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에필로그 2.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AW
제일 먼저 혼인신고를 했다.
그다음으로는 선우의 부모님과 민우가 있는 납골당에 다녀왔다. 부모님의 기일에도, 민우의 기일에도 함께 다녀왔지만 이번엔 혼인신고서를 들고 갔다.
서유라가 있는 운주사에도 함께 다녀왔다. 절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서유라의 이름으로 초를 켰다.
그리고 4월의 마지막 주말에 조촐한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이라 부를 것까지도 없는 문도의 직계 가족과 선우의 이모네가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선우 씨 출발했어요.]
30분 전, 장 여사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문도는 마당이 넓은 한정식집 앞에서 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세단이 언덕을 올라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길이 조금 막혔어요.”
차에서 내리며 선우가 말했다. 문도는 잠시 말을 잊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투명한 뺨, 장밋빛 입술에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만 예뻐지라고 말했을 텐데.”
선우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아이를 가져 배가 봉긋하게 나왔어도 이선우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머님은 벌써 오셨죠? 이모네는 거의 다 와 간대요.”
“조금 전에. 아, 들어가면 아버지가 있을 거야.”
선우는 살짝 놀라 문도를 올려다보았다.
“인사만 해.”
문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집을 나간 아버지를 부른 건 문도의 생각이었다. 우현희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전해 듣기로 송주연은 버리고 혼자 지낸다는데 그거야 서중호가 알아서 할 일이고, 부른 목적은 따로 있었다.
“어머니, 선우 왔어요.”
문도는 선우를 안쪽의 사랑채로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별관처럼 따로 지어진 곳에 단정한 한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오가며 상을 차리고 있었다.
“여사님이 고집부리시더니, 정말 예쁘네. 추운데 이쪽으로 들어와.”
선우는 우현희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회사 일에 파묻혀 사는 우현희를 보는 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다. 그나마도 아침 식사를 같이 먹는 정도였다. 그녀는 대체로 담담히 선우를 대하곤 했지만 출장을 다녀오면 꼭 선물을 전해 주었고, 부모님의 기일과 민우의 기일을 잊지 않고 챙겨 주었다.
우현희의 옆에는 서중호가 서 있었다. 문도를 흘깃 본 서중호는 갑자기 입술을 끌어당기며 환하게 웃었다.
“허허. 이거 참. 문도가 날 닮아서 아주 눈이 높아. 이선우 씨라고 했었나. 새 식구가 된 걸 환영해요. 임신도 축하하고. 우리…….”
“튼튼이.”
문도의 말에 서중호가 얼른 가져다 붙였다.
“그래그래. 우리 튼튼이가 아주 복덩이야. 암, 그렇고말고. 시어른이라 어려워 말고 편히 생각해요.”
가식적인 미소를 한껏 보인 뒤 서중호는 징글맞다는 표정으로 문도를 보았다. 이제 됐냐? 그렇게 물어보는 듯한 눈빛에 문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선우를 환영해 주시니 저도 좋네요. 식사나 하고 가세요.”
미간을 꿈틀거린 서중호는 이내 다시 활짝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좋은 날 밥 한 끼는 같이 해야지. 자자, 들어들 갑시다.”
서중호가 먼저 신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도는 툇마루에 살짝 걸터앉은 선우에게 물었다.
“이모님 오실 때까지 기다릴까?”
“네.”
툇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은 문도는 선우의 손을 잡았다. 정갈한 정원의 담을 따라 심어진 벚나무에 꽃이 활짝 핀 것이 보였다.
“날씨가 좋네.”
“네. 다행이에요.”
문도는 대답을 하는 선우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선우가 고개를 돌려 문도를 보았다.
“잘할게.”
선우가 발그레 뺨을 붉혔다. 대문을 넘어오는 선우의 이모와 이모부가 보였다. 선우야, 미숙이 부르는 소리에 선우가 활짝 웃는다. 꽃이 피어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 * *
싱그러운 초록색이 세상을 물들이고 담장마다 붉은 장미가 피었다. 금빛 물살 같은 햇볕이 넘실거리는 어느 오후에, 문도는 굳은 표정으로 수술실 앞에 서 있었다.
“전무님, 커피 좀 드릴까요?”
“됐어요.”
선우의 힘든 신음 소리를 들었던 게 방금 전이다. 커피가 넘어갈 리가.
“여사님은 선우가 저러고 있는데, 커피가 넘어가요?”
“애 낳는 게 다 힘들죠. 목숨 걸고 낳는 거야. 부회장님도 전무님 낳을 때 죽다 살았어요. 부회장님 그때 응급수술 하셨죠?”
“그랬죠. 너무 많이 찢어져서.”
우현희의 말에 문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눈빛은 더욱 심각해지고 미간에 팬 골은 더 깊어졌다. 누가 보면 굉장히, 아주 많이, 몹시 짜증이 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
쓸데없이 참을성이 많은 이선우는 진통이 심해지고 나서야 그를 불렀다. 도착을 했을 땐 이미 땀을 뻘뻘 흘리며 신음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둘러 병원으로 왔는데 통증에 비해 자궁은 많이 열리지 않은 편이었다. 식은땀을 흘려 가며 고통을 참는 선우를 보는데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무통 주사도 때가 돼야 놔줄 수 있다는 말에 생으로 앓는 선우를 보다 유도분만을 결정했다. 유도분만을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아이가 잘 내려오지 않는단다. 의사는 제왕절개를 권했고, 문도는 망설임 없이 동의를 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피임을 했지.
이렇게 생으로 사람을 피 말리는 짓인 줄 알았으면 죽어도 피임을 했을 거다. 임신이 다시 만날 빌미를 만들어 주긴 했지만, 아이가 아니었어도 그는 선우를 다시 찾아왔을 거였다. 아기를 가졌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어.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뒤에서는 태평하게 그때 수혈을 몇 팩을 받았느니, 회복이 더뎠느니 등줄기가 섬뜩해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선우 이모님은 오고 계시지?”
“네.”
문도의 짧은 대답에 장 여사가 괜찮을 거라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제일 좋은 병원에, 제일 실력 좋다는 교수님이 집도하는데 너무 걱정 마세요.”
“걱정 안 해요.”
대답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상관없었다. 문도의 온 신경은 분만실 안쪽의 선우를 향해 뻗어 있었다.
미련한 이선우.
식은땀 줄줄 흘려 가며 끙끙 앓으면서도 괜찮다는 말만 했었다. 자기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꼼짝도 하지 못한 채 피를 말려 가며 기다리는데 안쪽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분만실 바깥에 있는 전광판에 선우의 이름이 뜨고 그 아래에 팡파르가 터지는 화면과 함께 왕자님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낳았나 보네요.”
장 여사가 벌떡 일어나며 앞으로 나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며 아이를 안은 간호사가 나왔다.
“우리 왕자님, 어쩜 이렇게……. 전무님일까. 아주 판박이네.”
장 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도는 아이를 확인했다. 발가락 열 개, 손가락 열 개. 머리숱이 많고 눈썹은 찌푸린 코가 오뚝한 아이.
울지도 않으며 뭐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아이가 하품을 했다.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이 선우와 닮았다. 문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선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열리는 시야 속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전무님.”
“정신 못 차렸지.”
툭 던지는 말을 듣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생 많았어.”
문도가 선우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헝클어진 모습조차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자신의 남편이 보인다. 언젠가부터 선우의 세상이 되어 버린 사람. 선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문도를 바라보다가 마른 입술을 뗐다.
“튼튼이는요?”
“튼튼해.”
그 말에 다시 선우가 웃었다. 문도도 피식 웃었다.
“접종도 하고 목욕도 해야 한대. 병실로 올라가면 어머니랑 장 여사님이 아이 데리고 올라오실 거야.”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마취를 하느라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아이가 건강하게 나왔으면 그걸로 괜찮았다.
“아이가 문도 씨 많이 닮았죠?”
“아니. 너 닮았어.”
“어디가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생긴 거.”
선우는 다시 웃었다. 마취가 전부 풀리지는 않았는지 몸에 감각도 뚜렷하지 않았고, 목도 말랐다. 진통은 진통대로 겪어서 그런지 기운도 없었다.
“잠깐 유라 씨 봤어요.”
선우의 말에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문도가 눈썹을 들었다. 수면마취가 시작되고 하얗게 빛이 바래 갈 때 잠깐 목소리 같은 걸 들었다.
누나, 하는 민우의 목소리와 이선우! 하는 유라의 목소리. 그리고 샐쭉 웃는 표정도 잠깐 본 것 같았다.
“아이 봤으면 좋아했을까요?”
“질투했겠지.”
어쨌든 민우를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 사람인데, 마음이 물러서 그런가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유라가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아이 이름은 골랐어?”
문도가 선우에게 물었다. 얼마 전 운주사 큰스님께 아이 이름을 부탁했었다. 모두들 선우가 정하는 대로 부르겠다고 해서, 여러 개의 이름을 놓고 선우 혼자 열심히 고민을 했었다.
“규원. 서규원이요.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어. 나도 하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는데.”
“뭔데요?”
“전무. 서전무.”
그래야 네가 다시는 날 그렇게 안 부르지. 뒤끝이 긴 문도가 말하자 선우가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렸다. 티끌 없이 웃고 있는 선우를 보며 문도도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사그라든 자리에 고요한 눈빛만이 남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뒤로 물러나며 두 사람만 남았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사랑해요.”
선우는 내내 목 끝에서 찰랑거렸던 말을 소리 내어 말했다. 뜻밖의 고백이었는지 문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말없이 선우만 깊게 응시하던 문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약속부터 할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선우는 문도를 바라보았다.
“먼저 죽지 않을게. 마지막까지 네 곁을 지켜 줄게.”
아……. 선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순식간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언제나 소망했던 일이다. 혼자 남겨지지 않는 일.
“사랑해. 선우야.”
눈물을 닦아 주며 문도가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닿는 따뜻한 입술을 느끼며 선우는 눈을 감았다. 바람조차 부드러운 6월의 어느 날이었다.
—감사합니다.—
러브 어페어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