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외전 9. 만약에 우리가
문도는 어둠 속에서 어이없어 웃었다.
베개를 가져가?
반쯤 놀리려 한 말이었다. 그만큼 질투가 난다는 뜻으로. 와서 나 좀 달래 주라고.
그런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정말로 떨어져 있으려고 베개를 가지러 왔단 말인가. 그런 선우가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가긴 어딜 간다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문도는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선우가 갈 곳은 뻔했다. 1층 규원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갔겠지.
참나. 한 번 더 헛웃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성큼성큼 걸어 중문을 향해 가는데 왼쪽 시야에 뭔가가 걸렸다.
문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선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서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는 선우를 보는데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마음이 아릿하기도 했다.
진짜 내가 가지가지 한다.
문도는 한숨을 쉬며 피식 웃었다. 뚜벅뚜벅 걸어 소파로 향하니 선우가 베개를 끌어안았다.
“여기서 잘 거야?”
“…….”
“이불 가져다줄까?”
선우가 입술만 맞다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뭐라 말을 하고는 싶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짜 따로 잘 거야?”
문도는 풀썩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우가 안쪽으로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벌어진 거리만큼 문도는 다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등이 팔걸이까지 닿게 된 선우가 베개를 꽉 움켜쥐었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는 선우에게 문도가 말했다.
“베개가 살려 달래. 그만 쥐어뜯으래. 아파 죽겠대.”
피식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선우가 당겨 물었다. 눈을 마주하고서 가볍게 웃었더니 선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웃으려는 것 같더니 웃지 못하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한다. 그러더니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는다.
“울어?”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말도 없고 얼굴도 파묻은 채였다.
“네가 울면 어떡해. 울고 싶은 건 난데.”
문도는 고개를 묻고 있는 선우에게로 손을 뻗었다. 파묻힌 얼굴 옆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선우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 왔다. 으으, 숨죽인 울음소리가 베개 사이로 흘러나왔다.
“규원이가 놀리겠어. 엄마 울보라고.”
“아니……에요.”
베개에 막혀 먹먹해진 목소리로 선우가 말했다.
“아니긴.”
“아니야…….”
“맞잖아. 지난번엔 왜 너만 처음이냐고 억울해서 울고. 오늘은…….”
문도는 잠시 사이를 띄운 뒤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왜 우는 거야? 지금 속상한 사람이 누군데. 다른 남자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지금.”
“그건 당신이…….”
선우가 고개를 들고서 억울한 표정으로 문도를 본다. 눈물 젖은 눈동자가 예뻐 죽겠는 걸 보면 정말 답도 없는 새끼가 맞긴 했다.
“내가?”
“당신이……. 내가……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장난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나를…… 너무 차갑게 보니까……. ”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선우가 말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훅 베개를 가지고 나가?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게 왜 자꾸 물어봐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에. 으흑.”
그 말에 문도는 웃었고, 선우는 울었다.
“그게 그렇게 서러워?”
볼을 감싸 눈물을 닦아 주며 물으니 선우가 젖은 눈을 들었다. 깊은 갈색의 눈동자가 문도의 눈을 바라본다.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선우의 마음이 보이는 곳. 문도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정말이지 닫힌 문 앞에 선 기분이었다. 서늘한 눈빛 한 번에 마음을 이렇게 다칠 수도 있는 건가.
뭐 그런 걸로 마음 상해하냐고, 내가 당신 없이 어떻게 자냐고, 진짜 별거 아니었다고 웃으며 말하려 했는데 그러기 전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차디찬 눈빛 한 번에 순식간에 갈 곳 없는 미아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왜 너한테 나밖에 없어. 나 말고도 한 트럭이던데. 규원이도 있고, 장 여사님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교수님에 동기들에 또 누구야, 아까 낮에 봤던 낯짝 반반한 그 새끼에.”
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낮에 본 그 새끼한테 질투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문도가 그렇게 생각할 때 선우가 훌쩍이며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내 남편이 아니잖아…….”
“그런데 이렇게 쉽게 따로 자려고 했단 말이지? 베개를 가지러 왔다고? 어디 한번 해 봐라, 그거지?”
문도는 선우의 양 볼을 잡고서 얼굴을 쭉 당겼다. 뻐끔거리는 입술에 입을 맞추려 고개를 내리는데 선우가 뭐라 말을 했다.
“그게 아니……. 말이 잘 안 나와서……. 핸…….”
웅얼거리는 입술을 삼키는데 뭔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선우의 눈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본 문도가 선우의 얼굴을 다시 잡아 돌렸다.
“핸드…….”
“나 봐야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 오는 문도의 목을 선우가 안았다. 소파에 선우의 등이 닿고 그 위를 문도가 덮었다.
반짝 빛을 내는 핸드폰 속의 긴 메시지를 문도가 읽게 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 * *
[문도씨, 마음이 상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아까는 말이 안 나와서 그냥 나와 버렸는데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요. 좋아한 것도 아니고 정말 춤이 좋아서. 고백받은 건 사실인데 그 뒤로 따로 만난 적도 없고……. 그러니까 마음 풀고…… 같이 자요. 내가 더 잘]
문도는 핸드폰을 켜고 장문의 문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을 봤는데도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이선우는 진짜 연애 못 해 봤네. 뭘 이렇게 길게 써. 그냥 사랑한다고 하면 될걸.
이 문자를 실수로 보내 놓고 선우가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모른다. 잔뜩 써 놓은 메시지가 입력창 안에 남아 있는 걸 지운답시고 손을 댔던 것 같은데, 잘못 눌렀는지 그에게로 바로 보내 버리고 말았다.
아침을 먹다 슝, 하고 메시지가 들어오는 소리에 핸드폰을 보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선우가 급하게 일어나 잘못 보낸 거니 보지 말라고 했다. 손으로 가리려는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어찌나 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던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진정성이 듬뿍 담긴 선우의 문자를 읽고 있자니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송정태가 의아한 눈으로 문도를 보았다.
“커피 다 마셨으면 이동하죠.”
문도는 쓱 메시지를 내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다. 대전 연구소에 들러 임원 간담회에 참석을 했다가 올라가는 길이었다. 노곤하다는 송정태의 말에 잠깐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잔을 하던 참이었다.
“으. 이대로 가면 5시에나 도착하겠네요.”
송정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며 말했다. 문도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이 4시. 회사에 도착하면 5시.
“어제 야근도 오래 했는데, 오늘은 이대로 퇴근할까요?”재킷을 들며 말을 하자 송정태의 눈썹이 크게 들렸다.
“진짜요? 농담 아니시고요?”
“진담입니다. 가다 들를 곳도 있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호두과자를 집으며 말하자 송정태가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집으로 바로 가시게요?”
“아뇨. 학교에 좀 들를까 해요.”
학교? 무슨 학교? 속으로 궁금해하는 정태를 두고 문도는 차를 향해 성큼 걷다가 다시 웃었다.
정말로 화가 났을까, 걱정하며 베개를 안고서 소파에 앉아 고민하며 메시지를 썼을 선우를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평일 오후라 사람이 적어 조금 더 한적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예술의전당의 풍경은 주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를 세운 문도는 선우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 천천히 걸었다. 녹색의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따뜻한 햇빛에 눈이 부신 오후였다.
커피를 마셨던 레스토랑까지 온 문도는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야외석에 앉아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이 길을 매일같이 오갔을 이선우를 상상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을 거고, 커피를 마시며 쉬기도 했을 거였다. 토슈즈와 레오타드를 가방에 넣고서 긴 머리를 찰랑이며 걸었을 거였다.
상상 속의 이선우와 닮은 여자가 길의 끝에 어른거렸다.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건물을 나온 여자는 같이 나온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여자가 뒤를 돌아 이쪽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타닥타닥 걸음을 빨리했다.
문도는 5월의 햇살을 가르며 걷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초록이 무성한 푸른 정원을 뒤로하며 그를 향해 걸어오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몇 걸음을 걸었다.
“어떻게 왔어요?”
그의 앞에서 멈춰 선 선우가 물었다.
“걸어서.”
웃음을 터트린 선우의 눈동자가 물방울처럼 반짝였다.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다시 회사에 가 봐야 해요?”
“아니.”
선우와 함께 자리에 앉은 문도는 의자에 두었던 호두과자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뇌물.”
“뇌물이요?”
“응. 이거 줄 테니까 말 좀 해 줘.”
“뭘요?”
“내가 더 잘, 그다음에 뭐라고 쓰려고 했어?”
커피를 마시던 선우가 콜록, 사레에 걸려 기침을 했다. 티슈로 입을 닦고 밉지 않게 문도를 흘겨보고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호두과자도 꺼내서 문도 앞에 하나를 먼저 놓아주는 모습을 보았다.
“선우야.”
느리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문도는 선우를 불렀다. 호두과자를 먹느라 볼이 볼록해진 선우가 눈을 들어 문도를 보았다.
“만약에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으면. 부모님도 살아 계시고, 민우도 살아 있고, 너는 계속 춤을 추면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면.”
원래의 이선우였다면 나를 사랑했을까. 초록의 싱그러운 배경 속에서 환하게 웃는 너였다면. 불행을 몰랐던 너였다면. 그래도 내가 너의 전부였을까.
“그래도 너는 나를 좋아했을까?”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선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을 한다.
“음……. 피해 다녔을 거 같아요. 너무 세고 어려워서.”
아, 그래? 낭만이 확 깨지려는 찰나 선우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문도의 손을 잡았다. 같은 모양의 반지를 낀 손이 하나로 포개어졌다. 선우가 부드럽게 웃더니 문도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래도 좋아했을 거예요.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요.”
마지막 말은 좀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문도가 피식 웃는데 선우가 물었다.
“당신은요?”
“뭘 물어. 한눈에 반했겠지.”
선우가 웃었다. 언제나 문도의 시선을 빼앗는 아름다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