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에필로그 1. 다시, 봄
연두색 잔디 위로 스프링클러가 돌아간다. 안개 같은 물방울이 멀리 퍼지며 마당에는 작은 무지개들이 생겨났다.
“선우 씨, 오렌지주스 괜찮아요?”
거실에 앉아 두꺼운 책을 읽으며 졸고 있던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졸음 가득한 눈에 초록 잔디가 보였다.
“선우 씨.”
장 여사의 목소리에 선우는 퍼뜩 뒤를 돌았다.
“아, 네. 마실게요.”
주섬주섬 책을 치우며 말했다. 아직 이른 봄이지만, 선우는 10월에 있을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실기 전공에서 이론 전공으로 바꾸는 거라 시험부터 막막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준비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낳기 전에 부지런히 해 두려는데 도통 진도는 나가지 않고, 자꾸 졸음만 왔다.
“우리 튼튼이는 배 속에서부터 공부를 하네요.”
장 여사가 주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선우는 멋쩍게 웃었다.
“맨날 졸기만 하는걸요.”
선우는 제법 부푼 배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6개월이 되니 숨은 자주 차오르고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되었다. 밤에 자주 깨다 보니 낮에는 조는 게 일이었다. 책을 읽겠다고 앉으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어김없이 졸음이 찾아왔다.
“아까 병원 갔다가 올라오는데, 양지에는 벚꽃이 벌써 피었더라고요. 목련도 얼마나 탐스러운지. 이제 정말 봄이야. 그거 보는데 선우 씨 처음 왔을 때 생각이 났어요. 참 잘도 견딘다 생각했는데.”
선우는 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작년 이 무렵, 매일 숙소동에서 별채로 건너오며 바라보았던 정원의 꽃들이 기억난다.
커다랬던 목련꽃, 흩날렸던 벚꽃, 하얀 눈송이 같았던 이팝나무의 꽃, 가지를 늘어트렸던 개나리와 색색의 철쭉.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의 날들은 아주 먼일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의 일 같기도 했다.
아직도 어디선가 ‘선우야!’ 하고 부르는 유라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때가 있고, 마스터룸에서 눈을 떠서 곁에 누운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생경할 때가 있었다.
물벼락을 맞았던 1년 전의 이선우에게, 1년 뒤의 너는 아이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고, 그 아이의 아빠는 서문도이며, 심지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말을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웃지도 않을 것 같다. 차라리 외계인을 보았다고 하는 말이 더 믿음이 간다고 생각하겠지.
“아. 여사님, 튼튼이 움직여요.”
선우는 짧은 소리를 내며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아이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발로 어딘가를 쭉 밀었다. 엄마 나 여기 있어, 꿈이 아니야. 여기 내가 있어요, 라고 말을 하는 것만 같다.
“우리 도련님은 어찌 그리 전무님을 쏙 닮았대요? 붕어빵이 따로 없어.”
초음파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다며 장 여사가 말했다. 선우도 웃으며 말했다.
“코랑 입은 정말 닮았어요.”
문도를 쏙 빼닮은 튼튼이는 아들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초음파 사진 속의 튼튼이는 정말이지 문도를 완전히 복사해서 붙여 놓은 수준이었다.
“오늘 저녁이면 전무님 오시겠네. 많이 기다렸죠?”
장 여사의 말에 선우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일주일간 중국으로 출장을 간 문도를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프러포즈까지 받았으니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서문도는 밤마다 선우의 방을 찾아왔다. 대뜸 들어와선 자신의 방이 너무 크다고 했다. 그러다 혼자서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다음엔 손만 잡고 자겠다고 했고, 입만 맞추고 가겠다고 했다. 그다음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안고만 자겠다고 했었다. 약속이 지켜지는 날은 한 번도 없었다.
잠을 청할 때가 되면 문도는 항상 선우를 안아 주었다. 어떤 날은 뒤에서 안아 점점 동그래지는 선우의 배를 가만히 감싸 주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코를 비비기도 했다.
중간중간 잠에서 깬 선우가 화장실에 다녀오면 다시 안아서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럴 때면 세상의 모든 불행과 슬픔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것도 선우를 감싸고 있는 남자를 넘어올 수 없을 것만 같아, 다시 스르륵 잠이 들곤 했었다.
“며칠 잠을 못 잤다고 눈이 퀭하네요. 책은 그만 보고 들어가서 한숨 자요.”
이제는 문도가 없을 때면 선우가 잠을 잘 못 잔다는 걸 장 여사도 아는 것 같았다. 선우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 여사의 말대로 잠깐 누워서 눈을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도록.
* * *
김포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땐 깜깜한 밤이었다. 문도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0시 20분. 집에 도착하면 빨라도 11시.
자고 있으려나.
문도는 성큼성큼 걸었다. 베이징에 있었던 일주일이 70일 같았다. 선우를 보지 못하는 하루는 열흘처럼 길었다.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저녁에 한 번씩만 통화를 했더니 더 그랬다.
‘저는 잘 지내요.’
저녁의 통화조차 길지 않았다. 선우는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그 역시 핸드폰을 붙잡고 늘어지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 있으면 됐지. 밥 잘 먹었으면 됐지. 잘 잤으면 된 거지. 그런 생각으로 전화를 끊으면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선우가 보고 싶어서.
바깥으로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차가 보였다. 기사에게 인사를 한 뒤 뒷좌석에 앉은 문도는 핸드폰을 꺼냈다. 도착했다고, 금방 갈 거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다시 덮었다.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며 빠르게 스쳐 가는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기다리지 않고 푹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딱 그 마음의 크기만큼 잠들지 않은 채로 자신을 기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이 모양이었다.
일주일간 그가 선우를 보고 싶어 했던 것만큼, 그래서 전화를 오래 할 수도 없었던 것만큼 선우도 자신을 많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도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주차장 엘리베이터에 오른 문도는 묵묵히 앞을 보았다. 금세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딩, 하는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무심코 앞을 보는데 열리는 문틈 사이에 눈에 익은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전무님?”
선우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선우를 보는 것만으로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다. 문도는 한 발 앞으로 나가며 피식 웃었다. 또 전무님이지.
“이름을 서전무라고 할걸 그랬어. 그냥 개명을 할까?”
아직도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못하는 선우가 웃었다. 반달이 된 눈이 예뻤다.
“서전무 전무님, 어때?”
“아뇨, 그건. 좀.”
선우가 웃음을 물고서 고개를 저었다. 문도는 웃고 있는 선우의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작게 숨을 마시는 부드러운 입술을 안으로 깊이 당겨 물었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선우의 향기가 물씬 밀려들었다.
밀려드는 문도 때문에 뒤로 걸음을 걷게 된 선우의 등이 벽에 닿았다. 왜 입맞춤을 하면 할수록 이선우는 더 달아지는 걸까. 문도는 얕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선우의 숨을 흩뜨리고 또 흩뜨렸다.
“어떻게 알고 나왔어?”
문도는 살짝 입술을 떼고 물었다. 선우의 맑은 눈동자가 문도를 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어요.”
선우는 그렇게만 말했다. 방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제 올까 시계를 계속 보았다는 말도, 한 번씩 복도에 나와 서성였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늦었는데 그냥 자지.”
선우는 그냥 웃기만 했다. 눈을 내리깔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문도를 보는데 마음이 너무 크게 일렁였다.
당신이 없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많이 기다렸다는 말도 목 언저리에 얹혀서 뱉어지지 않았다.
“아직 잠이 안 와서요. 그래서, 그냥.”
선우는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내리뜬 속눈썹과 쭉 뻗은 콧날이, 붉은 입술과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가슴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사실은.”
선우는 다시 말을 멈췄다. 목에 걸린 이름을 말하고 싶은데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문도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어서 더 그랬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서……문도 씨 기다리느라.”
거기까지 말하는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뺨이 붉어진 선우를 보며 문도가 말했다.
“얼마나.”
짙어진 눈동자가 보인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동자를 하고서 남자가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많이 기다렸어요.”
고개를 숙이며 문도가 한 번 더 물었다.
“얼마큼 많이?”
“아주 많이…….”
대답을 끝으로 선우의 입술이 삼켜졌다.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어깨로. 남자의 짙은 숨이 어지럽게 옮겨 다녔다.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옅은 한숨과 함께 이마에 입을 맞춘 문도가 선우를 꼭 안았다. 선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쉰다. 간지러워 움찔거리니 살짝 깨물기도 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조금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출장 선물.”
문도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선우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문도를 보았다. 석 달간 받은 선물이 화장대 서랍을 가득 채웠는데 남자는 아직도 모자란다는 듯 자꾸만 뭔가를 사다 주었다.
“쓸어 오려다가 참았어. 주머니 무거워질까 봐.”
“너무 많아요. 저는 반지 하나 해 드렸는데.”
달칵, 상자를 열었더니 심플한 진주 귀걸이가 보였다. 옅은 핑크빛이 도는 진주알이 조명 아래서 우아하게 빛났다.
“넌 다른 거 해 주면 돼.”
뭘 해 줘야 하나. 선우는 고개를 들어 문도를 보았다. 목걸이가 늘어나고 시계와 귀걸이가 늘어날 때마다 문도는 하나씩 요구를 했다.
이름으로 불러 봐. 뽀뽀해 봐. 타이 풀어 줘 봐. 단추 하나만 풀어 봐.
이번엔 또 뭐를 말하려나 바라보는데 문도가 말했다.
“이제 그만 날 잡자. 언제까지 각방 쓰는 척할 거야. 아침 되면 같이 나오면서.”
대체 누구 보라고 연기를 하는 거냐는 말에 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그만 결혼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문도는 웃고 있는 선우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