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외전 4. 98일(3)
선우는 눈가에 고여 드는 눈물을 손으로 밀어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는데. 얄팍한 바닥 같은 거 보여 주기 싫었는데.
“내가…… 시간을 달라고 했잖아요. 내버려 두면 알아서…… 마음 다스리고, 그러고서…….”
자꾸만 목소리가 떨려 왔다. 담담히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문도가 과거에 다른 여자에게도 웃어 줬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생으로 뜯기는 것 같았다.
선우는 할 말을 잃은 듯 굳어 버린 문도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래전 일들이 뒤죽박죽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키스를 더럽게 못 한다고 했던 것. 당황스러워하는 자신을 웃긴다는 듯 바라보며 행위를 능숙하게 이끌었던 것.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에 억울한 눈물이 흘렀다.
“당신은 왜 다른 사람이 있었어요? 나는 없는데. 나는 다 당신이 처음이었는데, 왜 당신은 아니에요?”
이 말을 소리 내어 하고 있는 자신이 기막혔지만 차오른 말들이 삼켜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어려지고 유치해지는지. 왜 이런 마음은 조절도 되지 않는 건지. 왜 눈앞의 남자가 하염없이 미운 건지.
“나도 많이 해 볼걸 그랬어.”
결국 선우는 두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서러운 마음이 감춰지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은 선우에게 다가간 문도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복잡미묘한 감정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당황스러운데 좋았다. 미안한데 기뻤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웠다. 이선우가 질투를 하다니. 그것도 헛소리만 가득한 기사 몇 줄에, 속이 상해서 만지는 것도 싫다고 하다니. 명치가 저릿저릿했다.
평소의 선우는 먼저 애정 표현을 하는 일이 없었다. 아이를 낳은 후, 그때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소리 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이제야 가끔 한 번씩 다가와 가만히 안겨 오는 정도였다.
그런 이선우가 질투를 하다니. 꿈인가.
문도는 무릎을 굽혔다. 선우의 의자를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한 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걷어 냈다.
선우가 고개를 저으며 문도를 밀어냈다. 문도는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아 단호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선우를 마주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가슴 저리게 예뻐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지금 웃었어요?”
선우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더니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서 문도에게 화를 냈다.
“어떻게 웃을 수가 있어요? 나는 이렇게 속이 상한데 당신은 이게 웃겨요?”“안 웃었어.”
“웃었잖아. 어엉.”
선우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그냥 네가 너무 예쁘니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문도를 노려본 선우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눈물이 자꾸 쏟아졌다. 제어장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어른스러운 태도고 뭐고 다 필요 없어진다.
“말해 봐요. 다른 여자들한테도 나한테 하는 것처럼 했어요? 그 여자들한테도 웃어 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그랬어?”
물어보면서도 답 없는 질문이라는 걸 선우도 알았다. 만약 문도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억장이 무너질 것이고, 아니라고 대답하면 믿지 않을 거였다.
그래도 뭔가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어. 선우는 그 생각을 하며 울먹였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사랑한다고……. 흑.”
“맹세하는데, 그 기사에 나온 여자들이랑 아무 일 없었어.”
문도는 선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쥐고 말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에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을 하면 너는 화를 낼까.
“한 명은 대학 동문이고, 한 명은 인사나 했나? 마지막은 아버지가 만나 봤으면 좋겠다고 말만 했던 사람인데 만난 적도 없어.”
선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문도를 보았다. 일단 여기까진 사실이다. 그리고 앞으로 하는 말도 전부, 진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나도 네가 다 처음이야.”
선우가 이번엔 정말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문도를 보았다.
“진짜야. 전부 다 이선우가 처음이야.”
선우의 마음을 달래 줄 수만 있다면 거짓말 따위 어렵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 같은 건 1그램도 없었다. 지금부터는 이게 진실이 될 테니까.
“내가 아무리 뭘 몰라도……. 처음이 아닌 건 알아요.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잘해. 얼마나 많이 해 봤으면 그렇게 능숙하게, 그런 짓을 막.”
뒷말을 잇지 못하는 선우에게 문도는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뭐든 잘해.”
“거짓말. 다른 사람 있었잖아요. 당신이 나한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 만졌다고 생각하면……. 너무 싫어. 정말 너무 싫어요.”
“없었다니까.”
“나 어떡해요. 정말 너무 싫어. 어어어.”
선우가 통곡을 하듯이 몸을 오그리며 울었다. 문도는 그런 선우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이런 이선우는 처음이라, 좋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싫다고 밀어내는 선우를 꼭 안고서 울고 있는 얼굴을 눈에 꼭꼭 담았다. 확인받고 싶어서 굳이 한 번 더 물어보았다.
“그렇게 싫어?”
“너무…… 싫어.”
“뭐가 그렇게 싫어. 나도 다 처음이었다는데.”
“거짓말이잖아……. 어엉.”
“전부 다 네가 처음이야. 못 믿겠으면 여사님한테 물어보던가.”
문도의 말에 선우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걸 왜 장 여사님한테 물어봐요. 어엉…….”
기막혀 우는 선우를 문도는 다시 힘주어 안았다. CCTV를 설치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더라면 오늘을 기록해 두었다가 매일매일 돌려 볼 수 있을 텐데.
“너무 억울해……. 왜 나만 처음이야…….”
그 밤이 선우에게는 처음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어설픈 여자는 굳은 몸으로 끙끙대는데, 그게 전부 다 연기일 거라 냉소하며 선우를 안았다.
처음인 척, 순진한 척을 한다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기도 했었다. 너는 누구에게나 쉬운 여자일 거라고. 이런 식으로 유혹을 해 오는 네가 순진할 리는 없다고. 그러니 한 번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괜찮을 거라고.
얼마간은 허접한 여자한테 넘어간 자신을 향한 경멸도 섞여 있었다. 순진한 척 대놓고 몸으로 유혹을 하는 여자에게 꼴려선 결국은 일을 치른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을 전부 찢어 놓는 사랑이 될 줄도 모르고서.
“나도……. 나도 많이 만나 볼걸 그랬어. 다른 남자랑 당신이랑 했던 짓 먼저 다 해 볼걸. 그랬으면 이런 일로 울고 그러지 않았을 건데……. 으흑.”
이 무슨 심장 떨어지는 소리인가. 생각만으로도 피가 바짝 말랐다.
“그건 안 돼.”
문도는 순간 인상을 쓰며 선우에게 말했다.
“절대 안 돼.”
과거라도 허락할 수 없었다. 이게 허락이 필요한 문제냐고 누군가 따박따박 따지고 든다면 닥치라고 할 테다.
“나도 잘할 수 있었어요. 나도 다른 남자들 많이 만나 봤으면 키스도 잘할 수 있었고, 당신이랑 하는 거 그런 거 다……. 연습 많이 했으면, 나도 하나도 안 떨고.”
“나랑 그렇게 많이 했는데 안 느는 걸 보면, 넌 그냥 소질이 없어. 그러니까 연습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선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문도를 보았다.
“나도 다 네가 처음이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 말고.”문도는 뻔뻔하게 말하며 선우의 눈물을 밀어냈다. 눈을 맞추고 한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밖에 없었어. 그렇게 미친놈처럼 굴었던 것도, 정신 놓고 헤맸던 것도……. 네가 처음이었어. 내 마음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도, 그래도 미치게 좋았던 것도 전부 다 네가 처음이야.”
돌아보면 왜 그랬었나 싶은 일들이 많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건 아닐 것 같다.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똑같이 후회할 일들을 만들겠지. 아프게 하고, 울게 하고, 상처를 줄 거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만큼의,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을 거였다. 뜻대로 제어할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
“나도 많이 서툴렀던 거 알잖아. 연애를 잘했던 놈이면 그렇게 미친 새끼처럼 헤매고 다녔겠어?”
그 말에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친 새끼처럼 굴었던 게 맞긴 한가 보다.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런 감정은 처음이라서, 나도 사랑이 처음이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 알잖아.”
마음이 약한 이선우는 벌써 그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내가 다 처음이에요?”
“응.”
문도는 한 점 부끄럼 없는 얼굴로 뻔뻔히 말했다.
“진짜?”
“진짜.”
믿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 놓고 믿어 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다 네가 처음이야.”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좋으니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는 것.
물기 어린 눈동자가 문도를 본다. 문도는 고개를 기울여 선우의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선우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물맛이 나는 입술이 달았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선우의 속눈썹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문도는 선우의 목덜미를 감싸며 고개를 틀어 입술을 깊게 베어 물었다. 선우가 셔츠를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거듭 입술을 물고서 안쪽 깊은 곳까지 혀를 넣었다. 뿌리째 감고서 빨아들였다. 안쪽을 훑고 다시 깊게 혀를 얽었다. 할딱거리는 숨까지 전부 가져오는데도 갈증이 일었다.
문도는 꽃잎을 으깨어 쥐고 싶었던 충동을 생각했다. 아프도록 움켜쥐고 싶었지. 부드럽고 연한 살을 탐할수록 충동은 거세어졌다. 아프게 깨물고 거칠게 벌려 마음껏 넣고 싶었다.
흐느끼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정신없이 파고들고 싶었다. 붉게 흐드러진 선우를 안고 또 안아 마침내는 더는 못 하겠다고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백일을 견디겠다 했었던가. 내가 미쳤지.
“하아…….”
문도는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폭주를 할 것만 같았다. 천천히 뜨이는 선우의 눈동자를 보는데 이대로 밀어붙이고만 싶었다.
“싫었어?”
나오는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면 됐다. 문도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이틀. 환장할 이틀만 참으면.
눈을 꾹 감고서 깊게 숨을 쉬는데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문도는 번쩍 눈을 떴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선우의 작은 혀가 밀려들었다.
문도는 욕설을 삼키며 선우의 혀를 그대로 빨아들였다. 엉망으로 뒤섞이며 신음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몸을 도는 피가 뜨겁다 못해 끓는 것 같았을 때, 선우가 입술을 살짝 뗐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그를 보더니 그의 목을 꽉 안았다. 작은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파묻은 채로 속삭였다.
“참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냥 하고 싶어.”
선우의 한마디 말에 머리가 펑 하고 터지는 것 같았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대체 무엇을 위한 98일이었나. 문도는 그대로 선우를 안아 들었다.
백일 따위 개나 주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