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잘못했어
이러고 있는 나도 미친놈이지.
문도는 어둠 속에서 헛웃음을 웃었다. 그깟 진실이 뭐라고 마지막까지 움켜쥐고서 되도 않는 자존심을 부리는 건지. 기막힌 웃음이 나왔지만 삐딱해진 마음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앉아 있었다. 상처받은 마음이 빳빳하게 일어서서 도무지 눌러지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말이 너는 왜 그렇게 쉬워. 왜 매번 나만 마음을 졸여. 나는 너밖에 없는데, 왜 너는 늘 다른 게 우선이야.
진저리 나는 짝사랑이었다.
언제나 다른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여자의 등을 돌려세우고, 다시 돌려세우며 나를 좀 보아 달라고. 다른 거 말고 나를 원해 달라고. 한 번은 네게 내가 전부였으면 좋겠다고.
그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이선우에게는 아니었다. 핸드폰보다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보다도, 이제는 그 빌어먹을 거짓말보다도 아래에 있었다. 단 한 번도 이선우의 선택에 그가 우선시되지 않았다. 그게 상처가 되었다.
그때도 그랬다. 마지막 날, 마지막 밤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선우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모르는 척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있었으면 했다. 낡은 이민우의 휴대폰 대신, 단 하루만이라도 더 그의 품에 남는 걸 선택하길 바랐다.
서로를 품에 안고서 눈을 감았던 마지막 순간만큼은 망설여 주기를, 주저하기를, 단 하루만이라도 진실을 외면하고 그를 선택하길 바랐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서 그것만을 바랐다.
마지막이 될 걸 알면서 망설임 없이 자신의 품을 빠져나가는 이선우가 미웠다. 그래. 미웠다는 게 제일 정확한 말일 거다.
기어이 저걸 가지고 가겠지. 인사도 없이 영영 가겠지. 내일 다시 올 것처럼 굴어 놓고 안개처럼 흩어지겠지. 네가 좋아 죽을 것 같은 나는 씹다 버린 껌처럼 버려두고서.
처음부터 알았던 게 아니라는 말.
그 말을 하면 된다는 걸 안다. 모든 걸 뒤집겠지. 그럼에도 그 말만은 나오지 않았다.
깊이 숨을 내쉰 문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선우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다시 이야기를 해야지.
문도는 마스터룸을 나와 중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와 거실을 건넜다. 낮게 한숨을 쉬며 선우의 방문을 여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순간 불안한 마음에 불이 켜진 방을 빠르게 훑었다. 선우는 없었지만 협탁 위에는 뜨다 만 뜨개가 있었다. 읽던 책이 테이블 위에 있고 스탠드의 불빛도 켜져 있었다. 그런데도 목 뒤가 저릿거렸다.
“이선우.”
설마 하는 마음부터 들었다. 정말 나를 떠났나.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말이 진짜였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쉽게 나를, 또.
마음에 화르르 불이 붙으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도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게스트룸 옆의 드레스룸이 보였다.
손잡이를 잡는데 마음이 목 끝까지 울렁이며 차올랐다. 문도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문을 열었다. 불이 환히 켜진 방에는 문이 열린 옷장이 있었다. 엉망으로 흩어진 옷과 활짝 열린 트렁크.
그리고 이선우.
열려 있는 가방을 붙잡고 펑펑 눈물을 쏟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가려고?”
활짝 열려 있는 가방을 보는 순간 눈이 끓었다. 자존심 같은 게 무슨 소용일까 생각했던 것은 어느새 잊고서 비딱한 마음부터 튀어나왔다.
“왜 그러고 있어. 갈 거면…….”
돌아보지 말고 가라는 말을 하려 하는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숙여지지도, 그렇다고 뻗대지지도 않았다.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대체 널 붙들고 뭘 하고 있는 걸까. 그걸 알 수 없어 문가에 기대어 까맣게 죽은 눈으로 선우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선우는 울먹이며 문도를 노려보았다. 고여 든 눈물은 금세 길을 그리며 뺨으로 흘러내렸다. 눈물이 흐르고, 또다시 흘러내리는 동안 선우는 문도를 힘껏 노려보았다.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는 바보 같은 남자를.
“내가 어떻게 가요.”
가려고 했었다. 끝까지 상처만 주는 남자 따위 보란 듯이 남겨 놓고서 가려고 했었다.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당신을 두고 내가 어떻게 가.”
울음이 터진 선우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거짓이라 생각했던, 그래서 너무나 상처가 되었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진짜였다고. 심장을 욱신거리게 했던 순간들이 사실은 다 진짜였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원망을 했는데. 내가 얼마나 당신을 미워했는데.
“그냥 말해 줘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처음부터 안 거 아니었다고. 그거 다 진짜였다고, 그냥 그렇게 말해 줘.”
울고 있는 이선우가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왜 이러고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선우가 남았다는 것만, 그를 두고 가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난다.
절대 돌이키지 않으려 했다. 모두가 무엇을 잃어야 공평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때의 그 결심으로 서유라는 목숨을, 아버지는 회장 자리를 잃었다. 이선우는 서문도를, 서문도는 이선우를 잃었다.
돌아가지 않겠노라 결심하며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니 그 말만은 번복하지 않겠노라 결심을 했었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는 뿌옇게 흐려지고 마음은 곤죽이 되었다. 다 모르겠고. 이젠 그냥…….
“응.”
대답을 하는데 목이 멘 소리가 나왔다.
“거짓말이야.”
눈을 뜨고 있는데 시야가 흐렸다. 흐린 시야 속에서도 이선우는 또렷하게 보였다. 사실 나는 다 필요 없었지. 너만 있으면 됐었어.
“처음부터 알았다는 말, 그거 거짓말이었어.”
선우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문도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남자가 보였다. 이거면 되었다고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했으면서 마지막까지 무릎 꿇지 않으려는 남자가 서문도였다. 그 한끝이 남자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인정해 주었으면 되었다. 그의 마지막 한끝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거짓말을 한 걸로 해요. 솔직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다 알아 버렸는걸. 그러니 더는 묻지 않을게.
“알았어요.”
선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정말 괜찮다고 생각을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웃어야 하는데, 다 괜찮다고 말을 해 줘야 하는데.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애써 웃는 선우의 얼굴이 온통 눈물이다. 심장이 지끈거리며 아파 와 문도는 숨을 삼켰다. 이상하지. 우는 건 이선우인데 문도의 시야가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말을 못 하고 있나. 거짓말이라도 해 달라고 간절하게 말을 하는데. 그거라도 괜찮다고 웃으며 우는데. 네가 바라는 건 고작 그 정도인데, 그깟 결심이 뭐라고 나는 너를 또 울리고 있을까. 마음에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폐허가 된 자리에서 벽돌을 쌓고 또 쌓았던 미친놈이 생각난다.
그 벽은 한 번도 제대로 쌓인 적이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벽돌은 한 줄기 바람에도 허물어졌다. 새로 벽돌을 놓는 작은 손길에도 우르르 무너지곤 했었다.
이미 부서진 사랑 따위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헛짓거리일 뿐이라는 걸 알려 주는 꿈인 줄 알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진실을 가려 놓은 상태로는 아무리 공들여 쌓아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걸 그 미친놈이 보여 주고 있던 거였다.
상처만 남은 너에게 다시 시작을 하자고.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나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너를 제일 아프게 했던 말은 나의 아집으로 덮어 두고서 그걸 사랑이라고 하고 있었으니, 매번 허물어질 수밖에.
문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선우를 아프게만 하는 거짓말 따위 이제 그만 내려놓기로 한다.
“처음 호텔 갔던 날 기억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날의 일들이 선우의 머리를 스쳤다. 만둣국을 사 줬던 것. 민우에 대해 물어보았던 것. 그때의 풍경, 대낮의 호텔과 무자비했던 정사.
“그때 알았어.”
이 말이 뭐라고 그렇게 나오지 않았는지, 뱉어 놓은 지금에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 알량한 자존심의 실체가 이제야 보였다.
한 번쯤은.
한 번쯤은 선우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줬으면 했다. 이렇게 삐딱하게 굴어도, 아이를 지우라는 독한 말로 데려와 살았어도, 제일 밑바닥에 깔린 마음은 알아주었으면 했다.
사실은 너를 처음부터 속인 게 아니라는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온통 상처만 준 나쁜 놈이어도, 그래도 곁에 있어 주기를.
너에게도 내가 놓아지지 않는 무언가가 되기를. 한 번쯤은 다른 무엇이 아닌 나를 선택해 주기를. 끝끝내 고집을 꺾지 못하는 이기적인 새끼이지만, 그래도 이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만은 알아주기를.
그걸 기어이 받아 낸 지금에서야, 한 번 더 너를 울리고 난 다음에서야 인정하는 나는 정말 개새끼지만.
“잘못했어.”
문도는 울고 있는 선우에게로 걸어갔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선우의 뺨으로 천천히 팔을 뻗었다. 주르륵 흘러내린 선우의 눈물이 문도의 손등 위를 흘렀다.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이제야 깨닫는다.
전부 그의 욕심이었다. 온전히 이선우를 갖고 싶었던 욕심. 이선우가 오로지 자신만을 봐주길 바라는 욕심. 이선우의 희망이 될 수 없어 절망이 되기를 선택했던 어리석은 욕심.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선우의 눈물을 밀어내는 문도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어려웠을까. 사실은 늘, 네 눈물부터 닦아 주고 싶었는데. 널 위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는데.
“내 옆에 있어 줘.”
뭉쳐진 핏덩어리 같은 말이 울컥이며 올라왔다.
“미워해도 좋고, 싫어해도 좋으니까. 그냥……. 옆에만 있어 줘.”
사랑해 달라는 말조차 염치가 없다는 걸 안다. 위태로운 이선우를 가장 가혹하게 몰아붙였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므로.
“그거면 돼.”
문도는 떨리는 손으로 선우의 눈물을 밀어냈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그것 하나만 바라고 여기까지 왔다. 이선우에게 상처 내는 짓도 서슴지 않아 하면서. 그렇게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두 번은 못 보내. 내가…… 더는 못 하겠어.”
눈물 가득한 눈으로 문도를 보던 선우가 어엉,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문도는 울고 있는 선우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선우가 그를 밀어내며 고개를 젓는다.
“싫어……. 저리 가요. 왜 그런 말을 해서. 내가 얼마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문도의 가슴 위로 번졌다. 문도는 밀어내는 선우를 힘주어 안았다.
“싫어. 당신 같은 사람 정말……. 어흑.”
문도의 품에 안겨 선우는 한참 울었다. 그동안의 시간들이 눈물로 흘러내리며 문도의 옷깃을 적셨다.
한참을 울던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가슴 아리게 예뻤다.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선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요.”
문도의 눈시울이 꿈틀거렸다. 선우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속여서……. 정말 너무 미안해요.”
문도는 울먹이는 선우를 힘껏 안았다. 질끈 감은 눈꺼풀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선우였다. 온 힘을 다했어도 놓을 수 없었던, 밀어낼 수 없었던, 사실은 늘 이렇게 힘껏 안아 주고 싶었던, 이선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