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짙은 네이비색의 세단이 회전 교차로를 돌았다. 뒷좌석에 앉은 선우의 눈에 키가 큰 한 남자가 보였다.
호텔 앞을 오가는 프론트맨과 이용객들 중 유난히도 눈에 띄는 남자는 선우가 타고 있는 차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천천히 남자의 앞에 멈추어 섰고, 서문도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선우가 앉은 자리에 찬바람이 들어오며 남자가 가진 특유의 싸늘하고도 청량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늦지 않게 왔네.”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남자를 보는데, 선우는 목이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차에서 내린 다음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그 뒤로 말이 끊겼다.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청연 가려고 하는데 괜찮아?”
문도는 단정한 베이지색의 코트를 입고 있는 선우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만나자고 할까, 무엇을 먹을까 생각 끝에 고른 장소였다.
일전에 선우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도 났고, 이선우와 가족들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했다. 프러포즈를 하기에는 소박하지만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을 했다.
“네. 괜찮아요.”
문도는 출입문으로 향하며 선우를 안쪽으로 에스코트했다. 나란히 걸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직원이 문도를 보고 바로 안쪽의 룸으로 안내를 했다. 열어 준 미닫이문 안쪽으로 들어가니 찻잔과 밑반찬이 미리 세팅이 되어 있었다.
“주문하신 음식 준비되는 대로 내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고 미닫이문을 닫으며 물러갔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남게 된 것도 어색한데, 맞은편에 앉은 문도가 선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아 더욱 눈 둘 곳이 없었다.
적막 속에서 선우가 괜스레 찻잔을 만지작거리니 문도가 주전자를 들어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졸졸졸, 향이 좋은 차가 찻잔에 담기며 따끈한 김이 올라왔다. 선우는 재스민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짜장면이랑 탕수육 시켰는데,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주문해.”
산책로가 있는 커다란 정원을 보고 있는 선우에게 문도가 말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게 좋아요.”
다시 대화가 끊겼다. 문도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선우를 본다. 살짝 스친 시선에도 숨이 막혀 왔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선우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정원을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만이 느껴질 뿐이다.
이러다 먹기도 전에 체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을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음식이 테이블에 놓이고 서빙 그릇도 각자의 앞에 놓였다.
“먹어 봐.”
“네, 잘 먹겠습니다. 전무님도 드세요.”
그 말에 문도가 탕수육을 덜어 주다 말고 선우를 보았다. 젓가락을 들고 있는 선우를 보며 묻는다.
“내가 어려워?”
“네?”
“낮추지 말라고, 내가.”
거기까지 말한 다음 입술을 씹으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선우는 괜히 잘못한 느낌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너한테 나는 어떤 사람이야?”
그건…….
선우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서문도는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따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가슴을 터질 것처럼 만드는, 목 끝까지 차오른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전무님은, 전무님이시고.”
거기에서 문도의 눈썹이 약하게 꿈틀거렸다.
“또……. 집 주인이시고.”
한 번 더 꿈틀.
“튼튼이 아빠……이기도 하고요.”
다시 꿈틀.
“그게 다야?”
애써 뭔가를 참는 표정으로 문도가 물었다. 그게 다는 아니다. 그건 사실 아주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이 하루 종일 내 마음을 흔들고 있다고, 그래서 순간순간 멀리 도망을 치고 싶을 때가 있다고 어떻게 말을 할까.
선우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문도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지 타이도 아래로 살짝 내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뚫어져라 선우를 본다. 시선을 돌리고 싶어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눈빛이었다.
“마음에 안 드네.”
툭 내뱉는 말에 선우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말았다. 저녁 사 준다더니 짜장면을 비비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돼선.”
하……. 문도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굳어 있는 선우를 보니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다. 좋은 분위기에서 제대로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는데 뭐가 이렇게 잘 안 되는 건지.
살면서 쉽지 않은 일은 많았었다. 치열한 협상이 오가는 자리에도 있어 봤고, 결정 하나에 수천억이 오갔던 적도 많았다. 머리가 쭈뼛 서는 악재도 수없이 겪어 보았지만 스스로가 뜻대로 컨트롤 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오직 이선우 앞에서만 이렇게 엉망이다.
이 망친 분위기를 어찌 회복하나. 문도가 입술만 씹는데 선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전무님은 제게 너무 고마운 분이세요.”
눈을 드니 선우가 긴장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민우 일, 예전부터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그러실 필요까지 없었다는 거 알아요. 저를 위해서 해 주신 거 이젠 알아요. 그래서…… 감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꼭 이러지.
문도는 단정히 앉아 있는 선우를 보았다. 너는 어설프기 짝이 없으면서 어느 순간 의지가 굳은 눈을 하고서 나를 똑바로 봐. 나는 수십 번을 넘어지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네가 너무 좋았어.
“고맙다는 말, 별로야.”
분위기 있는 프러포즈는 틀려먹었다. 문도는 매너 있는 멋진 남자가 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런 새끼도 아니었거니와, 이선우 앞에서는 늘 어딘가 제어장치가 고장 나는 기분이어서.
“전무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듣기 싫어.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 밀어내는 거 같아서 기분 더럽고.”
문도는 준비해 두었던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별것 아닌 일이라 생각해 왔다. 적당한 자리에서 적당한 말로 적당히 웃으며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의 아이까지 가진 선우였고, 화해도 했으니까 결혼하자는 말이 쉽게 나올 줄 알았는데, 붉은색의 케이스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순간 마음이 팽팽해진다.
“시간이 없어서 이것밖에 준비를 못 했어. 더 큰 걸로 사고 싶었는데, 그건 주문하면 너무 오래 걸려서. 내년에 더 크고 좋은 걸로 사 줄 테니까.”
5캐럿이 넘어가면 특별 주문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기존의 링에는 5캐럿까지가 최대라고. 링부터 시작해서 개인 맞춤 제작을 하려면 훨씬 오래 걸린다고.
문도는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선우의 앞에서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작은 다이아를 촘촘하게 두른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 반지가 불빛 아래서 반짝였다. 선우가 당황한 눈으로 반지를 보았다.
문도의 눈에 식탁 위에서 식어 가는 짜장면이 보였다. 아직 한 점도 먹지 못한 탕수육도 보이고. 가족들과의 추억 어린 장소라고 골라 놓고는 그럴싸한 멘트 한마디를 못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지지만.
“결혼해 줘. 네 옆자리를 내게 줘. 평생 너와 함께할 수 있게 해 줘.”
선우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뭐라 답을 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문도를 보고 있었다. 문도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선우야, 나는 네가 나를 당연하게 여겼으면 좋겠어.”
같이 있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퇴근을 하면 당연히 안아 볼 수 있는 사이. 한 침대를 쓰는 게 당연한 사이. 입맞춤이 특별하지 않은 사이. 서로가 서로를 갖는 게 너무나 당연해서 떨어지는 게 이상한 그런 사이.
문도의 말을 마지막으로 룸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직도 당황한 것 같은 선우가 반지를 보고, 문도를 보고, 다시 반지를 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떴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또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 이러다 가슴이 터져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때 선우가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까지 너무 숨 가쁘게 와서……. 저희가 이렇게 지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얼떨떨하고……. 그래서 이제부터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선우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결혼은 조금 갑작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자신이 그리는 미래에 서문도가 있었다. 아주 당연하게.
누군가 자신의 옆자리를 채워 준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서문도였다.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었다. 문도의 옆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전무님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고 그럴 건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선우는 문도의 눈을 마주했다. 저 눈빛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게 좋았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직선으로 자신을 보는 게 좋았다. 누구와도 나눠 갖고 싶지 않았고, 언제나 자신의 모습만을 비춰 줬으면 했다.
“네. 그럴게요. 제 옆에 있어 주세요.”
선우의 말을 들은 문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는가 올려다보는 사이, 다가오더니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한 선우의 손을 당겨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는다.
네 번째 손가락이 들리고 눈부신 빛을 발하는 반지가 천천히 손가락을 통과했다. 왠지 모르게 울컥이는 마음에 선우는 고개를 떨궜다.
천천히 끼워지는 반지의 알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한다. 감당하기 버겁게 크고 눈부시게 빛이 났다. 꼭 남자의 마음 같았다.
반지가 끼워진 손을 문도가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반지는 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반쯤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너무 귀한 거였다.
“너무 커서 평소에 끼기는 힘들 것 같아요.”
선우가 작게 말하자 문도가 선우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커플링은 같이 가서 골라. 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고개를 끄덕인 선우는 커플링은 자신이 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손가락에도 자신의 마음을 남겨 놓고 싶었다. 매일 보면서 그녀의 생각을 할 수 있게.
“선우야.”
문도가 선우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가까워 차마 눈을 들 수 없었다.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조금 더 숙이는데 턱 아래에 남자의 손가락이 닿는다. 고개를 들게 만든 남자가 선우를 보며 찡그리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다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더럽게 오래 참아서, 부드럽게는 못 할 거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가 잠시 떨어졌다.
숨결이 스치는 거리에서 서로를 보는데 심장은 쿵쿵 뛰고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았다. 남자의 낮은 탄식 소리와 함께 포개어진 입술은 이내 빨려 들어가며 삼켜졌다. 아프도록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