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아무리 너라도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했는지, 얼마만큼 마음을 기댔었는지 당신은 모르는구나.
당신에게 안겼던 그 밤들이 내겐 유일한 온기였는데. 내게 남겨진 기억 중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부서져 버린 게 마음이 너무 아파.
“내가 왜 민우 핸드폰에 대해 안 물어봤는지 알아요?”
선우는 자꾸 흘러나오는 눈물을 밀어내며 말했다.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지만 가능한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다.
“여기 오기 전에 많이 속았어요. 민우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해서 만나 보면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한번 만나 보자는 남자들도 있었어요. 통장에 있는 돈이 바닥날 때까지 속는 줄 알면서 또 속았어요. 만나 주면 말해 주려나, 별것도 아닌데 한번 만나 줄걸 그랬나. 그 생각을 했던 날도 많았어요.”
혼자 버텨 냈어야 했던 숱한 밤이 있었다. 진실 따위 알아내려 버둥거리지 말고 그냥 살까. 경찰이 말한 대로 그대로 믿으며 그냥 살아 버릴까.
더 깊이 파고들지 말고 이젠 그냥 세상이 내린 민우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던 날도 많았다.
그래도 마지막 한 발자국만 더 가 보자고 생각했었다.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두자고.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은정에게 부탁해서 지원서를 넣었다.
“여기까지 왔을 때 나는 이미 만신창이여서. 그래서.”
서문도의 눈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눈물은 흘리고 있지 않지만 마치 우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당신에게만큼은, 절대로…….”
기대하고 싶지 않았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애틋했던 마음 그대로이길 바랐다. 자신을 웃으며 보았던 다정한 눈동자가 진심이기를 바랐었다.
“속고 싶지 않았어요.”
눈물은 아프게 삼켜졌다. 제일 아프게 할 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 옆에서 마음을 녹였다. 함께할 시간이 닳아 가는 게 아까워 밤마다 2층에 올라갔었다.
그거 알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고 아파. 얼굴만 마주해도 그래.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그래.
내게 그렇게 못되게 군 남자인데도, 나를 바닥까지 떨어트려 버린 남자인데도. 나는 당신 마음이 거짓이었다는 것에만 화가 너무 나. 이런 내가 너무 싫어.
“이런 제게 결혼을 하자고요. 저를 좋아한다고요. 아니요. 전무님.”
이제는 그만 끝을 내고 싶었다. 선우는 눈물을 훔쳐 내고 말했다.
“전무님은 저를 좋아한 게 아니라 그냥 속여 먹기 좋았던 여자가 재밌었던 거예요. 가지고 노는 게 재밌다가 어느 날엔 불쌍했을 수도, 그러다 좋아졌을 수도 있겠죠.”
그래. 그 정도였겠지. 위에서 내려다보며 재밌어하다가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 내가 당신을 속이면서도 좋아했던 것처럼, 당신도 나를 가지고 놀다가 좋아했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전무님이 좋아했던 여자는 이선우가 아니에요. 전부 거짓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여자를,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해요.”
자신에 대한 마음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때 그 눈 속에서의 입맞춤은 무슨 의미였을까. 정말 나를 속인 게 맞을까. 내내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었던 의문 역시 내려놓고 싶었다.
선우는 세종에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더 머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더는 이 남자를 견딜 수 없었다.
“장 여사님 오시는 대로 저는 세종으로 내려갈게요. 아이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상의를 해 보자는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그때까지 말없이 선우를 바라보던 문도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지고 논 게 아니라면.”
무슨 말인지. 선우는 미간을 좁히며 문도를 보았다.
“내가 가지고 논 게 아니라면. 등신처럼 속는 줄도 모르고 속았던 거라면.”
그게 무슨…….
“온통 거짓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같은 여자라도 좋다고 껴안고 있었던 거라면. 진짜 네가 아닌 허상인 줄 알면서도 놓지 못해서 그랬던 거라면. 그럼 내 마음은 진심이 될까?”
선우는 가늘게 뜬 눈으로 문도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남자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림자를 좋아했던 거라고.”
문도는 자조적인 웃음을 피식 흘리며 말했다.
“아무리 너라도. 선우야, 내 마음을 함부로 말하지 마.”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한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등을 돌린 문도가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선우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쾅, 하고 2층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선우는 움찔 몸을 떨었다.
생각을 가다듬어 보고 싶은데 머리가 뿌옇게 흐렸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슴이 이상하게 아파 왔다.
천천히 다시.
다시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식탁 의자에 앉으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딸기가 보였다.
하얀 접시 위에 빨갛게 익은 딸기가 여섯 알이다. 하나는 먹다가 남은 커다란 딸기였고, 나머지는 손도 대지 않아 싱싱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다섯 개의 각기 다른 품종의 딸기였다.
‘제일 큰 게 킹스베리고, 품종이 다 다른데. 나머진 기억 안 나.’
딸기밭을 훔쳐 온 것처럼 딸기를 들고 왔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며 눈가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그때 네 동생을 그렇게 두고 와서.’
아니야.
‘그것 때문에 네가 여기까지 와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도, 미안하게 생각해.’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나랑 있어.’
아니야. 아니어야 해. 어떻게…….
‘네가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말도 안 되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속인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게 나쁘게 군 거였잖아. 민우 핸드폰을 일부러 숨겨 놓고서 가차 없이 버렸잖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내 옆에 있고 싶다고 한 번 더 말해 봐. 혹시 알아? 내가 전부 다 넘겨줄지.’
마지막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나는 순간 명치끝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뿌옇게 차오르는 눈물 사이로 어느 여름밤,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렇게 예뻐?’
눈물이 툭, 발등 위로 떨어졌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당신이 다 거짓말한 거지.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확인을 해야 했다.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 전부 속인 거라는 확인을.
계단을 빠르게 올라간 선우는 커다란 중문 앞에 섰다. 황동색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힘껏 밀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려 있는 마스터룸의 문을 밀자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늘진 눈과 마주치는 순간 눈가가 시큰거리며 눈물이 다시 고여 들었다.
“내가 민우 누나인 거, 처음부터 알았던 거 맞죠?”
문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가 흐렸다. 선우는 남자를 똑바로 보려 애쓰며 말했다.
“처음부터라고, 그랬잖아. 당신이 그날, 나한테 그랬잖아. 처음부터 알았다고…….”
이상한 게 너무 많았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었다.
순간순간마다 왜 그렇게 가슴 저린 눈으로 봤을까. 왜 수시로 입을 맞추었을까. 왜 한 번씩 알 수 없는 눈으로 이상한 말을 했을까.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렇지. 정말 그런 짓까지 계획적으로 했을까. 그렇게 나쁜 사람이 왜 민우의 일은 전부 다 밝혔을까. 마치 들으라는 것처럼 유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까.
“언제부터 알았어요? 내가 민우 누나인 거, 당신 언제부터 알았어?”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선우는 한 발 다가가며 물었다.
“말하면, 뭐가 달라져?”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선우는 울컥 흘러나온 눈물을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말해요, 빨리.”
그늘이 깊게 드리워진 눈으로 그녀를 볼 뿐, 서문도는 입을 딱 닫고 있었다.
“말해. 처음부터였다고. 나 속인 거라고, 빨리 말해요.”
이제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남자가 인정했으면 한다. 진심인 적 없었다고. 네가 짐작하는 게 틀렸다고. 널 처음부터 갖고 놀았던 거라고.
당신 그런 사람이었잖아. 그런 사람이라고 내게 말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날 쫓아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맞아. 처음부터야. 처음부터 알아서 작정하고 지켜봤어. 재밌어서 가지고 놀았고, 더는 흥미 없어져서 버렸어. 이제 됐어?”
차갑게 말하는 남자를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서 한 발 더 앞으로 걸었다. 다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우두커니 앉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에 번져 보이는 남자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 알았어요?”
선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했잖아. 처음부터라고.”
단조롭게 말하는 목소리에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요. 언제부터 알았어요?”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동자에 억눌린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끝끝내 답을 하지 않으려고 입을 닫고 있는 남자를 보는데 장 여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성격이 원래 청개구리야. 하지 말라면 더 하는데, 내버려 두면 알아서 수그러들어요.’
알고 싶지 않은데, 저절로 알아졌다. 전부 내가 먼저였어. 당신은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깨닫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처음부터라고요. 그게 정말인 거죠. 두 번은 묻지 않을 거예요. 그게 정말이면 나는, 당신 다시는 안 볼 거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며 선우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물어요. 언제부터 알았어요?”
남자의 눈동자가 무감하게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그녀를 보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라고 했어.”
하. 선우의 입에서 울음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남자를 알 것 같다. 한 번 아니라 한 건 끝끝내 아닌 거지. 인정 같은 거 못 하는 거지. 그래, 그렇다면 나도 그래.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이제 우린 다시 볼 일 없어요.”
선우는 그 말을 끝으로 마스터룸을 나왔다. 눈물은 바보처럼 자꾸만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