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어페어-137화 (137/168)

137. 저녁 사 줄까

출근 준비를 마친 문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부터 고소한 버터 냄새와 함께 따뜻한 수프 냄새가 풍겨 왔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일찍 내려오시네요.”

샐러드를 식탁으로 옮기던 장 여사가 문도를 보고 먼저 알은체를 했다. 그 말에 선우가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전무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극적인 화해를 한 지 열흘이 넘게 지났는데 왜 아직까지 전무님인 건지. 아이를 낳고도 전무님, 전무님 할 건지. 태어난 애가 아빠라는 말 대신 전무님이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그딴 호칭으로 불러 놓고 뭘 그렇게 예쁘게 웃는 건지.

이선우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목 끝에 걸려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았지만 문도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꿀꺽 삼켰다.

“좋은 아침입니다.”

식탁에 앉자 장 여사와 음식을 나르던 선우가 문도에게 물었다.

“전무님, 커피 내려 드릴까요?”

고개를 끄덕이니 선우가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무선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고, 뒤를 이어 향긋한 커피 냄새가 다이닝룸까지 흘러왔다.

“여기요.”

가까이 다가온 선우가 그의 앞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문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선우가 물러난 뒤에 얕게 뱉었다. 그랬는데도 선우가 남겨 놓은 잔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은 뭐 할 거야?”

머그잔을 들어 커피 한 모금을 넘기며 일부러 태연하게 물어보았다. 문도의 앞자리에 앉은 선우가 머그잔에 담겨 있던 티백을 꺼내며 답을 했다.

“오전에는 교수님 잠깐 만나 뵐 거고요, 오후에는 이모 병원 오시는 날이라고 해서 차 한잔 같이 마시려고요.”

이선우는 주말에 세종에 다녀왔다. 대학원 갈 준비도 할 생각이란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듣는 게 좋은 날이 있었다. 며칠 전까지는 분명 그랬었다.

선우가 국화꽃 냄새가 물씬 풍기는 티백을 작은 그릇 위에 꺼내 놓았다. 카모마일이다. 카페인이 없다며 2층에 들고 올라왔던, 그리하여 그에게는 야릇한 기억으로 각인이 되어 버린 차. 왜 저걸 아침부터 마시나.

“샐러드는 선우 씨가 만들었어요. 한번 잡숴 봐요. 전 이만 건너갑니다.”

눈을 좁혀 카모마일 차를 바라보고 있는데 장 여사가 티타월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우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다.

문도는 풀 몇 쪼가리에 조각난 과일과 소스가 올라간 샐러드를 쳐다보았다. 이걸 요리라 부를 수 있을까 잠시 고민은 되었지만 어쨌든 메뉴 중 하나이니 요리겠지.

문도는 포크를 들어 풀과 과일소스를 한 번에 찍었다. 입에 넣고 씹는데 선우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눈 둘 곳을 몰라서 숟가락만 움켜쥐고 있는 선우를 보는데, 덩달아 열이 오른다. 샐러드가 원래 이렇게 더운 음식이었던가 싶다.

“맛있네.”

문도의 말에 선우는 목까지 붉어졌다. 저 목에 입술을 대었던 적이 전생인가 싶을 정도로 멀었다. 순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나는 하얀 목덜미를 보다가 문도는 젠장, 속으로 소리를 삼키며 휙 눈을 돌렸다.

빌어먹을 반지는 대체 언제 오는 건지.

사이즈 때문에 본사로 주문을 넣어야 해서 아무리 빨리해도 시간이 걸린단다. 제대로 된 프러포즈부터 하고 천천히 시작을 하려 했는데 매일이 고문이었다.

“저는……. 과일만 잘랐어요. 소스만 섞고.”

선우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샐러드용 야채들은 전부 통에 손질되어 있었다. 인터넷에 나온 레시피대로 소스를 섞은 뒤, 장 여사가 깨끗이 씻어 놓은 청포도와 딸기를 조각으로 자른 게 선우가 한 일이었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니 더 민망했다. 장 여사님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화끈거리는 얼굴을 뺨으로 누르는데 문도가 일어서며 재킷을 들었다.

“이만 출근할게. 잘 먹었어.”

일어서는 남자의 뒤로 깨끗하게 비워진 샐러드 접시가 보였다. 그게 뭐라고 마음이 일렁이는 건지. 선우는 덤덤한 인사를 전하며 나가는 문도의 등을 보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 * *

“잘 먹으니까 좋다. 선우야, 이것도 먹어 봐. 맛있다.”

미숙이 선우의 앞에 케이크를 밀어 주며 말했다.

“네. 이모도 드세요.”

선우가 웃으며 답을 하자 미숙이 물끄러미 선우를 보았다. 바라보는 눈망울 속에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보여 선우는 가만히 웃었다.

지난 주말, 새해 인사를 겸해서 세종에 내려갔다 왔었다. 제주도가 아닌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고, 거짓말을 해서 죄송하다고도 했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은 마시라고.

“계속 서울에 있을 거니? 세종 집은 정리를 해야 할까?”

미숙의 말에 선우는 마시고 있던 꿀차를 가만히 손으로 쥐었다. 옆에 있어만 달라고 했던 남자의 말이 기억난다. 너만 있으면 된다는 말도.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그 뒤로 이렇다 할 이야기 없이 담백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처음엔 얼굴을 보기가 힘들고 어색하더니 이제는 조용한 일상에 차차 적응이 되어 가고 있었다.

먼저 인사를 하는 것도,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하는 것도 전처럼 어색하지는 않았다. 차분히 이야기를 건네는 서문도가 조금씩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문득 한 번씩 떠오를 때가 있지만 아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잠잠해진 일상이었다. 아주 작은 돌이라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실은 말이야.”

말을 꺼낸 미숙이 창문 너머 도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서문도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왔었어.”

선우는 반짝 고개를 들었다. 미숙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한번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너 제주도 간다고 하고 떠난 며칠 뒤에 그이가 우리 집에 와서 실은 네가 서울에 있다는 거야.”

미숙은 크게 눈을 뜨고 있는 선우를 보았다. 제주도에 간다고 했던 선우가 며칠간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찾아왔었다.

커다란 꽃바구니와 한우를 든 서문도가 뻔뻔히도 집에 들어와 미숙에게 말했다.

‘선우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애를 말도 없이 데려가 놓고 뭘 그렇게 당당히 말을 하는지 어이없어 싸늘히 쳐다보고만 있는데, 그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서문도가 말했었다.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입니다.’

아이까지 가진 선우와 결혼할 생각이라는 말도 아닌, 그저 데리고만 있겠다는 미덥지 않은 말을 하는데도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 사람은 선우를 절대 놓지 않겠구나, 그 생각만 들었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만한 꽃바구니랑 한우 선물 세트를 주고 가더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왔다 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었다. 선우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내가 왜 이런 걸 받냐고 도로 가져가라 그랬거든. 내가 네 엄마도 아닌데 이런 걸 왜 나한테 주냐고 그랬더니, 다녀왔다고 하더라. 거기다 뭘 두면 네가 알 것 같아서 인사만 먼저 드렸다고.”

선우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실은 그때 미숙은 서문도라는 남자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 선우 모르게 납골당에 먼저 다녀올 정도라면, 조금은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이모는 너만 행복하면 돼. 너만 잘 살면, 그러면 돼. 그러니까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내려와. 뻥 차고 내려와서 이모랑 살아.”

믿는 건 믿는 거고, 해야 할 말은 해야지. 미숙은 선우의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세간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선우의 조건들이 훨씬 기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미숙에게 선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카였다. 서도 그룹이고 뭐고 선우에게 댈 게 아니었다.

“네가 뭐가 부족하니. 요즘은 애 낳고도 얼마든지 새 사람 만날 수 있어. 그런 거 흠도 아니야. 그 사람이 아주 조금이라도 널 아프게 하면, 정말 손톱만큼이라도 아프게 하면, 뻥 차고서 내려와 버려. 이모가 빗자루 들고 쫓아내 줄게.”

미숙이 마지막 말을 하며 빨대를 휘둘렀다. 자신을 위해 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면 꼭 내려갈게요.”

선우의 대답에 미숙이 꼭, 이라며 손을 단단히 잡았다. 선우는 지금 이 시간들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바랐다. 아픔도 슬픔도 없는 잔잔한 물결 같은 날들이 이대로 이어지기를.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전화가 온 건 미숙을 터미널에 내려 주고 집으로 돌아와 막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였다. 액정에는 서문도 전무님, 여섯 글자가 떠 있었다. 선우는 시동도 끄지 못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네, 전무님.”

— 저녁 사 줄까?

앞뒤 다 떼고 대뜸 물어오는 질문에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 약속 있어?

“아, 아니요. 저는 시간 괜찮아요.”

— 6시에 차 보낼 테니까 나와.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선우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언젠가 남자가 보내온 차를 타고 데이트를 갔던 기억이 났다.

청연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덜 갈린 얼음이 씹혔던 팥빙수도 먹었던 날.

그런 날들을 되짚어 생각을 해 보면 목 끝까지 물이 찰랑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넘칠 것 같은 어떤 감정이 테두리의 끝까지 차오르는 느낌.

술에 잔뜩 취해 가지 말라고 했던 밤. 세종까지 걸어서 왔다고 농담을 했던 날.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했던 날.

돌아보면 그녀가 속인 것을 알고 있었을 때였다. 좋아한다는 그녀의 고백이 사실은 전부 거짓인 것을 알고 있었던 때, 남자는 선우를 힘껏 안았었다.

후우.

선우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그러다 이마를 짚으며 조금 곤란한 듯이 웃었다. 잔잔한 물결 같은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정작 그러지 못하는 건 이선우였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남자를 대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많이 어려운 일일 것만 같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마음이 너무 많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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