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알았잖아
“나는.”
무언가를 삼켜 내려는 듯 문도의 목울대가 느리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나는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돌아보면 온통 끊어 내려 애썼던 기억뿐이다. 흩어지는 안개 같은 춤을 본 이후로 늘 그랬다.
공연장에 있어야 하실 분이 왜 여기 있느냐 후려치고, 차를 들고 올라오는 여자를 비웃었다. 마음이 깊어지겠다 싶을 땐 올라오지 말라 하며 멀리했고,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는 해고까지 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선우의 눈에는 어찌 보일지 알고 있지만, 그러니 이런 말 따위 말도 안 되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라고 쉬웠던 건 아니야. 몇 번이나 그만두려 할 때마다, 네가.”
하아. 선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만두려 했던 거라고요? 그럼 다시 시작하자고 하지 말았어야죠! 내가 아무리 매달려도 미안하지만 넌 그냥 해고라고!”
“그때 네가 전화해서 좋아한다는 말만 안 했어도!”
마음이 솟구치는 순간 문도는 숨을 끊어 쉬었다. 울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이를 물고 말했다.
“나는 안 돌아왔어. 좋아한다고, 바라는 거 아무것도 없다고, 옆에 있게만 해 달라고 매달린 건 너야.”
“내가 매달릴 거 당신은 알았잖아!”
선우는 그런 문도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이었다. 절실한 거 알았으면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절실함을 이용해 사랑을 말하게 한 것.
“내가 그만둘 수 없는 거 알았잖아! 내가, 어떻게든 그거 하나 바라보고 있는 거 다 알았잖아. 매달릴 거, 당신은 알았잖아! 왜 다시 시작했어요?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잔인했어요? 왜, 내가 당신을!”
울컥 심장이 터지며 피가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찢어질 듯 아픈 심장을 손으로 눌렀다.
“그냥 가지고만 놀지. 즐기고 말지. 왜 내게 다정했어요? 왜 진심인 것처럼 굴어서, 그 마음에 깜빡 속게 했어? 왜 내 진심까지 가져가서 그렇게 무참하게 찢어 놨어요?”
알알이 맺혀 있던 마음들이 터져 나왔다.
“서유라가 죽었고, 민우의 일이 밝혀지는데, 나는 당신 생각을 했어요. 그게 다 거짓이었나. 정말 내가 그렇게 잘못을 했나. 왜 내게 다정했을까. 왜 나를 버렸을까. 내가 정말 그렇게 잘못을 했나. 왜…….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만들었어?”
생각하면 마음이 뒤집히는 이유였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민우의 일이 밝혀지는데 왜 자꾸 당신 생각을 할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만둘 수 있었잖아. 당신은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었잖아! 어느 정도 가지고 놀았으면 버려도 됐잖아! 대체 왜 내게 다시 시작하자고 했어!”
“그땐 이미 병신처럼 널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네 전화 한 통에 흔들릴 만큼. 그만큼!”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와 문도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선우가 기막혀하며 웃었다. 눈물을 흘리며 허무하게 웃는다.
“좋아했다고요. 그래서 돌아왔다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그래.”
문도는 꽉 누른 목소리로 답했다. 그 이유가 아니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선우가 매달렸다. 고작 전화 한 통이었는데 뿌리칠 수 없었다. 이미 눈깔이 돌아서 환장하게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네가 좋다고 분명히 말했어.”
그 밤의 기억이 생생했다. 죽어도 무릎 꿇고 싶지 않았던 그 감정 앞에 처음으로 솔직했던 날이다.
뜨겁고 좁았던 이선우의 안에 몸을 묻고서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었다. 네가 좋다고. 그때 이선우가 흘렸던 눈물의 방향까지도 정확하게 기억을 한다.
“아니. 정말 좋아했으면 거기서 멈추라고 했을 거예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말을 했을 거야. 그래서 잘랐던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널 생각할 여유 따위가 어디 있어!”
결국 문도는 욕설을 씹어 뱉었다.
“아슬아슬하게 떼어 내면 매달리고, 다시 떼어 내면 매달리는데! 환장하게 예쁜 네가 나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곁에만 있고 싶다는데! 어떤 병신이 거기서 그만하자고 해!”
“그래서, 밤마다 좋아한다고 말하라고 했어요? 보고 싶었다고 말하라고 했어? 그 말 들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좋았어요?”
울음에 젖은 선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온통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좋았어! 네가 좋아 미치겠어서 말하라 했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듣고 또 듣고 싶어서 그랬어!”
그때는 이선우가 누구였는지 몰랐어도 듣고 싶었다. 이선우가 누군지 알게 된 이후에는 그거라도 듣고 싶었다. 어차피 전부 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네가 누군지 알았어도 나는! 나를 좋아한다는 네 말이 다 거짓인 걸 알았어도!”
씨발. 문도는 욕을 삼켰다. 누군들 시작하고 싶어서 시작한 줄 아나. 빠지고 싶지 않았던 감정에 빠져든 건 이선우가 아니라 서문도였다.
이 등신 같은 새끼는 이선우가 누군지 알면서도 말하라고 했었다. 거짓된 고백이라도 듣고 싶어서. 그거라도 들어야 살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내가 그날 뭘 했는지 알아요? 마트에 가서 박스를 가져왔어. 당신이 온다고 해서 민우 방 치우려고. 들키면 안 되니까, 우리 민우가 쓰던 물건을 라면 박스에 담아서 창고에 넣었어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선우가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 밤에 내가 당신한테 뭐랬는 줄 알아? 많이 기다렸다고. 좋아한다고. 당신 목에 매달려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피 같은 내 동생은 박스에 넣어 두고서!”
붉게 달아오른 선우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핏물처럼 보였다.
너는 매일 피를 흘리는 마음으로 살았겠지. 나도 같았다면 이해를 할까. 매일 마음이 뜯기는 기분으로 살았던 나를 너는 알기나 할까.
“그렇게 피 같은 동생이라면! 죽고 못 사는 동생이라면! 너야말로 왜 내게 말을 안 했지? 그 긴 시간 내 밑에서 좋아한다고 헐떡일 시간에 찾아와서 물어봤어야지! 내 동생 아냐고, 내가 이민우 누나라고, 핸드폰 가지고 있냐고 한 번이라도 물어봤어야지!”
어쩌면 기다렸던 것도 같다. 이선우가 먼저 말을 꺼내 주기를. 자신이 못 견디게 이선우를 좋아하고 있을 때, 그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 주기를.
눈물을 흘리며 물어봤더라면, 아니, 눈물까지도 필요 없었다. 사실은 내가 이민우라는 남자애 누나인데, 이러이러한 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만 해 주었어도 다시 생각을 해 보았을 거였다.
그런데 너는 끝끝내 핸드폰을 가지고 도망칠 생각을 했지. 너한테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어.
“물어봤으면 당신이 들어줬을까요? 민우 핸드폰, 순순히 내줬을까?”
“아니.”
문도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선우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걸 줬으면 넌 도망을 쳤겠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부터 버렸겠지. 뭐 대단한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하는데, 넌 어차피 나 버릴 생각이었잖아. 아니야?”
이 웃기지도 않는 비극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언제나 너를 못 놓아서 끙끙거렸던 건 나 혼자였어. 넌 한 번도 내가 간절한 적 없었지.
“넌 날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어.”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조각조각 깨어졌다. 문도는 문득 웃음이 나와 입술을 씹었다.
언제나 기울어져 있던 마음이었다. 놓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고 애를 끓이는 동안 이선우는 단 한 번도 서문도를 우선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핸드폰을 찾은 네가 어떻게 했을지 내가 말해 줄까?”
밤마다 품을 빠져나가 서랍을 뒤지는 선우의 소리를 들을 때 생각했었다.
내가 저 서랍 안에 네 동생의 핸드폰을 넣어 두면 어떻게 될까. 너는 그걸 가지고 도망을 갈까.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끝이 날까.
“너는 나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그거 하나 들고 도둑처럼 빠져나갔겠지.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이, 그 어떤 연락도 할 생각도 없이, 평생 나를 보지 않을 생각으로, 네 그 피 같은 동생의 대단한 휴대폰을 들고서!”
짓씹듯 뱉어진 말이 진실이었다. 이선우에게 서문도는 그깟 휴대폰만도 못했다. 죽어 버린 동생, 그 동생의 휴대폰, 그다음이 서문도였다.
지금도 그랬다. 아이만 있으면 꺼져 주겠다고. 사라져 주겠다고. 영원히, 내 앞에서 사라져 주겠다고.
나는 껍데기만 남은 너라도 붙잡으려 악을 쓰는데, 너는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너는 늘 날 떠날 생각만 했잖아! 이선우한테 서문도는 차 한 잔 들고 올라와 꼬시면 넘어가 주는, 밤마다 속여 먹어도 되는, 실컷 이용만 하다가 버려도 되는 그런 병신 같은 새끼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당신을 버릴 사람이라서 그랬다고요? 핸드폰 찾으면 떠날 사람이라서 그랬다고요? 내 동생은 억울하게 죽었고, 나는 그 동생 핸드폰 찾겠다고 여기저기 부딪히고 상처가 났는데, 고작 핸드폰 가지고 떠날 사람이라서. 그래서 나를 그렇게 끝까지 밀어붙였다고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선우는 문도를 보았다. 그러다 눈썹이 일그러지도록 문도를 노려보았다.
오늘처럼 남자가 미운 날이 없었다. 밉고, 원망스럽고, 야속해서 다시금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당신은 알았잖아. 내가 왜 거길 들어갔는지 처음부터 알았잖아. 그거 찾겠다고 아등바등 쫓아다니는 거 알고 있었잖아.”
욱신욱신 아파 오는 마음에 선우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눈물이 아프게 삼켜졌다.
“나는 매일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 매일 당신이 나를 밀어낼까 봐. 쫓아낼까 봐. 어느 날 갑자기 나가라고 할까 봐. 하루하루가 칼날 위에 서 있는 거 같았어.”
그런 날들 속에서도 남자를 좋아했었다. 빙그레 웃어 주는 미소에 가슴이 뛰었고, 몰래 하는 입맞춤에 발끝이 녹았다.
“그런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나쁘게 굴었던 거예요?”
이 남자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까. 눈물은 자꾸만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