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외전 7. 이상한 기분
완벽했던 오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느릿하게 즐겼던 아침의 정사가 그랬고, 이어진 샤워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침에 헤어져 밤에 만났던 주중에는 없었던 여유였다.
점심이 다 되어서야 외출 준비를 했다. 문도는 등이 벌어진 원피스의 지퍼를 올려 주며 선우의 목덜미에 입맞춤을 했고, 선우가 셔츠의 단추를 잠가 줄 때도 수시로 입을 맞추었다.
날씨는 또 얼마나 좋은지. 온통 초록인 거리에 꽃이 아름답게 피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열린 차창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고, 나뭇잎을 통과한 햇살이 길 위에서 반짝였다.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선우가 고른 레스토랑은 예술의전당 안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오가며 학교 사람들과 음식을 먹을 때마다 문도의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 같이 와서 먹으면 좋겠다고.
“아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아니라고 답했다. 어디 가서 뭘 먹었는지 기억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설혹 들렀다 해도 아니라고 해 주는 게 맞을 거 같아서.
“지금 가면 제일 좋아요. 음악 분수도 볼 수 있고, 야외 테라스에 꽃도 많이 피어서 앉아만 있어도 좋거든요.”
주차를 하고 올라가는 길도 좋았다. 다녔던 학교부터 국립발레단까지. 선우에게 익숙한 공간이라 그런지 걸음이 편안해 보였다. 문도에게 이곳저곳을 소개하며 살짝 긴장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야외석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와 브런치를 시켰다. 공연을 보러 나온 사람들, 가족끼리 산책을 하는 사람들, 분수 옆에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보며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규원이도 데려오면 좋아할 텐데. 다음엔 같이 와요.”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는 한 가족을 보며 선우가 말했다. 그렇게 해도 좋긴 하겠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먹겠지만.
“서규원 생각 그만하고 먹어.”
문도는 감자튀김을 선우의 입에 밀어 주었다. 바람이 불어서 선우의 머리카락이 살랑이는 것도 좋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밖을 보는 선우를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돌이켜보면 다시 만난 후로 둘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임신을 한 선우여서 늘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야 했고, 혼인신고를 한 뒤에도 신혼여행을 따로 가지 않았다. 호텔에서 짧게 주말을 지냈을 뿐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말할 것도 없고.
선우의 종강에 맞춰 휴가를 써 볼까. 규원을 두고 둘이서만 일주일 정도 늦은 신혼여행을 가는 건 어떨지. 그 생각을 하며 분수대의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바라볼 때였다.
“어, 누나!”
분수 근처를 지나던 훤칠한 남자가 손을 흔들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보는데 선우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년 같은 얼굴과 그에 반대되는 꽉 짜인 골격. 5월의 나무처럼 싱싱해 보이는 청년이 활짝 웃으며 선우를 향해 달려온다. 문도는 멀리서부터 뛰어오고 있는 남자를 미동도 없이 바라보았다.
“현웅이라고, 같이 학부 수업 듣는 동생이에요. 잠깐 인사만 하고 올게요.”
선우가 간단히 설명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 나가는 발걸음에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완벽했던 일요일 오전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이 기분은 뭘까.
문도는 5월의 햇살 아래에서 인사를 나누는 남녀를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신록의 정원, 춤추는 분수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선우와 앳된 얼굴의 미청년.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묘하게 어딘가 닮았다. 길고 곧은 목 같은 것이. 손짓을 하는 팔의 움직임 같은 것이. 반짝이는 배경과 어우러진 두 사람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을 한다.
그때 선우가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남자에게 이야기를 하니 남자가 꾸벅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도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남자는 이내 선우를 향해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인사를 하며 뒤를 돌았다. 선우도 손을 흔들며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그가 있는 자리를 향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돌아선 선우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남아 있었고, 그 미소는 선우가 다시 자리에 앉을 때까지 여전히 입가에 남아 있었다.
“연습하러 왔대요. 실기시험이 코앞이라 다들 연습 중인가 봐요.”
“많이 친한가 봐?”
문도는 남자의 백팩에 달린 요란한 장식품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론수업 같이 듣는데 성격이 좋아요. 조교 누나라고 챙겨 주기도 하고, 대선배님이라고 놀리기도 하고요.”
순순히 대답을 하는 선우의 얼굴은 맑기만 했다. 꼬아서 볼 관계가 아니라는 건 문도도 알았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싶은 새파란 어린애였고, 선우 역시 학교 후배나 한참 어린 동생을 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학교 생활 재밌겠네.”
문도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선우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학기 초보다는 많이 편해졌어요. 도움도 많이 받고요.”
멀지 않은 곳에 강의동이 보였다. 건너편에는 오페라하우스도 보였다. 선우의 세상이다.
그에게 회사 생활이 있듯이 선우에게도 학교 생활이 있다. 그에게 팀원들이 있듯이 선우에게도 동기들과 선후배가 있을 거고, 그가 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선우 역시 학교에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낼 거였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는데도, 뭔가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기분이다. 이선우가 다른 남자에게 선선히 웃어 주었다. 반가워 눈을 반짝였고, 잘 가라 손을 흔들며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남자여서 그런 건가.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 질투 나니까.”
농담인 줄 알았는지 선우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문도도 별 의미 없는 말이었다는 듯 피식 웃어 주었다.
“이만 일어날까?”
별것도 아닌 일에 속이 뒤집히는 옹졸한 새끼가 되어선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도는 선우의 손을 잡았다. 선우가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음엔 규원이랑 같이 와요. 분수 보여 주면 좋아할 거 같아.”
“봐서.”
심드렁하게 대답해도 선우는 같이 와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로 그를 보며 웃었다.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애정과 신뢰가 슬쩍 비틀리려던 기분을 달래 주었다.
이거면 됐지. 뭘 더 바라나.
자리를 나서는 문도의 눈에 강의동이 보였다.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건물이 왜인지 눈에 밟혔다.
* * *
집으로 돌아오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별채에서 껄껄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청이 좋아 크게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아버지였다. 문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님 오셨나 봐요.”
선우가 서둘러 복도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난감이 가득한 거실 매트에 서중호가 앉아 있었다. 실내복을 입고서 소파를 짚고 있는 규원의 모습도 보였다.
음마— 규원이 반가워 활짝 웃으며 선우를 향해 달려왔다. 규원을 안으며 아버님 오셨어요, 예의 차려 인사를 하는 선우의 뒷모습을 보며 후회를 했다.
바로 호텔로 가서 물고 빨았어야 하는데.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선우가 한번 웃어 줬다고 바로 호텔로 직행해서 애정을 확인하는 옹졸한 놈은 되고 싶지 않아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시터 아주머니는 8시나 되어야 올 테고, 그전까지는 장 여사도, 규원도 본관에 있어 집이 비어 있을 거라는 계산이 되어 집으로 온 건데, 후회가 된다.
“어, 그래. 지나다 우리 규원이 생각에 잠깐 들렀는데. 괜찮지?”
“네. 편하게 오세요.”
당연히 괜찮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선우에게 물어보며 중호가 쓱 문도를 돌아보았다. 문도는 까딱 고개를 숙인 뒤 뒤를 돌아 다과를 준비하고 있는 장 여사를 보았다. 장 여사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애가 아주 똑똑해. 아까는 글쎄 나한테 바나나를 주지 뭐냐. 규원이가 이 할애비 먹어 보라고 입에 넣어 주고 그랬지? 박수도 쳐 주고, 반짝반짝도 하고. 허허허.”
선우에게 찰싹 달라붙은 규원이 응, 응, 대답을 했다. 딸랑이를 흔들며 규원과 놀아 주려는 서중호를 빤히 바라보자 고개를 슬쩍 돌린다. 하여간 너구리 같은 영감이라 생각하며 문도는 물컵을 꺼냈다.
“왜 왔대요?”
“규원이 보고 싶어 오셨대요. 선물을 한 보따리 사 오셨더라구.”
핑계는. 지난 규원이 백일에 어머니가 손자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좋다고 슬쩍 줄을 푼 뒤로 한 번씩 나타나 앉아 있다 가곤 했다.
“어머니는요?”
“아까 잠깐 같이 있다가 본관 건너가셨죠.”
고개를 끄덕인 문도는 찬물을 받아 한 컵 마셨다. 그사이 장 여사가 쿠키며 과일을 담은 쟁반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빠아. 으, 빠.”
선우의 목에 들러붙은 규원이 문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도 잘하네, 중호가 장단을 맞추며 박수를 쳤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규원을 선우가 웃으며 보았다.
과일을 내려놓는 장 여사와도 뭐라 이야기를 나누며 규원의 등을 토닥이는 선우를 보는데 아까의 그 기분이 다시 들었다.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바닥에 실금이 가는 것 같은 느낌. 문도는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지는 그 느낌을 내리누르며 서중호에게 말했다.
“조만간 어머니랑 셋이 식사 같이하시죠.”
복귀 문제를 의논하고 싶어 찾아오는 걸 서로가 다 알고 있다. 누가 먼저 꺼내느냐가 문제였을 뿐. 손주 핑계 대며 뻔질나게 드나들기 전에 대충 갈무리를 해 둘 생각이다.
“그럴까?”
입꼬리 올라가게 웃은 서중호는 몇 분 더 앉아 규원의 재롱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며느님, 다음에 또 만나요. 우리 강아지도 또 보고.”
“네. 아버님. 살펴 가세요.”
선우가 서중호를 배웅했다. 안고 있는 규원에게 할아버지 빠빠이, 라고 말을 하자 규원이 손을 들어 옆으로 흔들었다.
돌아선 선우가 엄마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규원을 보며 다정하게 웃는데,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굳이 말하자면 웃고 있는 이선우가 낯선 느낌? 지금 보고 있는 선우가 정말 이선우인가 하는 그런…….
이 기분은 뭘까.
문도는 물끄러미 선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