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외전 2. 98일(1)
조부의 제사는 큰집에서 치르기로 했다.
서용호는 받은 것도 없는데 제사는 무슨 제사냐며 어깃장을 놓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중호의 일방적인 압력에 불과했겠지만, 속사정까지는 알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한 문도는 진열장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인 타이 중에서 검은색 타이를 골랐다. 메고 있던 청색 계열의 타이를 풀고 새 타이를 둘렀다.
“정말 같이 안 가도 되는 거예요?”
선우가 걱정이 되는지 문가에 서서 문도에게 물었다. 혼자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시험 준비나 잘하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나 보다.
“혼자가 편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혼자 가서 두 마디 하면 끝날 일이다. 굳이 선우를 데려가 불편함을 감수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깟 친척이 뭐라고.
“그래도 큰집에서 뭐라 하시지 않을까요?”
문도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안 데려가는 이유도 없지 않았다. 큰집에서야 당연히 뭐라고 하겠지. 그럼 성질대로 되받아치게 될 거고 분위기는 싸늘해질 텐데, 그야 익숙한 일이지만 선우는 잔뜩 긴장을 할 거였다.
“욕먹는 게 전문이라.”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인데 선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그냥……. 마음이 안 좋아서요.”
“내가 욕먹는 게 싫어?”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을 담은 눈과 속상해하는 표정에 갈비뼈 사이가 뻐근하게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욕 처먹는 것도 전문이고, 그 몇 배로 되돌려 주는 것도 일상이라는 말을.
“이리 와.”
느슨하게 머리를 묶고 있는 선우는 다음 달에 있을 대학원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염없이 아이만 바라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은근히 독한 구석이 있는 선우는 출퇴근을 하듯이 시간을 정해 2층으로 올라와 공부를 했다.
정해진 시간이 끝난 뒤에는 후다닥 아래로 내려가 규원을 물고 빠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2층에 있는 동안은 아래층에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문도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선우를 가볍게 안았다. 선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만. 마음의 위안을 얻을 정도로만. 부족하고 부족했지만 거기서 멈췄다.
백일까지 참겠다는 헛소리를 왜 해서는. 이제라도 무를까 생각을 하는데, 선우가 가만히 몸을 기대 왔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문도는 선우를 마주 안았다. 정수리에 턱을 얹고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음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선우가 회복이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뒤집어쓰게 된 백일의 굴레는 제법 마음에 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가벼운 입맞춤, 다정한 포옹이 의도치 않게 선우의 마음을 녹인 듯했다. 한 번씩은 먼저 안기는 일도 있었고, 한참 동안 문도의 품에 안겨 깊이 숨을 쉬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다녀올게. 공부 열심히 하고.”
문도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선우의 눈에는 아직도 옅은 걱정이 묻어 있었다. 온전히 그를 담고 있는 눈동자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문도는 고개를 내렸다.
그랬지. 내가 이걸 바랐었지.
문도는 선우의 부드러운 입술을 헤집으며 생각했다. 네 마음에 내가 꽉 찬 게 보고 싶어서 전쟁 같은 시간을 지나왔어. 네 눈빛 하나를 얻으려고.
벌어진 선우의 입술에서 달콤한 맛이 났다. 문도는 선우의 얼굴을 쥐고 조금 더 깊이 입술을 맞물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 선우가 문도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문도는 선우의 말캉한 안쪽 살을 한껏 헤집으며 숨을 모두 빼앗았다.
“이러고 가면 진짜 욕먹겠는데.”
가까스로 입술을 뗀 문도가 말했다. 아플 정도로 부풀어 오른 하체를 느낀 선우의 얼굴이 빨개졌다.
“시간이 더럽게 안 가.”
백일까지는 이제 닷새가 남았다. 이제는 괜찮을 것도 같은데. 기왕 여기까지 참아 왔으니 5일만 더 참아 보기로 한다.
그나저나 이쯤 되면 ‘노벨인내상’을 받아야 할 수준 아닌가. 문도는 피식 웃으며 엄지로 선우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풀리지 않는 갈증이 남아 있긴 해도 짙어지는 입맞춤에 달뜬 숨을 쉬는 선우를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조금 더 원한다는 듯 자신의 목을 안으며 몸을 붙여 오는 것도 좋았고, 아쉬워하며 빈손만 움켜쥐는 것도 좋았다. 백일이 선우에게도 간절함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며 문도는 선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다녀올게.”
“네.”
이제는 정말 출발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문도는 선우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뒤 검은색 재킷을 챙겼다.
* * *
결혼 기사는 3일 뒤에 터졌다.
회장의 제사 자리에 가서 결혼해서 애가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을 때부터 예견되어 있던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한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큰아버지의 조급한 성미에 어지간히 나불댔나 보다.
‘뭐 이딴 경우 없는 새끼가 다 있어.’
평범한 집 사람이라 조용히 혼인신고만 했다.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는다. 몸조리 중이라 바깥바람 쐬면 안 되어서 데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하니 서용호가 기함하며 한 말이었다.
문도는 그 뒤로도 몇 마디를 더 얹었다. 앞으로도 따로 자리 마련해서 인사시킬 생각 없으니 기대하지 말라. 어쩌다 보게 된다면 웃으며 환영해 주기를 바란다. 과도한 관심은 사양이다. 그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서도 케미컬 전략본부문장 서문도 전무의 결혼 소식이 전해져. 상대는 일반인으로 추정……. 비밀리에 혼인신고……. 서문도 전무는 우현희 현(現) 서도 그룹 부회장과 고(故) 서명구 회장의 차남 서중호…….’
이것도 기사라고.
쓸 말이 어지간히 없었는지 문도의 신상 명세를 더 길게 적은 걸 보며 실소를 했다. 창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 아래로 링크된 기사가 보였다.
‘재벌 3세의 신부는 누구?’
지랄을 한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눌러 본 기사에는 대학 동문이었던 유력 정치인의 딸과 어머니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갔었던 유명 피아니스트, 플로리스트로 활약 중인 식품 업계의 막내딸 등이 언급되어 있었다.
문도의 사진은 물론 여자들의 사진도 동그랗게 박아 가며 그들 중 하나일 거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헛다리 짚기는.
피식 웃은 문도는 화면을 내렸다. 소스가 어디서 흘렀는지 너무 뻔했다. 서창도 수준이 이렇지.
별일 아니라는 생각에 문도는 화면 창을 내리며 노트북을 닫았다.
* * *
선우는 오랜만에 우현희와 저녁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기념으로 둘이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해서 본관으로 건너온 참이었다.
“규원이 백일은 상차림만 할 거라고 했다며?”
“네. 떡이랑 과일 놓고 사진만 찍으려고요.”
직원들에게 돌릴 백설기를 넉넉히 주문해 두었고, 상에 올릴 과일과 예쁘게 꾸밀 꽃을 예약해 두었다.
“저……. 어머님.”
그리고 또 계획한 게 하나 있었다.
“응.”
“괜찮으시면 가족사진을 찍고 싶은데, 어떠세요?”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거였다. 우현희와 장 여사, 문도와 규원까지. 규원의 기념일마다 가족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나야 좋지.”
흔쾌한 대답에 선우는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이어 가는데 현희가 물었다.
“조심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했는데 결국 기사가 났네.”아.
선우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결혼 기사가 난 것은 벌써 알고 있었다. 제사에 다녀온 문도가 조만간 알려질 수도 있다고 예고를 하기도 했었고.
“괜찮니?”
“네. 괜찮아요.”
문도나 현희가 무엇을 배려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평범한 시작은 아니었으니까. 선우가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보호를 해 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낮에 나온 기사엔 선우의 신상이나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서도 그룹의 서문도가 비밀리에 결혼을 했다, 그 정도로 요약되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언론사 한 귀퉁이에 올라온 짧은 기사였다. 그러니 괜찮아야 했다.
“그래. 넌 건강 회복하는 것만 신경 쓰고. 대학원 준비는 잘 되어 가니? 시험이 언제였더라?”
“다음 달이에요. 실기에서 이론으로 전공을 바꾸는 거라 어렵긴 한데, 재미있어요.”
예술경영 쪽에도 일가견이 있는 우현희였기에 대화는 주로 그쪽으로 흘러갔다. 우현희는 신기할 정도로 아이보다는 선우의 꿈이나 비전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별채로 돌아오니 시터 아주머니가 규원이 방금 전 저녁 수유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고 알려 준 뒤, 다시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선우는 은은한 조명이 켜진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바퀴가 달린 트레이에 가지런히 정리된 아이 손수건을 손으로 쓸어 보고 아이 냄새가 가득한 곰돌이 인형도 품에 안아 보았다.
괜찮아야 하는데.
많은 배려를 받고 있는 것을 알았다.
조용히 양가 가족만 모여 식사를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하고 싶다고 말을 했을 때도, 모유 양이 적어서 두 달 만에 수유를 그만두어야 했을 때도, 아이를 키우며 대학원 준비를 병행하겠다고 했을 때도 모두가 선우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그런데…….
낮에 보았던 기사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낱 자극적인 가십 기사인 것을 알아도. 그래도…….
이상한 열등감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었으면 숨어서 결혼하는 일은 없었겠지. 과하게 보호를 하지도 않았겠지. 당연하게 친척들 모임에 참석해서 인사를 했겠지.
서문도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어깨를 펴고서 당당히 축하를 받았을 것이다. 조심해야 할 필요도 없었을 거고, 혼인신고만 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내가 당신을 초라하게 만든 건 아닐까.
못난 생각은 그뿐이 아니었다.
저 중에 실제로 사귄 사람이 있었을까. 늘 저렇게 화려한 사람들을 만나며 살았을까. 그 사람들에게도 다정했을까. 마음을 주었을까. 입을 맞추고 몸을 안았을까.
바보 같은 생각인 걸 알았다. 문도가 경험이 많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다. 자신을 가볍게 가지고 놀기를 바란 적도 있었고, 한낱 스쳤던 여자처럼 되기를 원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 와 서운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안다. 게다가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다정히 안아 주었다. 잠이 들 때까지 등을 다독여 주었고, 몸조리가 우선이라며 백일까지 참아 본다고도 했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아이의 엄마라기보다는 이선우라는 인간 자체로 존중을 해 주고 있고, 장 여사는 친정엄마처럼 그녀를 돌보았다. 넘치도록 사랑을 받고 있는 걸 아는데도. 그런데도…….
자꾸 마음이 복잡해지려 했다.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이유 없이 속이 상하려 했고, 못난 생각들이 자꾸만 들었다.
이게 산후우울증인가.
선우가 한숨을 쉴 때였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드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문도가 보였다.
“왔어요?”
선우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고 애써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