었다. 냉장고에는 식재료가 가득했고, 친절하게 준비해 놓은 밀키트 음식도 많이 보였다.
선우는 트렁크를 들고 2층으로 향하는 문도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욕실이 딸린 제일 큰 방에 짐을 풀고 베란다처럼 연결된 데크로 나섰다.
“와.”
1층의 수영장과 정원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데크에는 티 테이블도 있고, 흔들 그네도 있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탁 터진 시야가 압도적이었다. 첩첩의 산을 발아래에 깔고 있는 느낌이었다.
“회장님이 해마다 오신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공기만 마셔도 건강해지는 것 같아?”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 테이블에 앉아 황홀할 정도로 짙푸른 녹음을 바라보다 응? 하고 눈을 좁혀 떴다. 탁자 위를 무언가로 긁어서 쓴 글씨가 보였다.
‘씨발.’
익숙한 욕설 옆으로 삐뚤삐뚤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선우는 그 옆의 흐릿한 글자를 손으로 더듬었다.
‘감옥이야, 서울 언제가ㅠㅠ 아아아악.’
피식 웃음이 나오는 유라의 흔적이었다. 선우는 글씨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온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헤어졌던 게 아직도 미안했다.
“뭐 해?”
“그냥 구경했어요.”
문도에게도 이야기해 줄까 하다가 모기가 많다고 투덜거렸던 유라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냥 일어섰다. 유라와 둘이서만 간직하고 있는 추억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테니까.
푸른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라솔 안에 앉은 선우는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수영을 하는 문도를 잠시 바라보다 메시지가 들어오는 소리에 다시 핸드폰을 보았다.
‘규원아 할머니 안경 어디 있지?’
‘함미. 함미 거.’
규원이 소파 테이블 위에 있는 돋보기안경을 집어 장 여사에게로 가져오는 장면을 찍은 거였다. 안경을 손에 꽉 쥐고 흔들며 걸어오는 규원을 장 여사가 호들갑스럽게 안아 주었다.
‘아구, 우리 규원이가 함미 안경 찾아 줬네. 함미 거지?’
요즘 물건을 주인에게 찾아 주는 놀이에 푹 빠진 규원을 보며 웃고 있는데 화면 위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뭘 그렇게 봐?”
“아, 여사님이 규원이 영상 보내 주셔서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문도가 고개를 숙였다. 쭉 뻗은 탄탄한 몸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소독약 냄새가 가까워지며 선우의 팔에 물기 묻은 몸이 닿았다. 옆에서 선우의 핸드폰 화면을 바라본 문도가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족방?”
“네. 어머님이랑 장 여사님이랑. 규원이 영상도 올리고 저녁 메뉴도 알려 주시고 그래요.”
“나만 빼고 셋이 이러고 놀았어?”
문도가 화면에 손가락을 쓱 대며 말했다. 주르륵 올라가는 대화창에는 주로 동영상이 많았다. 규원이가 말하는 영상, 낮잠 자는 영상, 스스로 숟가락질을 해서 밥 먹는 영상 등등.
“아……. 초……대를 할까요?”
뒤늦게 물어보는 선우를 보며 문도는 피식 웃었다. 그때 다시 한번 영상 메시지가 들어왔다. 선우가 손으로 누르자 반은 흘리면서도 내가, 를 외치며 혼자서 숟가락질을 하는 규원의 모습이 보였다.
“밥 먹나 봐요. 다 흘리는 거 봐. 그래도 진짜 끈기 있지 않아요? 너무 기특해요.”
선우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문도의 손이 핸드폰을 잡아 내렸다.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엎어 놓은 뒤 선우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는다.
“여기까지 와서 딴 사람이나 보고 있고.”
꺄악, 소리를 지르는 선우를 번쩍 들고 문도가 성큼성큼 걸었다. 물속으로 던질 것처럼 몸을 들어 올리자 선우가 문도의 목을 바짝 안고 하지 말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자꾸 다른 사람 볼 거야 안 볼 거야.”
“규원이잖아요.”
“내 새끼가 나는 아니잖아.”
“안 볼게. 안 볼게요. 그러니까, 아앗!”
안 보겠다고 다급히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풍덩, 물속에 빠진 선우를 따라서 수영장 안으로 들어온 문도가 선우를 안아 들었다. 물이 줄줄 흐르는 선우를 웃으며 바라보다 손으로 물기를 밀어내며 말했다.
“나만 봐. 나만 생각하고.”
웃으며 말을 하는 문도의 눈빛이 짙었다. 산 위로 노을이 지며 오렌지빛 햇살이 수영장 위로 춤을 추었다. 선우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문도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선우는 물속에서 발끝을 들었다. 짙푸른 여름 산 위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 * *
문도는 이것이 꿈인 것을 알았다.
방금 전까지 등에 땀이 끈끈히 배어 나올 정도로 선우를 가졌던 기억이 분명히 있었다. 그만하고 싶다고 울먹이는 걸 달래 가며 하다가 마지막에 맥없이 넘어가는 선우의 등을 쓸어 재웠던 것까지 기억이 난다.
아니었나.
차에서 내리자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억이 흩어지려 했다. 뚜벅뚜벅 걸어 주차장을 나오자 탁 트인 광장이 나왔다. 낙엽도 저물어 가는 저녁 풍경이 눈에 보였다. 커다란 아트센터로 올라가는 길, 플라타너스의 커다란 잎이 바닥에 뒹굴었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여름이었는데.
계단을 오르며 점점 기억이 희미해졌다. 짙푸른 산과 넘실거리는 푸른 물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신혼여행이니까, 라고 말하며 거듭 어떤 여자의 안으로 파고들었던 것도 같고.
야근이 며칠씩 이어지다 보니 피곤해서 잠시 차를 세우고 졸았던가. 졸며 꿈을 꾸었나.
방금 전까지 선명했었던 여자의 얼굴이 흐릿했다. 평창의 별장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은데. 여자를 굉장히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장면은 흐릿하게 뭉개지고 있지만 감정이며 풍경이 현실처럼 생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호텔도 아니고 회장이 아끼는 별장에서 여자랑 뒹굴다니. 그럴 리 없지 않나. 게다가 그렇게 여자에게 흠뻑 빠진 적이 있기나 한가. 그런 자신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일하느라 여자를 만난 지 오래되어 헛꿈을 꾸었나 보다. 문도는 피식 웃으며 회전문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로비에 서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늦을지도 모른다더니 시간에 딱 맞추어 왔네?”
“늦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신호가 잘 터지더라고요.”
문도는 조금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했다. 동명 제약 인수합병을 시작으로 바이오 라인업을 준비 중이라 어지간해선 나오지 않으려 했었다.
국립발레단 후원의 밤. 문도는 연회장 앞에 붙여진 커다란 현수막을 보며 현희에게 말했다.
“언제부터 발레단 후원을 하셨어요?”
“후원이야 매년 하지. 올해부터는 서도 금융에서도 협찬을 해 볼까 싶은데.”
“그런 건 큰집에서나 하는 줄 알았더니.”
문도의 말에 현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영화제니 시상식이니 방송 연예 쪽 행사에는 빠지지 않는 서창도를 떠올린 문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공연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는 얼굴 많이 보이네요.”
씨엔 커뮤니케이션 의장이며 한성 부회장, 센서스 코리아 사장도 보이고 알 만한 배우들도 보였다. 식품 사업에 눈독을 들인 아버지가 한번 만나 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했던 송원 식품 그룹의 셋째 딸도 보였다.
“아버지 아쉬우시겠네.”
문도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를 무감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라면 아버지가 이 자리에 참여해 어머니를 지극히 위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였겠지만, 애석하게도 회장의 갑작스러운 호출이 있었다.
“10분 뒤 공연을 시작하니 자리에 착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드는데 직원이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알렸다.
“길지 않으니 얼굴만 비췄다가 가.”
문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샴페인을 훌쩍 마셨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 아니었다면 얼굴이나 비추는 정도를 위해 이 자리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였지만.
“생신 축하드려요, 어머니.”
문도는 현희를 안쪽으로 에스코트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