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외전 8. 있었네
간만에 마시는 맥주였다. 문도는 창가의 윈도우 시트에 앉아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캔을 들었다.
밤의 봄바람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밤이 되어서야 2층으로 씻으러 올라온 선우를 기다리는 중이다. 한 캔을 거의 다 마셔 갈 때쯤 안쪽 욕실의 문이 열리고 편안한 옷을 입은 선우가 말간 얼굴로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던 선우는 깜빡했다는 듯 화장대 앞에 서서 로션을 발랐다. 문도는 남은 맥주를 마시고 일어서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러게요. 별거 안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돼 버렸어요.”
아기가 쓰는 순한 로션을 손에도 바르며 선우가 답했다.
“별거 안 하긴.”
문도는 선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바쁜 주중에는 시간을 많이 낼 수 없는 선우는 주말만이라도 가능한 많은 시간을 아이와 보내려 하는 편이었다.
낮잠을 재우고 이유식을 만들고, 만든 이유식을 먹이고 목욕도 시켰다. 구석구석 로션을 발라 주며 마사지도 해 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다.
그뿐일까. 한 번씩 너무 예쁘다는 듯 꼭 안고서 볼을 비비고 낱말 카드를 넘겨 가며 사물의 이름을 알려 주기도 했다. 필받은 규원이 끝없이 가져오는 그림책을 매번 새것처럼 읽어 주기도 했다.
“다른 엄마들은 매일 하는 일인걸요.”
머리끈을 들어 대충 말린 머리를 묶으며 선우가 말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선우는 아이를 재우는 밤이면 머리카락이 아이를 찌르지 않게 하나로 묶고, 부드러운 면 티를 입었다. 순한 로션을 바르고 아이가 잡아 뜯을 수 있는 귀걸이와 목걸이는 모두 빼냈다.
문도가 익히 아는 이선우가 맞는데. 대체 기분이 왜 이런 건지. 정말 그 새파란 애새끼한테 질투라도 하는 건가.
장난 반 심술 반으로 문도는 선우의 머리에 묶인 끈을 손가락으로 끌어 내렸다. 스르륵 흩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찔러 넣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선우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 냄새와 비슷한 로션 향을 맡으며 입술을 찾아 물었다.
“아…….”
순식간에 혀를 빼앗긴 선우는 파르르 눈을 감았다. 진득하게 얽었다가 점막을 싹싹 훑어가는 움직임이 야릇했다. 깊게 들어온 혀에서 어느 여름밤을 연상하게 하는 쌉싸름한 맥주맛이 났다.
“잠깐…….”
선우가 고개를 비틀었지만 이내 문도가 따라붙었다. 다시금 삼켜지는 입술 사이로 선우는 간신히 말을 했다.
“규원이…….”
“규원이 뭐.”
짓궂은 웃음을 웃으며 문도는 선우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재워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선우가 문도의 티셔츠를 움켜쥐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발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문도가 천천히 놓아주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선우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규원이……. 재우러 가야 해요.”
“나는.”
문도는 선우의 입술을 다시 물려고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나는 언제 재워 주는데?”
“비켜 봐요.”
선우가 문도의 입술을 피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비트는 선우를 쫓아가 기어이 한 번 더 입맞춤을 했다. 밉지 않게 쏘아보는 선우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 주며 말했다.
“같이 내려가.”
“방해만 할 거면서.”
“그러니까.”
빙그레 웃는 문도를 보며 선우가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웃으며 문도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진짜 방해하지 말아요.”
“노력할게.”
문도는 대답하며 선우의 목덜미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오늘따라 선우의 살내음을 오래도록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규원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팔을 베고 모로 누운 선우가 규원의 배를 가만가만 다독이는 모습을 보다가 문도는 입을 열었다.
“선우야.”
아이를 바라보던 선우가 눈을 들었다. 매일 그의 삶을 채우고 있는 이선우의 얼굴 위로 다른 모습이 겹쳐졌다.
초록의 잎과 춤을 추듯 솟아오르던 물방울. 살랑이는 바람이 가득했던 그 순간의 이선우가 보인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서 후배에게 반갑게 미소를 지었던 이선우가.
왜 기분이 이상했는지 알 것 같다. 그 장면에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의 그늘이 드리우기 전, 삶이 비틀리기 이전의 이선우를 훔쳐본 기분이라서.
그가 없는데도 5월의 햇살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처럼 웃고 있는 선우가 낯설었다. 어쩌면 그게 선우의 진짜 모습이었을 텐데도.
서문도 없이도, 이선우는 부족함 없이 행복했을 것 같다. 어디서든 밝게 웃고 반짝이면서. 그게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그를 만나기 전의 선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이력서와 보고서에 쓰여 있던 몇 줄의 기록이 전부였다.
“대학 생활은 어땠어?”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을 했는지 선우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음, 하고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했어요. 연습하고 공연하고. 시험도 보고요.”
그가 몰랐던 선우의 지난 세월을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대화였는데, 정작 튀어나오는 질문은 이런 거였다.
“연애는? 정말 아무도 안 사귀었어?”
그렇지. 내가 궁금한 게 이따위지. 선우에게 자신이 처음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그 시절의 이선우는 어떤 사람을 좋아했을지.
풋풋한 마음으로 좋아한 사람도 없었는지. 정말 데이트 한번 못 해 봤는지. 선우가 이제 알겠다는 듯 살짝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럴 시간이 없었던 거 같아요. 주변이 거의 다 여자들이었기도 하고.”
“너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그 말에 선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없을 리 없지. 묘하게 구겨지는 문도의 얼굴을 본 선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몇 사람 있긴 했는데 춤추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아직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어요.”
이선우가 거절이라니.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친구로 지내요, 선후배로 지내요, 이러면서 애매하게 웃기나 했겠지.
“몇 명이나 있었는데?”
“별로……. 그냥…… 한두 명…….”
한두 명이 아니란 것에 손목을 걸 수 있었다. 그거야 뭐 그렇다 치고. 문도는 괜히 자고 있는 규원의 배를 토닥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네가 좋아했던 사람은? 그런 사람도 없었어?”
순간 선우의 눈동자가 문도를 향했다. 그러더니 반 박자 늦게 대답을 했다.
“없었……어요.”
있었네. 속이 훅 베이는 느낌이었지만 문도는 웃었다.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도.”
이 말을 후회하게 될 줄 모르고, 문도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스물일곱 살이 되도록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 당연히 있었겠지. 그래 봤자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없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그냥…… 좋아했다기보다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라서.”
음. 고개를 끄덕였지만 옷자락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없으면 없는 거지. 없는 거랑 마찬가지라니. 게다가 멋있다고 생각을 했다고? 어떤 놈인데?
“선배?”
“아……. 선배……님이 맞긴 한데. 전공이 달라서……. 원래 현대무용이 강렬해서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게 있거든요. 몸을 쓰는 게 다르기도 하고, 표현력도 다르고. 춤이 너무 멋있다고……. 그냥 그 정도 생각만.”
이선우는 진짜 연애 한번 안 해 본 게 틀림없었다. 문도는 속 쓰린 마음으로 이를 꾹 다물었다. 여기서 내공의 차이가 난다. 곧 죽어도 과거는 없다고 그렇게 말을 해 줬거늘. 주섬주섬 멋있다느니, 시선이 갔다느니.
“그래서 밥 한번 못 먹고, 데이트 한번 못 하고 멀리서 보기만 했어?”
그 정도 마음이야 그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말하는데, 아, 선우의 눈이 다시 한번 짧게 흔들렸다. 뭐야. 뭐가 있었어?
“밥을 한 번 먹기는 했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어떻게 했는데?”
선우가 머뭇거렸다. 문도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어쩌다 밥까지 먹게 됐는지 궁금해서 그래.”
“합동공연 문제로 연락이 와서.”
“다 같이 밥 먹었어?”
“아뇨. 그냥 둘이…….”
“아아. 그 새끼가 연락을 했구나아.”
문도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서, 밥만 먹었어?”
“어…… 그게…….”
선우는 살짝 망설였다. 식사하며 공연 이야기나 하자고 해서 나갔는데,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만나 보고 싶다고.
“밥만 먹은 게 아니네? 그 선배가 고백이라도 했어?”
문도의 목소리가 매끄러웠다. 선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귄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는 건 좀 웃긴 것 같아서였다.
“고백까지는 아니고 관심 있다고. 만나 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부담스럽기도 하고……. 무대에서 멋있는 분이라 동경했던 거지, 그런 식으로 만나 보고 싶지는 않아서 거절했어요.”
“아하.”
문도는 웃으며 선우를 보았다. 내가 괜찮다, 괜찮다 하는 게 진짜 괜찮은 게 아닌데. 그걸 모르네?
“그래 놓고 나한테 너는 왜 처음이 아니냐고 울고불고했네?”
문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규원을 두어 번 다독인 뒤,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 떨어져 있을까, 우리?”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선우가 멍하니 문도를 보았다. 문도는 후,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선우를 향해 웃어 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선우의 표정이 볼 만했다.
* * *
선우는 마스터룸 앞에서 서성였다. 딱 닫힌 문 앞에서 손을 들어 노크를 하려다가 그대로 손을 내리기를 몇 번.
냉기 풀풀 어린 미소를 짓고 쌩하니 나가 버린 남편은 뭘 하고 있는지 안에서 기척도 없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막상 문 앞에 서니 정말 화가 난 건가 싶어 괜히 긴장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흘렀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웃으며 살금살금 물어보는 바람에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정말 별게 아니어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어서 대답을 한 거였다. 사귄 것도 아니고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관심 있다는 말을 들은 정도인데 그걸 굳이 감추는 것도 불편해서.
당분간 떨어져 있자는 말이 진짜일까?
농담이 아니면 어떡하나. 가슴이 답답해 후우, 한숨을 깊이 내쉰 선우는 애꿎은 문만 힐끔거렸다.
괜히 대답을 했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반짝 떴다. 뭐야. 괜찮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그런 건 본인이면서.
빙그레 웃었던 문도의 냉한 얼굴이 마음을 콕콕 쑤셨다. 그러게 왜 규원이 재운다는데 따라와서는 이상한 질문이나 하고.
문도의 탓을 하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들어가서 왜 그러냐고, 진짜 아무 사이 아니었다고 말을 하려고 올라왔는데, 막상 닫힌 문 앞에 선 기분이 오묘했다. 막막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자기는 더한 연애도 많이 했을 거면서.
진짜 괜히 얘기했어. 후. 길게 한숨을 내쉰 선우는 손을 올렸다.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망설이다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돌리는데 긴장이 돼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불이 전부 꺼져 있는 방에 한 줄기 빛이 들었다. 불빛을 등진 선우는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는 문도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머뭇거리며 입을 여는데 문도가 무표정하게 눈을 들었다. 서늘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훅 패는 기분이 들어 선우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베개 가지러 왔어요.”
구겨지는 문도의 얼굴을 외면하며 선우는 베개를 움켜쥐었다. 이게 아닌데.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으로 정말 베개만 가지고 방을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