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외전 6. 제일 앞선 것
음마. 으음마.
열려 있는 방문 너머로 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침대를 내려온 문도는 넓었던 드레스룸을 반으로 줄여서 만든 아이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열려 있는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니 단을 낮추어 놓은 아기 침대의 안전 가드를 붙잡고 서 있는 규원이 보였다. 문도는 새벽같이 일어난 자신의 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빠, 으빠. 어!”
문도를 본 규원이 한 손을 들고 주먹을 쥐었다 펴며 문도를 불렀다. 평소 1층의 아기방에서 재우는 규원이었지만, 시터 아주머니가 쉬는 토요일 밤에는 2층에서 재웠다.
“잘 잤어?”
연신 팔을 뻗으며 안으라 말하는 규원을 웃으며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자 이번엔 가드를 흔들어 댄다. 나가고 싶다 이거지.
“이어, 어, 이.”
“말을 해. 말을.”
“음마. 으음, 마.”
나를 꺼내라. 엄마에게 데려다 달라. 문도는 의사 표현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자신의 아들을 번쩍 안았다. 나가는 줄 알았던지 규원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음마, 어이, 어.”
규원이 정확하게 마스터룸을 가리켰다. 넘어지거나 다쳐도 어지간한 일로는 울지 않는 규원은 선우에게만은 어리광도 많고 웃음도 많았다. 그런 것까지 닮을 수 있는 건가 신기할 정도였다.
“안 돼. 엄마 더 자야 해.”
대학원 수업에 조교 업무로 바쁜 선우는 토요일인 어제도 교수를 따라 부산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입학 전만 해도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규원을 안고 1층으로 내려온 문도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마, 빠아, 규원이 소리를 내어 말하며 냉장고 안쪽을 가리켰다.
“밥.”
“무우.”
“물.”
“이유.”
“우유.”
짧은 가르침을 마친 뒤 규원을 바닥에 내려놓고 우유를 꺼내 컵에 따랐다. 끙차 일어선 규원이 까치발로 서서 조리대 위를 올려다보려 했다. 전자레인지에 컵을 넣고 우유를 미지근하게 데우는데 딸랑, 주방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도보다 먼저 고개를 돌린 규원이 아직은 어딘가 기우뚱한 걸음으로 뒷문으로 향했다. 넘어질 듯 말듯 빠르게 달려가다 한 번 철푸덕 넘어진 규원이 흠칫 뒤를 돌아 문도를 보았다.
“일어나. 안 죽어.”
규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났다. 아빠는 달래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인지 울지도 않는다. 다시 뒤뚱거리는 빠른 걸음을 걸어 뒷문으로 향한다.
“아구, 우리 도련님. 벌써 일어났쪄용? 일찍 깼쪄용? 아구, 우리 도련님이 벌써 일어났구나아.”
혀가 반으로 짧아진 장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웃은 문도는 빨대컵에 미지근한 우유를 담았다. 다이닝룸 쪽으로 나가니 장 여사가 규원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아구, 우리 도련님 잘도 걷네.”
“여사님 혀는 언제 다시 길어질까.”
“글쎄요. 우리 도련님 다 크면 그때나 길어질까요? 그럴까요? 아구, 잘하네.”
규원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는데, 장 여사는 상당히 뻔뻔한 면모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혀 짧은 소리를 내었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정상인처럼 말을 했다.
장 여사의 말에 따르면 아이 키우는 집에선 다들 그런단다. 아직 돌도 안 된 애를 어른 대하듯 하는 문도가 이상한 거라 했지만, 모두의 혀가 짧아진 이 집에서 한 명쯤은 제대로 말을 하는 어른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문도는 규원을 안아 유아용 식탁 의자에 앉힌 뒤 빨대컵을 내려놓았다. 이유, 하고 말을 하자 장 여사가 박수를 친다. 규원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빨대컵을 들었다. 그러더니 으으, 말을 하며 장 여사에게 먼저 내밀었다.
“할미 먼저 먹으라고요? 아구, 고마워라. 맛있게 먹을게요. 냠냠. 냠냠.”
장 여사가 우유를 마시는 시늉을 한다. 규원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뭐만 하면 옆에서 잘한다고 박수를 쳐 대니, 애도 배운 모양이다. 이건 뭐 밥만 잘 먹고 똥만 잘 싸도 칭찬에 칭찬을 받으니 살맛이 안 날 수가.
우유 마시는 흉내를 마친 장 여사가 빨대컵을 규원에게 돌려주며 문도에게 말했다.
“아직 이른데 규원이 두고 올라가서 더 누우세요. 피곤하실 텐데.”“잠이야 뭐. 죽어서 자면 되는 건데요.”
“아니. 전무님 말고 사모님.”
장 여사가 사모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선우뿐이다. 선우는 질색을 하며 그러지 말라 했지만, 직업 정신이 철저한 장 여사가 들어줄 리 없었다.
“사모님 더 자게 옆에 가서 누워요. 전무님 없으면 깨잖아. 피곤할 텐데 더 자야죠. 공부하랴 애 보랴 얼마나 힘들겠어요.”
이렇게 서열이 밀리나. 문도가 눈썹을 들어 장 여사를 보았지만 장 여사는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이니까 푹 쉬세요. 우리 도련님은 할머니랑 놀면 되지요. 그렇지요?”
모처럼 쉬는 주말. 문도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침이 밝아 오는 정원에는 싱그러운 초록이 가득이었다. 봄이 한창인데 문도는 회사 일로, 선우는 학교 일로 바빠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한 적이 없었다.
“그럼 사양 않고 올라가요.”
“아침은 차려 놓을 테니 편할 때 드세요. 규원이 데리고 본관으로 건너가 있을 테니까. 부회장님도 규원이 보고 싶어 하시고.”
“그럼 아침 차리지 마세요. 선우 좀 더 재웠다가 나가서 데이트나 하게.”
“그르시든가.”
쿨하게 대답을 한 장 여사가 우유를 먹고 있는 규원의 한쪽 손을 붙잡고 쎄쎄쎄를 하듯 흔들어 대며 말했다.
“이 할미는 우리 도련님 맘마를 만들어야지요? 오늘은 무슨 맘마를 해 줄까. 소고기 근대죽을 먹을까요, 닭고기 야채죽을 먹을까요?”
규원이 눈을 접어 가며 몇 개 나지도 않은 이를 보이며 웃는다. 장 여사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저렇게 좋을까.
문도는 사이좋은 두 사람을 두고 뒤를 돌았다. 방해꾼은 사라졌으니 이제는 아내를 독차지할 시간이었다.
* * *
2층으로 올라온 문도는 태블릿 패드를 집어 들고 침대에 기대앉았다. 선우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송 팀장이 보내온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한참 자료를 체크하다가 문득 눈을 들었다. 옆자리에는 선우가 고요히 잠이 들어 있고, 창문을 가려 놓은 블라인드 틈새로 5월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행복을 그려 놓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선우가 있는 풍경.
그걸 원했던 것 같다. 시선이 닿는 곳에 늘 선우가 있기를. 삶의 구석구석마다 이선우가 존재하기를.
가끔 선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서유라가 최지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이민우가 죽지 않았더라면.
선우가 다치지 않고 춤을 계속 추었더라면. 부모님이 살아 계셔서 힘겨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그래서 그 어느 접점도 생기지 않아 만나지 않은 채로 평행선을 그리며 살았더라면.
무서운 것 없이 살았을 거란 생각을 한다. 잃을까 봐 두려운 것도 없고, 간절히 가지고 싶은 것도 없으니 세상이 우스워 앞만 보며 성큼성큼 걸었겠지. 그런 삶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불만 없이 살았을 거였다.
다만.
햇빛이 부드럽게 비추는 5월의 아침 풍경에 행복하다고 생각할 일이 없었을 테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서규원도 없었을 테지.
문도는 고이 잠든 선우를 바라보다가 언젠가 북악산의 녹음을 배경으로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살면서 가장 최우선인 것.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제일 앞선 것.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렵지 않게 대답을 했었다.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틀린 답은 아니었다. 스스로 존재해야만 나머지가 있을 테니. 그때까지는 분명 그랬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내가 욕망하는 것. 그것들이 삶의 방향을 결정했고, 그 결정들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잠이 든 선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도는 손을 들어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머리카락을 예쁜 귀에 꽂아 주고 귓바퀴의 연한 살을 만지작거렸다.
그 동작에 선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부드러운 갈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문도는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할까, 생각을 한다.
“규원이는요?”
눈을 뜨자마자 아이부터 찾는 이선우지만.
“여사님이 데려갔어.”
“깨우지 그랬어요.”
선우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문도는 태블릿을 협탁에 내려놓고 침대에 팔을 괴고 누웠다.
“너 푹 재우래. 공부도 하고 애도 보고 힘들다고.”
그 말에 선우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여사님은 가끔…… 너무 과하게 저를 생각해 주세요.”
가끔이 아니라 자주 과했다. 그래도 그게 좋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이 안 계신 선우에게는 그런 유난이 필요할 테니.
“내 생각도 좀 해 달라고 해. 도련님 자리에서 밀려나서 서럽다고.”
선우가 웃었다. 이선우의 눈이 반달이 되는 순간을 사랑했다. 선우가 웃으면 환한 빛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면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다.
싱거운 말에도 잘 웃는 이선우는 알까. 다시 그 질문을 받으면 내 대답은 네가 될 거라는 걸.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나는 네가 제일 중요하다고 답을 할 거라는 걸.
“꼭 전할게요.”
웃으며 말을 하는 선우를 당겨 코를 깨물었다. 고개를 비틀며 선우가 웃는다. 문도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나는 선우를 품에 가두었다.
“나가서 브런치도 먹고 드라이브도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데요? 눈으로 물어 오는 선우를 보며 문도는 웃었다. 아무래도 외출은 조금 늦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내려 입술을 포갰다. 달콤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