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한 입
마감 시간을 앞둔 백화점 식품 매장은 분주했다.
지나는 통로엔 팔도 음식 팝업스토어가 늘어서 있고, 판매 직원은 마감 시간이라며 묶음 세일을 외쳤다.
문도는 복잡한 통로를 비집으며 식품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말이라 그런지, 마감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식품관 안은 번잡스럽기 그지없었다.
평생 내려올 일이 없었던 백화점 식품관에 들른 이유는 딸기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침 식사를 하던 이선우가 바나나를 전부 남기고 딸기만 골라 먹었던 게 생각나서.
장 여사에게 딸기를 좀 더 사 놓으라 말해도 되고, 퀵을 통해 회사로 배달을 시켜도 되지만, 직접 사 들고 가고 싶었다.
먹음직스러운 쿠키, 김이 폴폴 나는 따끈한 옥수수 술빵, 양념이 잘 코팅되어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닭강정이 방해하는 길을 지나 목적지를 향해 흔들림 없이 걸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식품관 안쪽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친절히 인사하며 문도에게 카트를 내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딸기만 한 팩 사면 되는지라 카트는 필요 없었다. 카트를 사양하고 성큼 매장 안으로 들어선 문도는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딸기의 산맥이 그곳에 있었다.
멈춰서서 장대한 딸기 산맥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장 여사와 비슷하게 생긴 중년의 직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어제까지 한 팩에 1만5천원 하던 딸기가 특별 행사로 두 팩에 2만5천원. 그런데 마감 세일이라 두 팩에 2만원에 드려요. 하나 드릴까요?”
“맛은 어떤가요?”
“맛있죠. 백화점에 들어오는 딸기는 특상품이라서 달고 맛있어요. 농장 직송으로 오늘 아침에 받아서 신선하고요.”
고개를 끄덕인 문도는 매대에 올라와 있는 딸기를 신중하게 훑어보았다. 색이 빨갛고 모양은 가지런한 걸로 골라 손에 들었다.
“맛있게 드세요.”
직원의 인사를 들으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큼지막하게 한 알씩 따로 포장이 되어 있는 딸기가 보였다. 뭐지. 이게 더 비싸고 좋아 보이는데?
“킹스베리예요.”
다시 다가온 직원이 문도가 들고 있는 건 설향이고, 보고 있는 건 킹스베리라고 설명을 했다. 복숭아향이 나며 과즙이 풍부한 딸기의 왕이라고.
“이게 더 좋은 거라는 거죠?”
“그렇게들 보긴 하는데 맛이 조금씩 다르다고 보시면 돼요. 포도도 캠벨이 있고 샤인머스캣이 있는 것처럼요.”
맛도 다르다 이거지. 문도는 신중한 눈으로 킹스베리도 골랐다. 이제 세 팩이 된 딸기를 손에 드는데 옆 매대에 희끄무레한 딸기가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이건 만년설 딸기. 핑크 딸기예요. 고 옆엔 금실, 고 옆엔 죽향. 고 옆엔 장희. 다들 특상품이고요.”
아니, 씨발 뭐가 이렇게 많아.
장 여사가 내주는 딸기를 집어 먹기만 했지 직접 사 본 일이 없었다. 문도가 망연한 눈으로 딸기 페스티벌이라 이름 붙여진 딸기 산맥을 바라보는데 직원이 물었다.
“선물하시게요?”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선물까지는 아닌데, 임신을 해서 사다 주려고요.”
“아내분이 임신하셨나 봐요. 축하드려요.”
낯선 사람에게서 ‘아내’라는 말을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이선우와 부부가 된다면.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저릿거렸다.
“첫째 아기예요?”
“네.”
첫째 아기. 그 말이 마음에 짙게 와닿는다. 둘째, 셋째로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너무 좋으시겠네. 어떻게 종류별로 하나씩 담아 드려 볼까요? 너무 많으려나?”
“아니요. 종류별로 두 팩씩 담아 주세요.”
심플하게 한 팩만 들고 갈 계획은 망가졌지만 상관없었다. 기분도 좋은데 양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집에 사람도 많은데 딸기 열 팩 정도, 누가 먹어도 먹게 되겠지.
“예쁜 애들로 골라 드려야겠네.”
마지막까지 마음에 드는 말만 하는 직원이었다.
* * *
똑똑.
손뜨개 모자의 마무리 작업을 하던 선우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왠지 조금 전까지 같이 있다가 이제 막 본관으로 건너간 장 여사일 것 같지 않았다.
“네.”
선우가 나갈 때까지 문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평소의 퇴근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라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아마도 서문도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
문을 열자 우뚝 서 있는 서문도가 보였다. 그리고 문밖으로 딸기 냄새가 진동을 했다.
“무슨……. 일로…….”
당황스러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었다. 선우는 남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퇴근했다고 알려 주려고.”
아니. 그걸 왜 알려 줘. 이제껏 나가든 들어오든 서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 생각했기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대답은 해야겠지. 선우는 대충 대답을 골랐다.
“네. 수고하셨어요.”
“딸기도 사 왔어.”
말 안 해도 알겠다. 딸기 농장에서 온 것처럼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
“네.”
“많이 사 왔으니까 실컷 먹어.”
“네. 감사합니다. 여사님께 말씀드릴게요.”
문도는 이만 가 주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아 말을 하는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느슨하게 머리를 묶고 있는 이선우는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붉은색의 입술을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씻어 줄게. 나와서 먹어.”
선우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망설이다가 그에게 말했다.
“실은 저녁에 많이 먹었어요. 사다 주신 건 내일 먹을게요.”
그러니 이만 가 줄래요. 표정으로 말하며 선우가 문을 잡았다.
사 온 걸 보고 기뻐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형식적인 대답만 할 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다. 그래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사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한 입만 먹지?”
문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럼, 하고 성격 좋은 척 쉽게 돌아서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안다. 머리론 그게 되는데 입으로 그게 안 됐다. 마음은 더욱 그렇고.
선우의 표정이 심란해지는 것이 보였다. 뒤를 돌아 뜨개 뜨던 것을 보더니 한숨을 삼켰다. 딸기 한 알 먹는 게 한숨까지 삼켜야 하는 일이라니.
“나와.”
문도는 쇼핑백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팩을 하나씩 꺼내 올려놓았다. 모두 꺼내 놓으니 열두 팩이다.
조용히 따라 나온 선우가 다이닝룸에 앉았다.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서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뭐가 비싸고 맛이 어떻고 했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물거렸다. 문도는 종류별로 한 팩씩 뜯어 한 알씩 꺼냈다.
각기 다른 품종의 여섯 알을 찬물에 흔들어 씻은 뒤 접시를 꺼내 올려놓았다. 섞어 놓으니 저 커다란 게 킹스베리라는 것만 알겠다.
“먹어 봐.”
앉아 있는 선우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을 하는데 너무 명령조인가 싶다. 전에는 어떻게 말을 했더라.
천만 원 가까이 하는 목걸이를 선물할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깟 딸기가 뭐라고 말투까지 신경이 쓰이나.
“잘 먹을게요.”
“제일 큰 게 킹스베리고, 품종이 다 다른데.”
왜 이딴 설명을 하고 있는가. 자괴감이 드는 순간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나머진 기억 안 나.”
다소 시니컬하게 나온 목소리에 선우가 아주 살짝 웃었다. 입술을 깨물어 금방 지우긴 했지만 분명 웃었다.
“웃으니까 좋네.”
문도의 말에 선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옆에 놓아준 포크를 들어 딸기를 찍을 뿐이다. 피식 웃은 문도는 제일 큰 딸기를 선우가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입, 또 한 입. 사라지는 딸기를 바라보다 문도가 불쑥 말했다.
“너만 괜찮으면…….”
딸기를 먹던 선우가 눈을 들어 문도를 보았다.
“결혼하는 건 어때.”
충동 반, 결심 반으로 건넨 말에 선우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네?”
“결혼 말이야.”
선우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나쁠 것 없지 않나. 아이에겐 안정된 환경이 필요할 거고, 부모가 따로 사는 것보다 한집에서 부부로 지내는 게 정서적으로도 좋을 거였다.
이선우는 어머니와 장 여사와도 잘 지내고, 혼자 아이를 낳고 싶어 할 정도로 가족을 원했으니까. 그러니까.
갖은 구실을 가져다 붙이는데 선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전무님이랑, 제가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듯 선우가 미간을 한 번 더 찌푸렸다. 아니, 애까지 가진 상태에서 결혼을 생각해 보자는 게 뭐 그렇게 못 할 말이라고.
“그럼 누가 따로 있나?”
비딱하게 나오는 문도의 목소리에 선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 내린대도 이것보단 덜 황당할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왜……. 아니……. 아니요.”
포크를 내려놓은 선우는 한 번 더 인상을 썼다. 너만 괜찮으면 결혼하는 건 어떠냐니. 지금 누굴 적선하는 건가. 네가 원한다면 하겠다는 듯한 저 태도는 뭐지.
“아니요, 전무님.”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해지는데 결혼이라고.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루 몇 분, 마주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너울을 탔다. 방금도 그랬다. 제멋대로 딸기를 사 오고 제멋대로 먹으라 하고. 평소 하지도 않던 일을 해서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놓고는.
“아이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가정환경이 나을 테니까.”
“아니요. 그게 어떻게 안정적일 수가 있어요.”
어이없고 화가 나서 선우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직원이었을 때처럼 건조하게 대하겠다는 아침의 다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안정적이지 않을 건 또 뭐야.”
안정적이지 않을 건 또 뭐냐고? 지금 이게 말이라고 하는 소리일까? 당신이 내게 어떤 일을 했었는지 잊었어?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전무님은 제게 너무 큰 상처를 주셨어요. 다시 찾아오셔선 아이를 지우라 하셨고, 빼앗아 가겠다고도 하셨고요. 이 모든 일들을 잊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잊으려 노력하는 거. 그것만 해도 힘들고 벅찬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려는 듯 선우가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깊이 쉬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꽉 쥐고 있는 주먹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에게 아빠 자리를 빼앗지 않는 거. 미워하고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거. 그게 최선이에요. 그러니까 전무님도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이 아이에게 좋을 리 없잖아요.”
“아이 때문이 아니라면. 그러면, 생각해 볼래?”
문도는 다시금 눈을 좁혀 뜨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이선우를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구질구질한 이유를 가져다 붙였지만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하는 건 하나였으니까.
“나는 이선우 좋아해.”