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미쳤군요
이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저 미친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문도는 선우의 벙찐 표정을 바라보았다. 최악이겠지. 미친놈처럼 보일 것을 안다. 그래도 진심이다. 내내 그거 하나였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밤의 테라스에서 안개 같은 춤을 추었을 때부터, 딸기를 사 왔으니 나와서 한 입이라도 먹어 보라 억지로 앉혀 놓은 지금까지.
삶은 온통 이선우였다.
그러니 이제는 그냥 말을 해야겠다. 미친놈으로 보이든 정신 나간 놈으로 보이든 그건 이선우 사정이고. 나는 내내 너였어.
“나는 이선우 좋아한다고.”
선우의 눈살이 더 깊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이다.
“전무님이, 저를요.”
선우는 어이없어서 웃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혼을 하자는 말을 들었을 땐 황당했는데,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나니 불쾌해졌다.
“장난이 심하시네요.”
장난이어야 했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니까. 그냥 던진 못된 농담 같은 말. 이선우 황당하라고 생각 없이 하는 그런 말. 그런 거라고 여길 테다.
“딸기 잘 먹었습니다. 이만 들어갈게요.”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딴 싸구려 농담에 어울려 줄 기분이 아니었다.
“진심인데.”
일어선 선우에게 문도가 말했다. 피식 웃고 있지만 예의 그 눈빛이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직선으로 꽂혀 속까지 파고드는 눈빛. 사람 숨통을 움켜쥐는 것 같은 그 눈빛.
“아니요.”
당신은 진심이 아니야. 선우는 단호히 말했다. 그럴 수는 없는 거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일어서 있는 선우의 눈빛이 싸늘했다. 충동적으로 뱉었으나 진심이었던 문도의 마음은 심한 장난으로, 혹은 거짓으로 판명이 난다.
문도는 자신의 마음을 싸늘히 조소하는 선우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해.”
제대로 들은 건가 의심을 하며 선우가 눈을 찌푸렸다.
“그 시간을 수백 번 다시 돌려도 나는 다시 똑같이 해.”
너에게 빠져들지 않으려 기를 쓰고 버틸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빠져들겠지.
그랬기에 네 마음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에 분노할 거고, 소용돌이치는 분노 속에서도 결국은 너를 사랑할 거야.
혀끝을 맴도는 말들이 튀어나올까 봐 문도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좋게 받아 줄 거란 예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걸하듯 사랑을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미친놈인 거, 그냥 계속 미친놈이고 말지.
“원래 그런 새끼잖아. 내가.”
비틀린 그의 말에 선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싫다고 했었나?”
문도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차마 말로는 못 하고 눈으로만 욕을 하고 있는 이선우의 앞으로 성큼 걸었다. 올려다보는 선우의 눈빛에 애정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난 이미 널 좋아하고 있으니, 너만 날 좋아하면 되겠네.”
태연히 말하자 선우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게 무슨…….”
“그렇잖아. 너만 날 좋아하면 애정이 충만한 가정이 될 거 아니야.”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는 알고 있으신 거죠?”
너무 돌아 버린 이야기였는지 선우가 문도를 아픈 사람 보듯 보고 있었다.
“응.”
“저보고, 전무님을 좋아하라고요.”
“처음도 아니잖아. 나 좋아하는 거.”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선우가 문도를 보았다.
“그러니 다시 좋아해 봐. 아이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하. 선우의 입에서 기막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동자를 기꺼이 마주 보며 문도는 말했다.
“너만 날 좋아하면, 그러면 돼.”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 말인지 너는 모르겠지. 그래도 괜찮아. 미친놈 보듯 보아도 좋고, 화가 난 눈동자를 나를 노려봐도 좋아.
다 좋으니까, 내 곁에서 내 아이를 낳고 내 옆에서 나를 좋아해 줘. 네게 상처를 준 나쁜 놈이라도 사랑해 줘.
“미쳤군요.”
“지극히 정상이야.”
문도는 담담히 말했다.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선우가 뒤로 휙 돌아섰다.
울분에 찬 주먹을 꽉 쥐고 성큼성큼 걸어서 게스트룸으로 들어갔다. 이선우 없는 다이닝룸에 딸기 냄새만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 * *
방문을 닫은 선우는 들썩이며 숨을 마셨다.
나만 자기를 좋아하면 된다고? 아이를 위해 결혼을 하자고?
제정신이면 그런 말은 할 수 없는 거다. 자신을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걸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울고 매달리며 아이를 키우게만 해 달라고 부탁을 할 때 그렇게 매정히 굴었으면서, 지우라 했으면서, 이제는 결혼을 하자고.
‘나는 이선우 좋아해.’
아니. 그럴 리 없다.
좋아한다면, 이렇게 아프게 만들지는 않아야 했다. 좋아한다면, 지난 일들에 대해 사과부터 했어야 했다. 좋아한다면, 아이로 협박하고 겁을 주었던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선우는 울컥 솟아오르는 울분을 삼키려 노력했다. 아무리 삼켜 넘기려고 애를 써도 넘어가지지 않는 말이 있었다. 들었던 말을 하나하나 생각할수록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손이 떨려 왔다.
선우는 벌컥 문을 다시 열었다. 쏴아, 물소리가 들리는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개수대 앞에 서 있는 문도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무슨 말이냐는 듯 문도가 선우를 보았다.
“다시 그렇게 한다고요?”
따져 묻는 선우를 보는 문도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러다 물을 잠그며 대답을 한다.
“응.”
“제게 했던 짓을, 다시 똑같이요?”
“그래.”
“그게 지금 제게 할 말이에요? 어떻게 그런!”
선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되짚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말이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짓을 할 거라고? 그게 지금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사람 앞에서 할 말인가. 어떻게든 추슬러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할 말인가.
“똑같이 한다고요.”
기가 막혀 왔다. 선우는 문도를 노려보았다.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 없는 거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잊었어?
“그래. 나는 다시 해.”
그 말에 선우는 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묵묵히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그동안 쌓아 왔던 마음에 기어이 불을 질렀다.
“억울하게 죽은 동생 일에 대해 알아보려고 들어온 사람을, 처음부터 누군지 알았으면서, 왜 속이고 들어왔는지 알았으면서…….”
빨갛게 달아오른 시야에 불티가 후룩후룩 날렸다. 열이 오른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드는 것을 느끼며 선우는 말을 이었다.
“불러서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말을 하는 대신에, 왜 여기에 들어왔느냐고 물어보는 대신에, 같이 잠을 잔다고요? 내가 누군지 다 알았는데도?”
“자자고 쳐들어온 건 너야.”
“알고 있었잖아!”
선우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부 알고 있었잖아.
“그때 그만하라고 했어야죠! 내가 정신 나간 여자처럼 몇 번 보지도 않은 남자와 자고 싶다고 올라갔을 때 말을 해 줬어야지! 너 누군지 다 아니까 그만하고 나가라고, 이런다고 바뀌는 거 하나도 없을 거라고 말을 해 줬어야지!”
그게 정상 아닐까. 선우는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그런데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내게 그 짓을 또 하겠다고?
“엎드려 죽어 있던 애 누나가 올라와서 자고 싶다고, 안아 달라고, 몇 번이나 그렇게 올라오면요, 나 같으면요. 나 같으면 이러지 말라고 할 거예요.”
몇 번이나 되돌려 생각을 해 봤었다. 왜 그랬을까. 이력을 속여 저택에 들어간 게 그렇게까지 잘못을 한 일이었던가. 왜 그렇게 잔인하게 가지고 놀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 보라고 할 거고! 억울한 이야기 들어나 볼 거예요! 핸드폰 내줄 마음 없었으면, 사정은 알겠지만 그만하고 나가라고 할 거야. 그게 정상이지!”
처음이었었다. 그 밤의 막막함을, 두려움을, 낯설었던 고통과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당신이 알까. 낯설기만 했던 남자의 몸을 받아들이며 아픈 신음조차 내지 못했던 그 마음을 당신이 알까.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요? 어떻게 똑같이 나한테 다시 그렇게 할 거라고 말을 할 수 있어요? 다시 돌아가도, 내가 누군지 알았는데도, 같이 잘 거라고요?”
이해해 보려 노력했었다. 그래 잘 수도 있지. 매번 올라와서 자자고 매달리는데, 남자니까 그럴 수 있겠지.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해도 마음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서유라의 일로 죽은 아이의 누나인 걸 아는데 그럴 수 있나.
그래도 꾸역꾸역 이해하려 했다.
그 순간 욕망에 취했나 보다. 재밌어 보였나 보다. 쉬워 보였나 보다. 그렇게 억지로 넘길 수 있었다. 정말로 상처가 되었던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럼 그렇게 자고 나서 다시 해고할 거예요? 서유라 말리다가 다쳤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고해 놓고, 다시 만나 달라고, 좋아한다고, 엎드려서 애원하게 만들 거예요?”
문도는 낮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있을 뿐,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우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문도에게 물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때 유라 씨가 난동 피웠을 때 그냥 자르지. 왜 다시 시작하자고 했어요? 왜 나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왜 나한테 다시 희망을 줬어요? 대체 왜!”
남자가 돌아왔던 밤을 기억했다. 민우의 물건들을 모두 모아 마트에서 가져온 라면 박스 안에 넣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물건이 담긴 박스를 테이프로 봉해 창고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민우와 같이 살았던 집에서 남자와 몸을 섞었다. 좋아한다고, 기다렸다고 몇 번이나 남자의 목을 안고 속삭이며.
“다시 말하지만, 매달렸던 건 너야.”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우를 응시하며 문도가 말했다. 낮게 눌린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