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외전 3. 98일(2)
“잘 지냈어?”
문도의 질문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는 화장실로 향해 손부터 씻었다. 아기방에 먼저 들러 자고 있는 규원을 들여다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규원이는 오늘도 잘 뒤집었고?”
“네.”
소파 옆자리에 앉는 문도에게 대답을 하고서 선우는 괜히 다른 이야기를 덧붙였다.
“백설기를 많이 주문했어요. 직원분들이랑 나눠서 먹으려고요. 백일엔 간단히 상만 차려서 사진만 찍으려고 해요. 그리고 어머님이랑 저녁 먹으면서 얘기한 건데, 가족사진도 찍고 싶어요.”
거기까지 말하자 문도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선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부딪혀 오는 입술이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순식간에 아랫배가 조여들고 발끝이 오므라드는데, 그게 갑자기 서러워졌다.
당신은 왜 이런 걸 잘해. 왜 이렇게 능숙해.
선우는 한 번 더 고개를 틀어 입술을 머금으려 하는 문도를 밀어냈다. 의아한 듯 눈썹을 들어 올리는 문도에게 괜히 다른 핑계를 댔다.
“아주머니 나오실지도 모르잖아요.”
“안 나와.”
“나와요.”
“나오면 멈출게.”
볼을 감싸 쥔 문도가 다시 한번 선우를 당겼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서 입술을 피하며 문도를 밀어냈다.
“불안해서 싫어요.”
제법 단호하게 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문도가 웃고 있었다.
“안 불안하면 괜찮고?”
아. 왜 말을 그렇게 했을까. 내키지 않는다고 할걸. 선우가 잠깐 후회하는 사이 문도가 선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어, 하는 사이 2층까지 올라왔다. 이상한 건 끌려가면서도 뿌리칠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피곤하다고 하거나, 쉬고 싶다고 하면 순순히 놓아주는 걸 알면서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밀어내고 싶은데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모순이었다.
달칵.
중문을 닫은 뒤 문도가 아예 잠금장치를 걸었다. 이제 됐냐는 표정을 짓고는 선우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내리뜬 눈에 명치가 저릿거렸다. 왜 이 남자는 눈빛만으로 사람 마음을 조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도가 능숙하게 혀를 감아 왔다. 야릇하게 비벼지는 느낌에 선우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을 했다. 아랫배가 조여들고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생각이 흐릿하게 뭉개지며 몸이 녹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저릿거렸고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어 갈증이 났다.
선우는 문도의 셔츠를 쥐었다. 안에서 무언가가 자글자글 끓어올라 옷깃을 비틀며 열기 어린 숨을 뱉었다. 더 하고 싶어. 그 생각을 하는데 문도가 입술을 맞댄 채로 가볍게 웃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방금 전까지 내키지 않는다고 생각해 놓고 너무 쉽게 달아올라 버린 게 창피했다.
자신은 순식간에 무너지는데, 이런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남자의 여유가 얄밉기도 했다. 혼자만 취해 있었다는 수치심이 드는 순간,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그만할래요.”
“응.”
말은 그렇게 하면서 문도가 다시 입술을 물어 왔다. 선우는 다시 말했다.
“그만……할래요.”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피하자 문도가 살짝 굳었다.
“진짜 그만하자고?”
“네. 그만해요.”
선우의 대답에 문도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되물었다.
“왜?”
차마 당신에게 과거 경험이 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한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결혼 기사에 휘둘리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라는 걸 잘 알았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왜 이렇게 속이 상할까. 선우는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냥요. 공부도 해야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그 말에 문도가 선우를 빤히 보았다.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눈동자가 선우를 살폈다. 유치한 속내는 들키고 싶지 않아 선우는 문도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어차피 끝까지 할 건 아니었잖아요.”
백일까지 기다려 준다고 했었다. 사실은 그것도 조금 서운해지려던 참이었다. 자신은 키스만 해도 정신이 없고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문도는 잘만 멈췄다.
농도가 짙어진 입맞춤을 하다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물러날 때면 아쉬움에 빈 주먹을 움켜쥐어야 했다. 붙잡고 더 해 달라 요구할 뻔뻔함은 없어서 시간이 흘러 어서 백일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슨 일 있어?”
문도가 물었다.
다른 사람과도 이렇게 했었어요? 그 여자들 중에서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 있었어요?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목 끝에서 울렁거렸지만, 선우는 꿀꺽 삼켰다.
“아뇨. 없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이쯤에서 혼자만의 공간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가서 잘 다스려야지. 유치하고 옹졸한 속마음 같은 거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아무렇지 않아질 때쯤 다시 마주하고 싶었다.
“왜 나를 피하는 것 같지? 왜…….”
눈도 마주치지 않아? 마음이 서늘해진 문도는 선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입술 끝만 물고 있는 선우가 제대로 눈을 맞춰 오지 않았다. 웃어 주지도 않고, 가만히 기대 오지도 않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문도는 말을 하는 선우의 팔을 당겼다. 품으로 당겨 안은 뒤 얼굴을 쥐고 입술을 부딪쳤다. 아,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혀를 넣었다.
입을 맞추며 내리뜬 눈으로 선우의 얼굴을 보았다. 당황한 선우가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계속했다. 선우가 눈을 질끈 감는다. 경직된 상태로 그를 견뎌 내더니 더는 못 하겠는지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
“그만하자고 했잖아요. 싫어요.”
문도는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싫어?”
선우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서 한 번 더 물었다.
“방금 싫다고 그랬어?”
문도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순간 선우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요. 그 대답을 눈으로 하면서.
사실이기도 했다. 다른 여자에게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 생각하면 싫어서 뒷목이 뻣뻣하게 굳었으니까.
“네. 싫어요. 그러니까 그만해요.”
문도의 표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충격을 받은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선우를 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할 말을 잃은 문도를 보니 한 번 더 쐐기를 박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당분간 따로 자고 싶어요.”
문도가 그대로 굳어지는 것을 보며 선우는 돌아섰다. 옹졸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이 이상한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당분간 따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선우는 서재로 향했다.
* * *
문도는 멍하니 열려 있는 중문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서재의 문이 보였다. 못 믿겠다는 듯 인상을 썼다가, 뒷목을 쥐었다. 그러다 다시 눈을 찌푸리며 선우가 들어간 서재의 문을 바라보았다.
싫다고?
내가 만지는 게 싫어?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뭘 했기에 싫다고 하나. 하고 싶은 건 하나도 못 했는데.
고지가 이틀 남았다. 백일을 참아 보겠다고 약속하고서 정말 가뭄에 물을 한 방울씩 받아 마시는 수준으로 가벼운 스킨십만 하고 살았다. 그것조차 못 하면 정말 목이 타 죽을 것 같아서, 참는 게 힘들어도 이 정도로 만족하며 98일을 버텼는데.
당분간 따로 자고 싶다고?
다른 건 몰라도 잠자리만큼은 한 번도 따로 한 일이 없었다. 수유를 하느라 짧게 짧게 끊어서 잠을 자야만 했을 때도 선우는 문도 옆에 누웠다.
단순히 입을 맞추는 게 싫은 게 아닌 듯했다. 눈을 피하고, 고개를 돌리고, 대놓고 싫다고 말할 정도면. 그런 거면…….
설마 내가…… 싫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생각이 끊어지며 머리가 깜깜해졌다. 문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었다.
멍하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 앞으로 걸어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싫어?”
책상에 앉은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문도는 한 번 더 물었다.
“내가 싫어졌어?”
그 말에 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싫어진 건가.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에 문도는 마른침을 넘겼다.
“아주머니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키스해서 그래?”
짐작되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너무 배려가 없었나. 내 생각만 했나. 전에도 받아 주었으니까 별생각이 없었던 건데.
“그래서 그래? 내가 조심성 없게 굴어서?
복잡한 표정으로 문도를 보던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요.”
신경을 어떻게 안 써. 내가 지금…….
“내가……. 뭘…… 어떻게……. 아니, 잠깐만.”
말문이 막힌 문도는 후우,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있어?”
“아뇨. 그런 거 없으니까. 그냥…….”
문도에게 혼자 마음 추스르게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더 이상하게 생각을 하겠지. 당혹스러워하는 문도를 바라보다 선우는 어렵게 마음을 먹었다. 유치한 밑바닥까지는 보여 줄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설명은 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잠깐 앉으실래요?”
선우의 말에 문도가 표정을 더 구겼다.
“왜 또 말을 높여. 사람 불안하게.”
초조한 표정으로 문도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사를 보고 속이 쓰렸던 만큼 문도 역시 마음이 닳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은……. 아까 낮에 결혼 기사 난 거 봤어요. 그리고 다른 기사도 봤어요. 누구랑 결혼했을지 추측하면서 다른 분들 사진을 올려놓은 기사요.”
이 사람은 잘못한 게 없잖아. 내 문제니까 그냥 잘 설명해서, 마음이 조금 안 좋았다고만, 그렇게만 말하면 돼.
“그거 보는데 마음이 이상했어요. 제가 좀 초라해진 느낌도 있었고, 다 지난 일인 거 아는데 괜히 신경도 쓰이고, 그래서 그냥. 그냥…….”
잘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려 나와 선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선우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산후우울증이 오는 시기라 그런가 봐요. 이쯤엔 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대요. 괜히 짜증도 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니까. 그래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문도는 애써 웃고 있는 선우를 보았다. 두 번이나 ‘ㅅ’자를 넣어 가며 말을 높였다. 이선우가 거리를 벌리고 있다. 뭔가 많이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숨기지 마. 왜 이러는 건지 제대로 말을 해. 내가 싫어진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럼 왜 그래.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참았던 거야? 당분간 따로 자자는 말은 왜…….”
씨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유도 없이 싫어진 거라면 어떡하나.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냥 싫어진 거면.
문도는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머리만 쓸어 넘겼다. 한숨을 깊이 쉰 뒤에 다시 한번 선우에게 말했다.
“말을 해야 내가.”
선우가 잠시 문도를 보더니 한숨을 쉬고 대답을 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기사 봤다고. 마음이 별로 안 좋았다고. 우울증이 올 시기인 것 같다고요. 그냥 시간을 좀 주면.”
“시간이 왜 필요해.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기사 난 걸로 이러는 거라고?”
“…….”
“우울증 핑계 대지 말고, 결혼 기사 핑계 대지 말고,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도 하지 마. 말을 해. 그래야 내가 뭐라도 해 볼 거 아니야. 네가 날 싫어하지 않게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말에 선우가 한숨을 쉬었다. 문도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싫은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면…….”
“널 어떻게 내버려 둬. 내가 그게 될 것 같아?”
“…….”
“말해. 밀어내는 이유가 뭔지. 내가…… 싫어?”
선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싫은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지금은……. 뭐라고 말을 못 하겠어서 그런 거니까.”
“말해 줘. 그게 뭐든 나한테 숨기지 마.”
그 말에 선우가 입술을 깨물며 문도를 바라보았다. 팽팽해진 공기에 숨이 막힐 때쯤 선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랑도 나한테 하는 것처럼 했어요? 그 사람들이랑 입 맞추고, 안고 그랬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많이…… 그랬어요?”
문도는 벙찐 표정으로 선우를 보았다. 선우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