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외전 1. 너무 예뻐요
9월의 어느 오후, 송정태 팀장은 이제 막 세팅을 마친 회의실에 앉았다.
딩동.
어디선가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와 정태는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런 메시지도 떠 있지 않았다. 내가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은 문도가 핸드폰을 꺼냈다.
무표정하던 서 전무가 피식 웃는다. 그러더니 뭐라고 메시지를 적는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길쭉한 손가락에는 심플한 모양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다.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
서 전무는 한창 연애 중인 듯했다. 연애 중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팀원들 중 누구도 서 전무에게 감히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초, 서문도 전무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나타났다. 그러더니 한 번씩 핸드폰을 꺼내 보며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전에 없던 일이라 팀원들 모두가 들썩였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지 않아요? 저렇게 대놓고 반지 끼고 다니는 걸 보면 결혼할 생각인가? 팀장님은 뭐 아시는 거 없어요?’
전략본부1팀과 2팀의 팀원들이 돌아가며 정태에게 물었다. 그나마 그가 제일 가까이에서 서문도 전무를 보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뭐 하나.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수행비서를 두지 않은 서문도 전무의 사생활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가끔 대내협력실 명규진 실장이 왔다 갔다 하긴 했는데, 그 사람이야 워낙 입이 무거운 사람이고.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서 전무가 어떤 여자와 통화하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귀가 녹을 정도로 다정했다고.
또 누군가는 백화점에서 서문도를 보았단다. 어떤 여자와 함께 쇼핑 중이었는데 여자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 했다.
목격담에 의하면 한 쌍의 선남선녀였단다. 연예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뻤다고도 했다. 재벌집 딸이라는 이야기, 정치인의 딸이라는 이야기. 여자의 정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약혼이라느니 결혼이라느니 이렇다 할 소식은 들려오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헛소문 같은 목격담만 분분한 가운데 반년이 흘렀고, 이제는 팀원들도 흥미를 잃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에 무탈하게 연애 중인가 보다 짐작만 할 뿐이었다.
메시지를 다 썼는지 다시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는 서문도가 보였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직 다른 팀원들은 모이지 않았다. 단둘뿐인 회의실, 그간 잘 참아 왔던 정태는 그만 충동적으로 서문도 전무에게 묻고 말았다.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그 말에 문도가 눈을 들어 정태를 보았다.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에 살짝 오금이 저려 왔다. 선을 넘는 질문이었나. 잠깐의 반성타임을 갖는데 문도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애가 뒤집기를 해서요.”
“아, 네.”
애가 뒤집기를 했구……, 응?
“네?”
“아직 백일도 안 됐는데 그걸 하네.”
문도가 다시 한번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쓱- 올라가는 입꼬리에서 묘하게 뿌듯한 표정이 보였다.
“아, 조카분이……?”
아니다. 정태의 머릿속에 서도 그룹 가계도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서문도는 외동이다. 그럼 오촌 조카인가. 그도 아닐 거다. 사촌의 애가 뒤집기를 했다고 뿌듯해할 성격도 아니고, 무엇보다 사촌들과 대놓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본인 아이인가? 결혼 소식은 없었는데? 같은 재벌집 여식이었다면 분명 기사에 떴을 텐데. 그럼 정말 연예인인가? 그래서 애부터 낳았나? 집안 반대가 있어서?
송정태의 머리가 복잡해질 때였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태를 두고서 문도는 태연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죽은 이민우와 선우의 관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명 실장을 제외하면 양가의 가족과 장 여사뿐이었다. 아버지야 본인이 저지른 일이 있는 데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한 발설할 일은 없었고, 어머니와 장 여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회장의 사망. 최지상의 살인사건과 서유라와의 동반 자살. 그룹 전체를 휘감았던 문도의 검찰 출두와 부회장의 사과. 그 뒤를 이어 바로 자신의 결혼과 출산 소식이 나가면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딱 좋았다.
아무리 보호를 한다 해도 선우의 신상에 대해 파헤쳐 보는 놈들이 있을 거고, 최지상 사건과 연관된 것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우와의 결혼과 규원의 출산은 회사는 물론이고 친척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쓸데없이 입방아에 오르는 일 따위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몇 안 되는 친척들에게는 조만간 다가올 회장의 기일에나 알려 줄 생각이었다. 서문도가 평범한 집 여자와 연애를 하다 아이를 가졌고, 일반인인 여자를 보호하려 혼인신고만 하고 산다고.
그의 성질이 지랄맞은 건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그저 유난 떤다고 생각을 하겠지.
“조카는 아니고, 제 아입니다.”
“어……. 그럼…… 결혼……. 언제……. 어…….”
“번거로워서 혼인신고만 했습니다. 송 팀장님만 알고 계세요.”
허극. 송 팀장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는 것을 보며 문도는 빙그레 웃었다. 최측근 참모들은 알고 있었다더라. 그렇게 이야기가 만들어지겠지.
먼 훗날 혹시라도 누군가 이민우와 이선우에 대해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엔 유가족을 만나러 갔던 서문도가 죽은 이민우 누나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다.
죽자고 쫓아다녀서 기어이 결혼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그것만큼은 어쨌든 사실이니까.
* * *
저녁을 먹고 나면 선우는 할 일이 많았다. 아이 목욕을 시켜야 했고, 구석구석 로션도 발라 줘야 했다. 새 기저귀를 채워 주고 보송한 내복을 입히고 나면 금방 밤이 되었다.
“아구, 잘하네. 우리 도련님은 어쩜 이렇게 잘도 뒤집을까.”
장 여사의 목소리에 분유를 타고 있던 선우는 뒤를 돌았다. 방금 전까지 똑바로 누워 있던 규원이가 매트 위에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고서 선우를 보고 있었다. 선우의 입가에 자동으로 미소가 걸렸다.
“규원이 또 뒤집었어? 이제 진짜 잘하네? 잠깐만 기다려. 엄마가 맘마 줄게.”
말을 알아듣는 건지, 그냥 웃는 건지 규원이가 방긋거리며 웃었다. 음마, 음마- 하는 옹알이 소리를 듣는 선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기를 쓰더니 이틀 만에 뒤집네요. 어쩜 저런 것까지 전무님이랑 똑같을까. 정말 유전자 어디 안 간다니까.”
아이의 옆에서 내복과 손수건을 개던 장 여사가 말했다. 어제오늘, 이틀간 시터 아주머니가 휴가를 낸 날이라 장 여사가 조금 늦게까지 남아 선우를 도와주고 있었다.
“문도 씨도 아기 때 저랬어요?”
“말도 마요.”
규원이를 낳은 지 3개월. 선우는 장 여사를 통해 가끔씩 문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곤 했다.
“될 때까지 하는 게 똑같아. 이제 조금 더 커 봐요. 잘 안 되면 인상 쓰면서 짜증 낼걸?”
특유의 찌푸린 표정이 생각나 선우는 살짝 웃었다.
“여섯 살 때였나. 유치원 친구가 자전거를 탄다는 거야. 그래서 보조 바퀴 달린 걸로 사 줬더니 그거 떼라고, 자기는 그냥 탈 거라고. 기사 양반이 뒤를 잡아 줬는데 몇 번 해 보더니 잡지 말래. 넘어지게 냅두래. 다쳐도 된대. 그러더니 기어이 혼자서 타더라구요.”
장 여사를 통해 듣는 이야기 속의 서문도는 고집이 세고 지는 것을 싫어했다. 지저분한 것도 싫어했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았다.
규원이가 정말 그런 문도를 많이 닮아서 빨리 뒤집은 건지, 그냥 발달이 조금 빠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왕이면 그를 닮은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만들 땐 꼭 내 것도 만들어서 달아 주고 그랬어요.”
마지막 장 여사의 목소리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젖병을 들고 거실로 나온 선우는 엎드려 끙끙대는 규원이를 안아 들었다. 품에 폭 안기는 아기에게서 포근한 아기 냄새가 났다.
선우는 아이 머리에 코를 대고서 숨을 크게 마셨다. 아이의 냄새만으로도 행복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우리 규원이, 맘마 먹을까? 배고팠지?”
마, 마, 연신 옹알이를 하는 규원이를 편히 안고 젖병을 물려 주었다.
“아까 오후에 문도 씨한테 규원이 뒤집기 영상을 보내 줬거든요.”
“뭐래요?”
“저래서 언제 걷냐고요.”
장 여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선우도 말을 하며 웃어 버렸다. 문도가 보내온 답은 ‘저래서 어느 천년에 걸어?’였다.
“우리 도련님 잘도 먹네. 잠도 잘 자고, 분유도 잘 먹고. 뒤집기도 잘 하고. 아주 그냥 못 하는 게 없어.”
장 여사가 애정 가득한 얼굴로 규원을 보며 말했다. 선우는 구구절절 동감했지만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맞장구는 치지 못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많이 늦었어요.”
“좀 더 있어도 되는데 괜찮겠어요?”
“오늘은 제가 재우고 싶어요.”
선우의 말에 장 여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출산하고 백일도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조리 기간이라며 다들 쉬라고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힘닿는 한 자신이 직접 분유도 먹이고 싶고, 목욕도 시키고 싶고, 안아서 재우고 싶었다.
대학원 입학 전까지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규원이와 함께하고 싶은데 주변에서는 몸부터 생각하라며 자꾸만 쉬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처럼 시터 아주머니가 쉬는 날이 선우에게는 아이를 실컷 안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 도련님, 내일 또 봐요.”
장 여사가 인사를 하고는 숙소동으로 건너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유를 다 먹어 가는 규원의 눈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규원이 이제 코 잘까? 엄마랑 같이 코 잘까?”
선우는 일어나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응, 하는 트림 소리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포근한 아기 냄새.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살. 가물가물 감기는 눈. 선우는 행복하다고 생각을 한다.
품에서 고이 잠든 규원을 안고 선우는 1층의 침실로 향했다. 가만가만 아기 침대에 내려놓고 그 옆의 큰 침대에 누웠다. 모로 누워서 고롱고롱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다는 말이 무엇인지 아이를 낳고서 알았다. 잠을 아껴서라도 눈에 가득 담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났을까. 잠이 든 줄도 모르게 자고 있는데 누군가 머리를 쓸어 주며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나 왔어.”
잠결에 눈을 뜨자 어둑한 시야에 문도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볍게 웃어 주는 남자를 보는데 마음에 찰랑찰랑 물결이 일었다.
“더 자. 씻고 올게.”
선우의 볼을 어루만진 문도가 말했다. 선우는 다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일어나려는 남자의 목을 안았다. 싸늘하고 청량한 냄새가 난다. 아이의 냄새와는 또 다른 행복의 냄새.
“이거는 반칙이고.”
선우는 문도의 말에 눈을 감고 웃었다.
“잠시만 이렇게…….”
임신 말기부터 조리 기간인 지금까지 도를 닦는 심정으로 참고 있다는 문도가 끙 소리를 내더니 침대로 올라와 선우를 안아 주었다.
“규원이 뒤집는 거 보여 주고 싶었는데. 진짜 잘해요. 천잰가 봐.”
작게 속삭이는 선우의 말에 문도가 낮게 웃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차마 못 하는 유난스러운 말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라서.
“우리 튼튼이 너무 예뻐. 정말 너무 예뻐요. 정말, 정말 너무너무 예뻐요.”
“응. 예뻐.”
만족스럽게 웃은 선우는 등을 다독여 주는 남편의 품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정말 너무 예뻐요.”
“그렇게 예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 같아.”
“아파.”
단칼에 아프다고 말하는 문도의 목소리에 선우는 웃었다. 다시 가물가물 잠이 밀려왔다.
“정말 너무 예뻐요…….”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선우가 말했다. 문도가 나도 좀 예뻐해 보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문도 씨 닮아서 그런 것 같아……. 너무 좋아요.”
이거야말로 반칙이었다. 잠시 헛웃음을 웃은 문도는 잠이 든 선우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네가 그만큼 예쁘다는 말은 다음에, 더 이상 도를 닦지 않아도 될 때 해 주기로 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