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시작은 좀 이상했지만
눈을 떴을 때 선우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동이 트는 시간인지 방에는 뿌옇게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새벽의 고요한 공기 속에서 문도는 선우를 오래 바라보았다.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여린 이선우의 얼굴을 하나씩 눈으로 쓸어 보았다.
동그란 이마. 부어 있는 눈. 길게 내려온 속눈썹. 예쁘게 뻗은 자그마한 코와 선홍색의 입술.
밤사이 선우는 여러 번 다시 울었다. 기진맥진한 몸을 침대에 누이면서도 울었고,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줄 때도 울었다.
눈이 마주치면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억지로 눈을 감겼다. 눈을 감고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던 선우는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문도는 그 옆에 누워 잠이 든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렇게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던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왔다.
문도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두 뼘 정도 열려 있는 커튼을 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는데 주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뭔 딸기를 이렇게 많이 사 왔대? 이걸 누가 다 먹는다고.”
장 여사가 한숨을 쉬며 냉장고 안을 보고 있었다.
“이선우도 먹고, 나도 먹고. 어머니랑 여사님도 드시고.”
“깜짝이야.”
문도의 목소리에 장 여사가 화들짝 놀라 뒤를 보며 말했다.
“전무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장 여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도를 보았다.
“나올 만하니까 나오죠.”
“선우 씨는요?”
“잠들었어요.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마세요.”
흐음. 장 여사가 문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도는 별다른 말 없이 커피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뜨겁고 진한 커피를 한잔해야겠다. 폭풍 같은 밤이 지났어도 출근은 해야 하니까.
“전무님부터 드셔야겠네.”
장 여사가 깨끗이 씻은 딸기를 문도의 앞에 놓아주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문도는 딸기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어제 딸기 몇 알 씻어 주고서 청혼을 했는데.”
장 여사가 잉? 하는 표정으로 문도를 돌아보았다.
“뭘 했다고요?”
“청혼을 했다고요.”
“뭘, 줬다고요?”
“딸기.”
뻔뻔한 문도의 대답에 장 여사의 눈썹이 기묘하게 찌그러졌다. 내 손으로 키운 놈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라는 의문을 담은 표정이었다.
“딸기, 이거, 딸기만 달랑 주고서?”
“그래서 그런지 까였어요.”
허, 장 여사가 기막히다는 듯 한숨을 토했다. 싱긋 웃은 문도는 빨간 딸기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품종은 알 수 없었지만 달콤하고 상큼했다.
“아니, 딸기만 한 다이아를 줘도 까일 판에. 무슨 배짱으로 딸기만 줬대.”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네.”
맞는 말만 하는 장 여사라는 생각을 하며 문도는 남은 딸기를 입에 넣었다. 장 여사가 조금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문도를 보았다.
“이게 다 여사님 때문이야.”
“뭐가요.”
“여사님이 날 이렇게 키워서, 이선우만 고생했잖아요.”
어이없어하는 장 여사에게 빙그레 웃어 준 뒤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할게요. 선우 일어나면 잘 좀 챙겨 줘요. 어제 많이 울었거든.”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냐는 눈빛을 보내는 장 여사를 뒤로하고 문도는 2층으로 향했다. 거실의 창으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
* * *
선우는 코트를 입고 소파에 앉았다. 핸드백을 옆에 두고 핸드폰을 꺼냈다.
[4시까지 갈게. 기다리고 있어.]
서문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늘은 병원 예약일. 대성통곡을 하고 난 이후로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는데, 피할 수 없는 날이 와 버렸다.
후.
핸드폰의 시간은 이제 3시 50분. 어색한 마음에 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둘이서 차를 타고 병원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했다.
이걸 무슨 마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날 이후로 서문도를 대하기가 힘들어졌다. 미안하고, 어색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병원에서 만나자고 할걸 그랬나.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이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과 정반대였단다. 그녀를 속인 것도, 거짓말을 한 것도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고. 입장이 반대로 뒤집힌 가운데에서도 남자는 담담하기만 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문도는 아침마다 같이 식사를 할 때면 한 번씩 이야기를 건네어 왔다. 늦은 저녁, 퇴근을 해서 잠깐 방에 들러 간식거리를 놓아두었다. 물어보는 말들에 어색하게 답을 하면 피식 웃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그날 서문도의 붉었던 눈시울이 진짜였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흔들림 없이 담담히 생활을 하는 남자는 전과 같아서 그 밤의 일은 감쪽같이 없어진 것만 같았다.
[주차장]
핸드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왔다. 짧은 세 글자에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털고 핸드백을 들었다. 후우, 깊게 숨을 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타.”
서문도는 새 차 앞에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키를 받았지만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던 차였다. 조수석 문을 열어 준 문도가 보닛을 돌아 늘 타 왔던 차를 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묵직하게 굴러가는 SUV는 금세 도로로 진입했다. 병원까지는 30분 남짓이 걸린다. 도로의 소음이 차단된 차 안에 부드러운 침묵이 흘렀다.
숨이라도 크게 쉬었다가는 온통 그 소리만 들릴 것 같아 선우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가로수를 보다가 엷은 하늘색에 길게 누워 있는 구름을 바라보는데 문도가 말을 걸어왔다.
“점심은 맛있는 거 먹었어?”
“아……. 네. 샌드위치 먹었어요.”
삶은 계란을 마요네즈에 으깬 에그 샌드위치를 해 먹었다. 입덧이 줄어든 이후에 뜨개질 말고도 간단한 요리를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나중에라도 아이의 이유식은 만들 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정적이 흘렀다. 반짝이는 강물 위를 달리는 동안 선우는 핸드백을 움켜쥐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요리 배운다며.”
어색해서 힘든 건 선우 혼자였는지 대교를 다 건너갈 때쯤 문도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네. 나중에…….”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였다.
“나중에?”
“나중에 아이 이유식 해 주려고요.”
미움과 원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마음이 남았다. 일단은 그냥 지내보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선우는 스쳐 가는 풍경을 보며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 * *
“이선우 산모님. 3번 진료실 앞에서 대기해 주세요.”
간호사의 안내에 선우는 3번 진료실 앞으로 향했다. 대기석에는 앞 순번의 산모와 남편들이 조르륵 앉아 있었다.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자, 말없이 뒤를 따르던 문도가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전에 말이야.”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묵묵히 앉아 있던 문도가 입을 열었다. 선우는 고개를 들어 문도를 보았다.
“살면서 누굴 부러워해 본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저 사람들이 부러웠었어.”
선우는 문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문도가 바라보는 곳에는 자리에 앉은 부부들이 있었다. 배가 부른 아내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남편.
“이선우는 내가 옆에만 앉아도 피하는데, 우리 사이에는 떨렁 태어나지도 않은 애 하나만 있는데, 저 사람들은 결혼을 했겠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그러겠지. 뭐 그런 생각들이 들어서.”
복도에는 이런저런 소리들이 많이 들렸는데, 선우의 귀에는 문도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아이 지우라고 해서 미안해.”
어……. 선우는 멍하니 문도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기뻤어. 네가 내 아이를 가져서.”
선우는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진심 아니었던 거 알았으니까.”
“아이를 이용하면 널 다시 데려올 수 있겠다 싶었지. 태어나지도 않은 내 새끼가 이렇게 효도를 하는구나 싶었고.”
문도는 피식 웃었다. 말없이 스커트만 움켜쥐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 곪은 상처들이 터졌을 때는 아이 생각까지 할 겨를이 없었는데, 여기 이렇게 와 보니 새삼 아이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이선우에게 이 아이가 간절했던 만큼, 문도 역시 그랬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물론 의도와 목적이 좀 비뚤어지긴 했지만, 그에게도 소중한 존재였다. 선우의 품에 있기에 더더욱.
“아이는 내게도 축복이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것만큼은 먼저 말해 주고 싶었다. 선우가 아이를 품고 있는 동안 그늘진 마음은 갖지 않기를 바랐기에.
“시작은 좀 이상했지만, 좋은 아빠가 될게.”
딸기만 한 다이아도 사야 하고, 제대로 청혼도 해야 해서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는 말은 아직 할 수 없었다. 병원 대기실 복도에 앉아서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눈시울이 붉어진 선우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미소를 짓고 있는 선우의 얼굴이 마음을 시큰거리게 했다. 이선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면 되는 거였는데.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정말로 쉬운 길을 두고 멀리도 돌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이선우 산모님, 들어오세요.”
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던 선우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진료실까지 가는 복도가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며 문도는 힘주어 선우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